▲ 정재훈 약사때에 맞는 말이 아름다운 것처럼, 약 사용도 시간이 중요하다. 특정 항암제를 아침에 주는 것과 저녁에 주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알아보려고, 진행성 난소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5년 동안 생존율을 비교 연구했다.
한쪽은 아침 6시에 A 항암제(독소루비신)를 투여하고 저녁 6시에 B(시스플라틴) 항암제를, 다른 쪽은 순서를 바꾸어서 B를 아침에, A를 저녁에 투여했다. 같은 약을 동일 용량으로 투여하면서 시간대별로 순서만 바꾸어 준 것이다.
그런데 아침에 A, 저녁에 B를 투여한 사람들은 5년 뒤 44%가 생존했지만, 순서를 반대로 하여 약을 준 경우는 생존율이 11%에 불과했다. 약을 먹는 시간만 다르게 했는데 커다란 차이가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독소루비신을 아침에 투여했을 때 백혈구 감소 부작용이 덜한 것과 연관된 것으로 추측된다.
아직 항암제와 투여 시간에 따른 효과 및 부작용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한 것인지는 더 많은 후속 연구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특정한 약을 언제 사용하느냐에 따라 약효와 부작용에 차이가 나타나는 사례는 많다.
예를 들어, 테오필린을 함유한 천식약(유니필)은 저녁 식사 뒤에 복용하는 게 좋다. 이른 아침에 저하된 폐 기능으로 인해 천식증상이 악화될 때 약물 혈중 농도가 최고치에 이르게 되어 제때 약효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폐 기능뿐만 아니라 혈압, 혈당치도 24시간 주기적으로 변한다. 인간은 낮에 주로 먹고 활동하며, 밤에 자는 것처럼 생체시계를 따라 변화하는 일주기 리듬(circadian rhythm)을 가지고 있다. 앞서 천식의 경우를 예로 든 것처럼 질병의 증상도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에 따라 항고혈압약을 아침에 복용하는 게 유익한 경우가 있고 저녁에 복용하는 게 나은 경우가 있다.
보통 혈압을 떨어뜨리는 약은 매일 아침에 복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만성신장질환 등으로 밤중에도 떨어지지 않는 환자의 경우 고혈압치료약을 자기 전에 복용하도록 권하는 경우가 있다.
서방형 칼슘채널차단제처럼 저녁에 자기 전에 복용하여 아침녘에 최대 효과를 나타내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된 항고혈압약도 있다. 이런 약을 복약 상담할 때는 환자가 복용 시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 반드시 점검해봐야 한다.
감염성 질환의 치료에 있어서도 약과 시간의 관계가 중요하다. 단순포진 바이러스 감염에 의해 생기는 구순포진(cold sore)이 자주 나타나는 경우 항바이러스제 크림을 쓰면 증상 지속기간이 0.5일 정도 단축되는데, 이 때 효과를 제대로 보려면 약을 증상 초기 1시간 내에 신속하게 발라줘야 한다.
요즘 매스컴에 화제로 자주 오르는 대상포진의 경우도 증상이 나타나고 72시간 내에 항바이러스제를 복용하면 통증과 증상지속기간을 줄일 수 있지만 이보다 늦게 쓰면 효과가 떨어진다.
약 사용이 빠를수록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캐나다에서는 어린이 중이염에 항생제를 쓰는 경우, 나이가 2살 이상인 경우에는 48-72시간 정도 지켜보는 방법(wait and see)이 종종 사용된다.
처방을 받고 나서 잠시 기다렸다가 약을 탈 것인지 보호자가 결정하라는 것인데, 염증이 저절로 나을 수도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항생제 사용을 줄이기 위한 조치이다. 감기나 비염 증상에 무조건 처음부터 항생제를 쓰지 않고 1주일 정도 기다렸다가 증상이 계속 악화되거나 좋지 않을 때에 한하여 사용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약과 시간의 관계에 관한 한 여전히 모르는 게 더 많다. 장기간 약물 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특정한 약을 복용하고 나서 하루 뒤, 일주일 뒤, 한 달 뒤에 어떤 증상 변화가 나타날 수 있으며, 어떤 부작용을 경험할 수 있는가는 중요한 정보이다.
가령 금연을 계획 중인 사람이 금연보조제 복용 1, 2, 3주에 무엇을 경험할지 미리 알면 약 복용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아직까지 이러한 정보는 시간 순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으며, 약 사용 초기에 나타나는 부작용과 장기간 사용시 나타나는 부작용, 복용 기간과 관계없이 가능한 부작용에 대해서도 정리가 부족하다.
약 사용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환자들의 네트워크가 발전하면서 약과 시간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수 있을 것인가, 미래 언젠가는 약효와 부작용에 대한 정보를 시간 순으로 정리해서 볼 수 있을 것인가. 시간만이 답을 알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