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 시각
우리는 사물이나 사태를 ‘객관적으로 본다’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정확하고 공정하게 바라본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반면에 ‘주관적으로 본다’고 하면 불공정하게, 즉 나에게 유리하게 바라본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대개 객관성이 주관성보다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오늘은 객관적 시각, 나아가 소위 메타인지(meta認知)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대전제 하에 다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음을 가볍게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오래전 한·일 축구 경기 중계 방송의 해설자가 ‘너무 객관적으로 해설을 한다’고 해서 해설자 자리를 뺏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에 대해 우리 아들은 “우리끼리 보는 방송인데, 꼭 그렇게 객관적일 필요가 있나요?” 라고 코멘트 했다.
예컨대 일본 선수와 우리 선수가 충돌했을 때 웬만한 상황에서는 ‘일본 선수의 잘못’인 것 같다고 말해주면 시청자들이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들의 논리에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로부터 모든 상황에서 객관성이 늘 최선은 아니라는 통찰(通察)을 얻게 되었다.
특히 가족 관계에서 그래 보인다. 아내가 이웃과 다투었을 때 객관적으로는 아내의 잘못이 더 커 보일 때라도 남편은 우선 아내의 편을 들어주어야 한다. 또 아버지가 남과 시비에 휘말렸을 때 자식은 우선 아버지의 편에 서야 한다.
여기에서 객관적이라고 할 때의 객(客)이라는 글자의 의미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남의 집을 방문했을 때 주인이 수정과(水正果)를 내오면 내가 손님(賓) 대접을 받는 것이고 식혜(食醯)를 내오면 지나가다 들른 ‘과객(過客)’ 정도의 대접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수정과는 수정과액에 곶감을 넣고 한참을 불린 뒤에야 손님에게 낼 수 있어서 기다리고 있던 손님에게만 낼 수 있다. 반면에 식혜는 그냥 퍼주면 되는 음식이므로 불쑥 찾아온 나그네에게는 식혜를 낼 수 밖에 없다.)
큰 행사장에서 축사(祝辭)를 부탁받는 사람은 내빈이지 객이 아니다. 만약에 객이 ‘객(客)쩍게’ 내빈 행세를 하려 들면 십중팔구 비웃음을 사게 된다. 이처럼 객은 주인이 기다리던 손님이 아닐뿐더러 가끔은 주인에게 번거로운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객관적(客觀的)’이라는 말로부터는 주인 정신이 결여되고 무책임하며 다소 냉소(冷笑)적인 시선(視線)마저 느껴진다.
시험 문제에도 주관식과 객관식이 있는데 객관식에서는 정답이 아닌 답지(答枝)를 고르면 무조건 0점이다. 그래서 채점자의 재량이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객관식은 공정하지만 냉정한 평가 방법이다.
반면 주관식에서는 정답은 아니더라도 논리를 갖추어 성의껏 답안을 쓰면 얼마간의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주관식 시험이 객관식 시험보다 조금 더 인간적이라고 하면 궤변(詭辯)일까?
아무튼 앞에서 중계방송을 예로 들었지만 범사를 객관적으로만 바라보기로 한다면 세상은 한결 재미없고 삭막해질 것이다. 특히 가정사를 객관식 문제처럼 봤다가는 큰 낭패(狼狽)를 당할 우려가 크다. 부부 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효도와 사랑, 그리고 형제 간의 우애(友愛) 문제에 대한 해법을 어찌 ‘옳다·그르다’라는 객관식 답지(答枝) 중에서 선택할 수 있겠는가?
가족을 마치 과객(나그네, 남) 대하듯 지나치게 객관적으로 보고 비교 평가한다면 그 가정에 무슨 안식과 따듯함이 있겠는가? 그러나 가족 한 명 한 명을 정성을 다해 대접해야 할 내빈, 아니 더 나아가 나와 함께 우리 가정을 일궈야 할 ‘주인(主人) 중의 하나’로 여긴다면 필경 그 가정에는 화목과 사랑이 찾아오게 될 것이다.
우리 집, 우리 회사 그리고 우리 나라를 객관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남의 집, 남의 회사, 남의 나라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일은 결코 편협(偏狹)함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정서이고 인습(因習)이다.
물론 정도가 지나쳐서는 안 되겠지만 객관적이라는 미명(美名) 하에 우리라는 공동체에 대해 마치 남을 대하듯 차가운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상을 사는 데는 어느 정도 ‘주관식’ 시각과 같은 여백과 따듯함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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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어 순차적으로 발간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
객관적 시각
우리는 사물이나 사태를 ‘객관적으로 본다’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정확하고 공정하게 바라본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반면에 ‘주관적으로 본다’고 하면 불공정하게, 즉 나에게 유리하게 바라본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대개 객관성이 주관성보다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오늘은 객관적 시각, 나아가 소위 메타인지(meta認知)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대전제 하에 다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음을 가볍게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오래전 한·일 축구 경기 중계 방송의 해설자가 ‘너무 객관적으로 해설을 한다’고 해서 해설자 자리를 뺏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에 대해 우리 아들은 “우리끼리 보는 방송인데, 꼭 그렇게 객관적일 필요가 있나요?” 라고 코멘트 했다.
예컨대 일본 선수와 우리 선수가 충돌했을 때 웬만한 상황에서는 ‘일본 선수의 잘못’인 것 같다고 말해주면 시청자들이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들의 논리에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로부터 모든 상황에서 객관성이 늘 최선은 아니라는 통찰(通察)을 얻게 되었다.
특히 가족 관계에서 그래 보인다. 아내가 이웃과 다투었을 때 객관적으로는 아내의 잘못이 더 커 보일 때라도 남편은 우선 아내의 편을 들어주어야 한다. 또 아버지가 남과 시비에 휘말렸을 때 자식은 우선 아버지의 편에 서야 한다.
여기에서 객관적이라고 할 때의 객(客)이라는 글자의 의미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남의 집을 방문했을 때 주인이 수정과(水正果)를 내오면 내가 손님(賓) 대접을 받는 것이고 식혜(食醯)를 내오면 지나가다 들른 ‘과객(過客)’ 정도의 대접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수정과는 수정과액에 곶감을 넣고 한참을 불린 뒤에야 손님에게 낼 수 있어서 기다리고 있던 손님에게만 낼 수 있다. 반면에 식혜는 그냥 퍼주면 되는 음식이므로 불쑥 찾아온 나그네에게는 식혜를 낼 수 밖에 없다.)
큰 행사장에서 축사(祝辭)를 부탁받는 사람은 내빈이지 객이 아니다. 만약에 객이 ‘객(客)쩍게’ 내빈 행세를 하려 들면 십중팔구 비웃음을 사게 된다. 이처럼 객은 주인이 기다리던 손님이 아닐뿐더러 가끔은 주인에게 번거로운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객관적(客觀的)’이라는 말로부터는 주인 정신이 결여되고 무책임하며 다소 냉소(冷笑)적인 시선(視線)마저 느껴진다.
시험 문제에도 주관식과 객관식이 있는데 객관식에서는 정답이 아닌 답지(答枝)를 고르면 무조건 0점이다. 그래서 채점자의 재량이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객관식은 공정하지만 냉정한 평가 방법이다.
반면 주관식에서는 정답은 아니더라도 논리를 갖추어 성의껏 답안을 쓰면 얼마간의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주관식 시험이 객관식 시험보다 조금 더 인간적이라고 하면 궤변(詭辯)일까?
아무튼 앞에서 중계방송을 예로 들었지만 범사를 객관적으로만 바라보기로 한다면 세상은 한결 재미없고 삭막해질 것이다. 특히 가정사를 객관식 문제처럼 봤다가는 큰 낭패(狼狽)를 당할 우려가 크다. 부부 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효도와 사랑, 그리고 형제 간의 우애(友愛) 문제에 대한 해법을 어찌 ‘옳다·그르다’라는 객관식 답지(答枝) 중에서 선택할 수 있겠는가?
가족을 마치 과객(나그네, 남) 대하듯 지나치게 객관적으로 보고 비교 평가한다면 그 가정에 무슨 안식과 따듯함이 있겠는가? 그러나 가족 한 명 한 명을 정성을 다해 대접해야 할 내빈, 아니 더 나아가 나와 함께 우리 가정을 일궈야 할 ‘주인(主人) 중의 하나’로 여긴다면 필경 그 가정에는 화목과 사랑이 찾아오게 될 것이다.
우리 집, 우리 회사 그리고 우리 나라를 객관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남의 집, 남의 회사, 남의 나라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일은 결코 편협(偏狹)함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정서이고 인습(因習)이다.
물론 정도가 지나쳐서는 안 되겠지만 객관적이라는 미명(美名) 하에 우리라는 공동체에 대해 마치 남을 대하듯 차가운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상을 사는 데는 어느 정도 ‘주관식’ 시각과 같은 여백과 따듯함이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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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심창구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약학대학 교수와 식품의약품안전청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으로 대한약학회 약학사분과학회 명예회장과 서울대 약학박물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심 교수의 약창춘추 칼럼은 2007년 처음 게재된 이후 현재까지 약 400여 회 이상 집필을 이어오고 있는 가운데 그동안 3권(약창춘추, 약창춘추2, 약창춘추3) 책으로 묶어 순차적으로 발간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 발간된 약창춘추3은 현재 교보문고를 비롯한 시중 인터넷 서점과 약업닷컴 북몰을 통해 구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