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 정년이 가까워지면서 우연한 기회에 한국약학사 연구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운 좋게 2015년 서울대 약대의 ‘가산약학역사관’ 개관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현재 명예관장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갖고 있다.
그 후 『한국 약학의 아버지 녹암 한구동』(2016), 『서울대학교 개학반세기사』(2016) 중 약학대학의 전사(前史), 『한국약학사』 (2017), 『서울대학교약학대학100년사』(2017), 『대한민국 약학박사 1호 대하 홍문화』(2020) 등을 편저술하였으며, 대한약학회 내에 ‘약학사분과학회’를 창립(2014)하여 ‘근대약학교육기관 설립 100주년 기념심포지엄(2015)’을 비롯하여 매년 2회의 약학사 심포지엄(현재까지 총 19회)을 개최하였고, 2018년 이래 연 1회 『약학사회지』를 발간해 오고 있다.
약학역사관의 개관 빛 서울대약대100년사의 저술은 당시 이봉진 학장의 획기적인 결단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 학장은 약학역사관 개관을 위하여 전담 직원을 채용해 주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근대약학 교육사를 처음으로 정리할 수 있었음에 큰 보람을 느낀다.
2007년부터는 약업신문에 격주로 ‘약창춘추’라는 칼럼을 쓰고 있다. 현재 384회를 넘었는데, 그간의 글을 두 권의 수필집으로 묶어냈다. 나머지 글도 조만간 3, 4권으로 묶어내야 할 것 같다. 2012년에는 『새로운 약은 어떻게 창조되나』라는, 일본 교토 대학 교수들이 쓴 약학 입문서를 번역하였는데 2023년 현재 놀랍게도13쇄를 찍었다. 13쇄 인쇄는 전공서적으로는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한다. 왜 이 책이 이리 잘 팔리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할 때가 많다.
2013년 정년 후 약 5년간은 대웅제약에서 고문 겸 사외이사로 근무하였다. 거기서도 학술서적 발간 시 교정 및 편집을 도왔다. 2020년부터는 2년간 서울대 약대 25대 동창회장을 맡아 동창회보 98호 및 99호의 기획 및 편집을 주도하였다. 26대 원희목 동창회장의 부탁으로 제100호 및 101호 동창회보의 편집도 돕고 있다. 나는 동창회보를 통해서도 되도록 선배님들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약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노력하였다.
몇년간은 서울 대학교 ‘명예교수회보’의 발간을 돕기도 했다. 이제 와 돌아보니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이 그나마 내가 제일 잘 하고 좋아하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하며 지낼 수 있는 지금의 내 상황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솔직히 별로 명민(明敏)하지 못하고, 왜소(矮小)하며 병약(病弱)한 내가, 요만큼이나마 바시락거리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나 고비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의 길로 나를 인도하셨다. 예컨대 일류중학교인 인천중학교 입시에 떨어지게 하신 것은 특별한 배려이셨다. 만약에 내가 인천중학교에 합격하였다면, 나는 재학 중 낙제 선상에서 헤매는 낙오자(落伍者)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여파로 인생에서 낙오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인천중학교에 낙방(落榜)한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한다.
동산중학교를 거쳐 제물포고등학교 입시에 도전, 입학하게 하신 것은, 우선 사다리 한 칸을 올라간 다음, 그곳을 발판삼아 다시 다음 칸에 도전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배려였다. 사다리 한 칸을 오르고 나면 그 위에 또 한 칸이 있음을 깨닫는다. 사다리의 위 칸은 언제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 나의 인생길은 이처럼 딱 한 칸 위의 새로운 비전을 보고 한 칸씩 오른 사다리 길이었다.
‘한 칸씩 오르기’는 천재(天才)나 수재(秀才)가 택하기에는 답답한 방법이다. 그들은 한 번에 몇 칸씩도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한 칸씩 올라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의 ‘한 칸씩 오르기’ 방법론이 천재나 수재가 아닌 후배들에게 혹시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다.
교수 정년이 가까워지면서 우연한 기회에 한국약학사 연구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운 좋게 2015년 서울대 약대의 ‘가산약학역사관’ 개관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현재 명예관장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갖고 있다.
그 후 『한국 약학의 아버지 녹암 한구동』(2016), 『서울대학교 개학반세기사』(2016) 중 약학대학의 전사(前史), 『한국약학사』 (2017), 『서울대학교약학대학100년사』(2017), 『대한민국 약학박사 1호 대하 홍문화』(2020) 등을 편저술하였으며, 대한약학회 내에 ‘약학사분과학회’를 창립(2014)하여 ‘근대약학교육기관 설립 100주년 기념심포지엄(2015)’을 비롯하여 매년 2회의 약학사 심포지엄(현재까지 총 19회)을 개최하였고, 2018년 이래 연 1회 『약학사회지』를 발간해 오고 있다.
약학역사관의 개관 빛 서울대약대100년사의 저술은 당시 이봉진 학장의 획기적인 결단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 학장은 약학역사관 개관을 위하여 전담 직원을 채용해 주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근대약학 교육사를 처음으로 정리할 수 있었음에 큰 보람을 느낀다.
2007년부터는 약업신문에 격주로 ‘약창춘추’라는 칼럼을 쓰고 있다. 현재 384회를 넘었는데, 그간의 글을 두 권의 수필집으로 묶어냈다. 나머지 글도 조만간 3, 4권으로 묶어내야 할 것 같다. 2012년에는 『새로운 약은 어떻게 창조되나』라는, 일본 교토 대학 교수들이 쓴 약학 입문서를 번역하였는데 2023년 현재 놀랍게도13쇄를 찍었다. 13쇄 인쇄는 전공서적으로는 매우 드문 일이라고 한다. 왜 이 책이 이리 잘 팔리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할 때가 많다.
2013년 정년 후 약 5년간은 대웅제약에서 고문 겸 사외이사로 근무하였다. 거기서도 학술서적 발간 시 교정 및 편집을 도왔다. 2020년부터는 2년간 서울대 약대 25대 동창회장을 맡아 동창회보 98호 및 99호의 기획 및 편집을 주도하였다. 26대 원희목 동창회장의 부탁으로 제100호 및 101호 동창회보의 편집도 돕고 있다. 나는 동창회보를 통해서도 되도록 선배님들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약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노력하였다.
몇년간은 서울 대학교 ‘명예교수회보’의 발간을 돕기도 했다. 이제 와 돌아보니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이 그나마 내가 제일 잘 하고 좋아하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하며 지낼 수 있는 지금의 내 상황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솔직히 별로 명민(明敏)하지 못하고, 왜소(矮小)하며 병약(病弱)한 내가, 요만큼이나마 바시락거리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나 고비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의 길로 나를 인도하셨다. 예컨대 일류중학교인 인천중학교 입시에 떨어지게 하신 것은 특별한 배려이셨다. 만약에 내가 인천중학교에 합격하였다면, 나는 재학 중 낙제 선상에서 헤매는 낙오자(落伍者)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여파로 인생에서 낙오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인천중학교에 낙방(落榜)한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한다.
동산중학교를 거쳐 제물포고등학교 입시에 도전, 입학하게 하신 것은, 우선 사다리 한 칸을 올라간 다음, 그곳을 발판삼아 다시 다음 칸에 도전하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배려였다. 사다리 한 칸을 오르고 나면 그 위에 또 한 칸이 있음을 깨닫는다. 사다리의 위 칸은 언제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 나의 인생길은 이처럼 딱 한 칸 위의 새로운 비전을 보고 한 칸씩 오른 사다리 길이었다.
‘한 칸씩 오르기’는 천재(天才)나 수재(秀才)가 택하기에는 답답한 방법이다. 그들은 한 번에 몇 칸씩도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한 칸씩 올라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나의 ‘한 칸씩 오르기’ 방법론이 천재나 수재가 아닌 후배들에게 혹시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