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구 교수의 약창춘추
<357> '유학 중 연구실 안팎' - 삶 속의 작은 깨달음12
편집부
입력 2022-10-13 09:31
수정 최종수정 2022-10-13 10:06
(16) 자기 연구 주제에 대한 주인 정신
박사과정 지도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자기가 연구할 주제를 스스로 정해 제안하게 하셨다. 학생은 전 교실원 앞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의 주제와 배경 그리고 의의를 발표해 지도교수의 승락을 받아야 했다. 독창성이 없거나 의미가 없는 주제는 교수님을 설득할 수 없었다. 학생이 발표를 잘 해도 대개는 ‘네 제안에 문제가 많은데 잘 극복할 자신이 있으면 한번 해보라’고 소극적인 승낙을 해주실 뿐이었다.
나중에 내가 교수가 되고 보니 이 방법은 지도교수로서 매우 지혜로운 방법이었다. 우선 만의 하나 과제가 잘 진행되지 않아도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학생 본인이 져야 했다. 자기가 제안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도쿄 대학생들은 자기 연구 주제에 대해 주인정신을 가지고 그 가치를 관리하는 것 같았다. 가끔 두 세명이 모이면, 서로 ‘네 연구는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고 대답하는 모습을 여러번 봤다. 또 학생들은 남보다 더 많은 논문을 쓰려고 경쟁하였다. 당시(1970년대 후반)의 일본 약학계는 외국잡지에 많은 논문을 내려고 열을 올릴 때였다. 교수님은 갯수나 늘리려고 논문은 써선 안된다고 한가한(?) 잔소리를 하셔도 될 정도였다.
내가 나중에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지도해 보니 당시의 서울대 대학원생들에게는 자기 과제에 대한 주인정신이 부족하였다. 세미나 시간에 “너는 왜 이 연구를 하고 있는가?” 물었더니 “교수님이 시키셨잖아요?”라고 대답하는 학생이 있을 정도였다. 또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려는 의지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요즘 서울대 대학원생들은 국제학술지 중에서도 매우 저명한 학술지에만 투고하려고한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17) 결혼식 피로연의 초대가수가 되다
도쿄대제제학 교실의 대학원 학생들은 매주 금요일 오후에는 교수실에 모여 교수님과 함께 술을 마시며 논다. 그 정도로 교수님은 술을 좋아하셨다. 일종의 다과회 겸 친목회인데 이런 모임을 콤파라고 불렀다. 그 콤파에서 술이 좀 들어가면 영락없이 노래부르기를 시작한다. 아직 가라오케는 없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노래 부르기를 좋아는 했지만 노래를 썩 잘 부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보고는 한국 가요를 불러 보라고 했다. 나는 ‘가슴아프게’ 같은 한국 가요들을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박사과정 남학생 하나가 나보고 자기 결혼식 피로연에 와서 축가를 불러 달라고 했다. 나는 우리나라 식으로 시끌벅적한 피로연이라면 뭐 못 부를 것도 없겠지 생각하고 그러마 수락하였다. 그러나 당일 피로연장에 가보고 큰 일이 벌어진 걸 깨달았다.
알고 보니 일본의 피로연은 마치 우리나라의 국경일처럼 매우 엄숙하게 진행되는 행사였던 것이다. 피로연장에 들어가기 전에 방명록에 붓글씨 서명을 해야 할 때부터 긴장되기 시작하였다. 피로연장에 들어가 하객용 지정석에 앉아 보니 인쇄된 식순지가 놓여 있었다. 내 축가 순서는 중매인 인사와 명사(名士)들의 축사 다음이었다. 나는 피로연 분위기가 이처럼 경직된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식장을 한바퀴 둘러보니 홀 맨 앞 긴 테이블 중앙에 중매인(나까오또) 부부가, 그 좌우에 신랑 신부가, 그리고 그 좌우에 축사를 할 몇 분이 앉아 있었다. 양가 부모는 의외로 일반 하객석에 앉아 있었다. 피로연은 코스 식사와 함께 진행되었는데, 나는 긴장되어 제대로 음식을 즐길 수도 없었다. 마침내 내 순서가 되었을 때, 나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최무룡씨가 불렀던 ‘단둘이 가봤으면’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흰구름이 피어오른’으로 시작되는 가요였다. 일부러 일본인들이 모르는 노래를 선택한 것이었다. 덕분에 어찌어찌 내 순서를 마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내가 무식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런데 내 노래 평판이 그리 나쁘지 않았는지 6개월 후, 다른 학생의 피로연에서 또 한번 축가를 부르게 되었다. 이 초대가수 사건은 오랫동안 내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무대로 나가다 당황하는 꿈을 아직도 꿀 때가 있다.
아 옛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