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러스
심창구 교수의 약창춘추
<352> '회사에서'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7
편집부
입력 2022-07-27 21:19 수정 최종수정 2022-08-1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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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평가기술이 제조기술이다
제대 후 대학원에 복학하여 약품분석 연구실에 나갔다. 당시 나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돈을 벌며 대학원에 다닐 수 있을까’였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영진약품에 다니는 2년 선배 J가 학교로 찾아와, ‘영진약품에 취직하면 대학원에 다니게 해 준다’며 입사를 권유하였다. 이 말에 바로 영진약품을 찾아가 취직하였다. 1974년 7월 2일이었다.
 
입사부터 하고 얼마 후에 김생기 사장님의 면접을 보았다. 10분간 면접을 마치고 나오니 C 부장님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현금 20만원이 들어 있었다. 20만원이면 당시 한 달 봉급(6만원)의 3배가 넘는 거금이었다. 놀라서 웬 돈이냐고 했더니 “그냥 학비에 보태 쓰라”고 했다. 아마 사장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하는 모습이 기특해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이 돈의 일부로 흑백 TV를 사서 시골의 부모님께 보내드렸다. 우리집이 월남전에서 돌아온 선배댁에 이어 동네 두 번째로 TV가 있는 집이 되었다. 그때의 흐뭇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1975년) 회사는 앰피실린이라는 항생물질을 함유한 펜브렉스라고 하는 분말 시럽제를 제조 판매하고 있었다. 복용 시 물을 넣어 흔들어 녹인 후 어린이에게 투여하는 약이었다. 나는 이 약 중의 앰피실린 함량(含量)을 정량(定量) 분석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어느 날 늘 하던대로 시럽제에 물을 넣어 실험대 선반에 올려 놓았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이 약 고유의 핑크 색이 점점 엷어지는 것이었다. 이를 상사에게 보고하였더니 회사에 난리가 났다. 그리고 내게 그 원인을 신속히 찾아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러나 이 시럽제에는 첨가제(添加劑)가 20가지나 들어 있어서 탈색(脫色)의 원인을 밝히기가쉽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탈색이 일어났다는 것은 환원제(還元劑)의 혼입(混入) 때문일 것 같았다. 그래서 시럽제의 원료를 칭량(稱量)하는 원료실에 가보니 첨가제 중의 하나인 sodium sulfate(SS)통 옆에 환원제인 sodium thiosulfate(ST)통이 놓여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제조시에 SS대신 착오로 ST를 넣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 실험실로 돌아와 SS 대신 ST를 넣어 시럽제를 조제하고 물을 넣어 보았더니 앞서 발견한 것과 똑 같은 탈색 현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다시 원료실에 가 살펴보았더니 예상대로 SS는 장부보다 많이, 그리고 ST는 장부보다 모자라게 남아 있었다. SS 대신 ST를 잘못 첨가한 것이 탈색의 원인이었던 것이다.이 사고의 원인을 명쾌하게 밝혀낸 공로로 나는 다음해인 76년 1월 4일 ‘제1회 창의상(創意賞)’을 받게 되었다. 상금이 무려 10만원이나 되었다. 다음 해(1977년)에도 나홀로 이 상을 또 받아 좀 민망하였다.
 
사장님은 처음부터 평사원인 나를 간부회의에 참석시킬 정도로 예뻐하셨다. 회의에 참석해 보니 간부들은 사장님이 무서워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 물정을 몰랐던 몰랐던 나는 의견이 있으면 그냥 발언을 하였다. 그 결과 준(準)사원 채용이 공정해지는 등 내 의견이 업무에 반영된 사례도 몇 건 있었다. 아무튼 영진약품 시절은 철부지인 내가 일생을 통해 가장 자신감있게 지내던 시절이었다.
 
1976년에 시험과(試驗課)를 떠나 연구과(硏究課)의 주임 대리로 승진하였지만 사원 1명, 보조원 1명이 부하의 전부였다. 이 때 일본에서 팔리고 있던 어린이 생약(生藥) 감기약인 ‘남천(南天) 시럽’을 모방해 만들라는 지시를 받아 시행착오 끝에 당시 보건원의 제품허가를 받아냈다. 요즘 말로 제네릭을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든 시럽제의 품질, 즉 유효성과 안전성을 평가하는 방법을 알 수 없어 답답하였다. 당시 회사에는 그런 기술을 가르쳐 주는 선배가 없었다.
 
나는 이 경험을 통하여 ‘좋은 약을 만드는 기술이란, 어떤 약이 좋은 약인지 평가(評價)하는 기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훗날 내가 약제학을 대하는 기본 정신 자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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