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창구 교수의 약창춘추
<351> '군대에서' - 삶 속의 작은 깨달음 6
편집부
입력 2022-07-13 11:42
수정 최종수정 2022-08-19 09:33
(8) 부조리와 세월에 대한 인내를 배우다.
대학 졸업 후 석사 과정에 들어가 1학기를 마칠 즈음인 6월 20일 원주 38사단의 신병교육대에 입소하였다. 7월 2일 군번(65023447)을 받고 8월 15일까지 6주간 신병 훈련을 받았다. 내가 받은 M1 소총, 판쵸 우의(雨衣), 군복, 훈련화 등은 다 내게 너무 컸다. 구보 때 신발이 맞지 않아 발에 피가 나는 날도 적지 않았다. 워낙 더운 때라 다른 훈련병들의 고생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6주 후 훈련소 문을 나설 때는 모두 가슴 뜨거운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진짜 사나이’가 된 기분이었을까?
훈련소를 떠나 기차를 타고 천리길 사천(泗川)에 가서 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하였다. 항공학교는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부대였다. 거기서 12주 동안 육군 항공기 정비 기술을 배웠다. 부대 안에 공군 사관학교(空士)를 졸업하여 파일럿트 자격까지 딴 목사님이 담임을 맡은 교회가 있었다. 처음 들은 설교 주제는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였다. 감동적인 이 설교는 훗날 내가 크리스챤이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1971년 10월 16일 육군항공학교를 졸업(111기)하고 다시 진해에 있는 육군수송학교에 가서 14주 동안 추가로 항공기 정비 교육을 받았다. 수송학교는 항공학교와 딴판으로 말할 수 없이 부패한 부대였다. 입학 첫날 교육생들을 모아 놓고 ‘돈은 중대(中隊) 본부에 맡겨야 안전하다’고 협박하여 돈을 갈취하였다. 일과(日課) 후에는 아무 말 없이 매일 빵 1개씩을 주었다. 그리고 월말에 한 푼의 봉급도 주지 않았다. 내가 먹은 빵값을 빼고 나면 줄 돈이 안 남는다고 했다.
수송학교의 저녁 점호(點呼)는 더 가관(可觀)이었다. 각종 기합이 따르는 점호는 공포의 시간이었는데, 부대 내 PX에서 막걸리를 사 마신 사람은 점호에서 빼 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군대가 썩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남북 간에 전쟁이 나면 국군이 어느 쪽을 향해 총을 쏠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각종 부패가 이 정도로 척결된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다.
1971년 12월 11일 수송학교를 졸업(10기)하였다. 그 중 18명이 원주에 있는 항공기 정비 중대로 배치되었다. 나는 경남 사천과 진해를 돌아 다시 원주로 돌아온 것이다. 항공기 정비 중대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은 고참(古參), 즉 항공학교 선배(104기)들의 괴롭힘이었다. 그들로부터 제대할 때까지 개인당 약 500대의 빳다를 맞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참 못된 사람들이었다.
빳다가 아니더라도 군생활은 충분히 고되었다. 부대원 전원이 매일 낮에 2시간, 밤에 2시간씩 활주로 보초를 서야만 했다. 게다가 나는 비행기 정비 시간과 경비 등의 통계를 내는 정비소대(整備小隊) 서무로서의 기본 업무 외에, 산더미 같은 비행기 정비 매뉴얼(영어)을 번역하는 일, 군수지원사령부로부터 의약품을 수령하여 부대원들에게 나눠주는 일까지 했다. 일 잘 한다고 평이 나면 점점 할 일이 많아지는 것은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나는 요령을 피우지 않고 모든 일을 성실하게 하였다. 유격 훈련도 두 번이나 받았다. 그 와중에 천하의 농땡이가 모범사병 표창을 받는 코메디도 보았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11월 21일 유신헌법의 찬반을 묻는 국민 투표를 시행하였다. 부대에서는 일반국민들에 앞서 부재자 투표를 하였다. 그런데 투표용지를 보니 “나는 대통령의 중요 정책을 (1) 지지한다( ), (2) 반대한다( )” 중에서 하나를 고르게 되어 있었다, 헌법 개정에 대한 찬반 여부를 묻고 있지 않았다. 기가 막혔다. 그래도 결국 국민 91. 9%의 투표, 91. 5%의 찬성으로 유신헌법이 확정되고 제4공화국이 출범되었다.
군 생활 중인 1972년 김포 시골집에 전기가 들어오고, 1973년에 지붕이 기와로 바뀌었다. 1974년 5월 2일 정확히 34개월만에 병장으로 만기 제대하였다. 군대는 내게 온갖 부조리와 세월을 인내하는 법을 가르쳐 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