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러스
심창구 교수의 약창춘추
<349> 삶 속의 작은 깨달음4
편집부
입력 2022-06-08 22:04
수정
(5) 선생님이 잘 가르쳐야 한다.
양영학원에 다니며 눈만 뜨면 공부하는 생활을 3개월 정도 해서 12월이 되니, 이제 시험 범위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항을 다 알게 되었다. 특히 여태껏 나를 괴롭혔던 수학에 100% 자신이 생겼다. 그것은 전적으로 학원의 수학 선생님의 덕분이었다. 어찌나 간단 명쾌하게 잘 가르쳐 주시는지 듣고 보는 대로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그분은 소수(少數)의 전형적인 문제를 정선(精選)하여 풀고 그 문제 유형(類型)을 기억하도록 가르치셨다. 이 선생님을 통해 선생님의 역할이 정말 지대(至大)하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그 선생님을 통해서 왜 내가 고등학교 때 수학을 잘 못했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고등학교에서는 미처 소화(消化)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제를 풀게 한 것이 잘못이었다.
이때 수학의 요령을 깨달은 덕분에 대학에 들어가서 가정교사를 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학생이 왜 수학을 잘 못하는지 내 경험에 비추어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그 급소를 찔러 효과적으로 지도할 수 있었다. 그 학원에서는 수학 외에 국어나 화학도 잘 가르쳤다. 국어의 독해(讀解)는 유명한 소설가가 가르쳐 주셨고, 화학은 ‘완전화학’이라는 참고서를 쓴 김종대 육사 교수께서 가르치셨다. 김 교수님은 늘 ‘화학은 당량(當量)입니다’ 라고 강조해 주신 덕분에 화학의 원리(原理)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자 화학의 잡다한 지식이 간결하게 정리되었다. 특히 수학이나 과학은 원리를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공부 방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양영학원은 내 일생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6) 서울대 약대 수석 입학 - 자신감을 부어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축복
내가 졸업한 제물포고등학교(제고)는 매년 11월경 재학생은 물론 졸업한 재수생들에게도 모의고사를 치르게 하여, 그 성적을 보고 입시 지도를 해 주었다. 나도 1966년 11월, 제고 재학생들과 함께 모의고사를 보았다. 그 결과 총 350여 명 중에서 20여 등의 성적을 받았다. 이는 미처 못다 배운 ‘일반사회’ 과목 성적을 빼고 보면 전교에서 10위 안에 드는 뛰어난 성적이었다. 고3 때 담임이셨던 K 선생님으로부터 ‘그 정도면 서울대 아무 과(科)에 지원해도 다 합격하겠다’는 말씀을 들었다.
당시에는 그 정도로 좋은 성적이면 대개 서울대 공대를 지원하던 시절이었다. 공대 화공과가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었다. 공대에 관심이 없는 나는 서울대 약대 제약학과에 지원하였다. 그러나 약대에서 무얼 배우는지, 졸업하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고 지원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거의 모든 고등학교가 합격 가능성만을 척도 삼아 입시 지도를 하고 있었다. 제약학과를 선택한 것은 학과 이름이 그럴듯해 보여서였다.
서울대 약대에 응시하여 수학, 영어, 국어, 화학, 일반사회의 다섯 과목 시험을 보았다. 시험 후 집에 가서 신문에 난 모범답안과 맞추어 보았더니 수학은 주관식 10문제 중 기하 문제를 제외한 9문제를 풀었는데 다 맞았고, 화학과 일반사회는 모두 100점이었다. 국어와 영어는 좀 어려운 편이었다. 며칠 지나자 각종 신문에 내가 서울대 약대에 내가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시험을 잘 봐서 떨어지지 않을 줄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수석이라니!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수석으로 합격하자, 내가 9월 이전에 6개월간 다녔던 세종학원은 ‘축, 서울대 약대 수석합격, 심창구’라는 대형 플래카드를 학원 건물 옥상에서부터 지상에 이르기까지 위아래로 내걸었고, 4개월 정도 다닌 양영학원에서는 세종문화회관 별관에 SKY 대학 합격자들을 모아 놓고 축하식을 열어 주었다. 그 식에서 수석합격 기념 금반지도 받았다. 모두 추억 속에만 있는 장면이다. 당시 카메라가 없었던 때문이다.
이 수석 입학이라는 사건을 통해 거의 처음으로 나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제 와 돌아보니 내가 인천중학교나 연세대 의대에 떨어진 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길로 나를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개입(介入)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