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고(제고)는 다녀볼수록 훌륭한 학교였다. ‘양심(良心)은 민족의 소금, 학식(學識)은 사회의 등불’을 교훈으로 갖고 있는 학교였다. 모자에 달린 모표(帽標)도 소금 결정 3개 위에 등대가 서 있는 모습이었다. 도서관은 완전 개가식(開架式)으로 늘 열려 있었고, 시험은 무감독(無監督)하에서시행되었다.이런 명예로운 제도하에서 공부하는 것이 제고 학생들의 큰 자부심이었다. 제고에서 배운 양심이 평생 내 삶의 방부제가 되었다.
제고는 1학년이 300명이고 이과(理科)가 세 반으로 총 240명이었는데, 입학 후 첫 시험에서 나는 이과에서 110등 정도를 하였다. 기분이 좋았다. 130명 정도의 수재들을 제친 것이 아닌가! ‘한번 해 볼 만한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고에는 공부뿐이 아니라 글이나 그림 또는 음악 등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학생들이 많았다. 당시 교지인 ‘춘추(春秋)’에 실린 글을 읽어보면, 어떻게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이렇게 유식하고 멋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기가 죽을 지경이었다. 제고에 다니는 동안 나는 성적도 그저 그렇고 인천중학교 출신이 아니어서 친한 친구도 별로 없어 전반적으로 약간 주눅이 들어 지냈던 것 같다.
(4) 대학입시 낙방(落榜):다른 길이 열리기 시작하다
제고 졸업 시 전교 60등 정도를 했다. 그때 동기생 11명이 연세대 의대에 응시했는데 9명이 붙고 나를 포함한 2명이 떨어졌다. 내가 떨어진 것은 수학 때문이었다. 수학은 고등학교 때 내 등수를 떨어뜨린 주범이기도 했다.
나는 재수하기로 하고 서울의 세종로 네거리에 있는 세종학원에 등록하였다. 돈만 내면 누구나 다닐 수 있는 학원이었지만 강사 선생님들의 강의 수준은 괜찮았다. 특히 ‘정통고문 교실’이라는 참고서의 저자인 하희주 선생님의 문법 강의가 재미있었다. ‘이’모음역행동화, 히아투스 현상, 움라우트 현상 등이 재미있어 앞으로 국어를 전공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수준은 내 기대치보다 많이 낮았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명문학원으로 옮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침 그해 9월에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양영학원에서 4명 정도의 편입생을 뽑는다는 공고가 났다. 얼른 응시 원서를 내고, 시험 당일에 종로1가 낙원동에 있는 양영학원 건물에 가 보니 와! 수백 명의 응시자가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기가 질린 상태에서 2~3시간에 걸쳐 영어와 수학 시험을 치렀는데, 놀랍게도 결과는 합격이었다.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은 그 일을 지금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양영학원에 들어가 보니 소문대로 수업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1지망으로 서울대 의대에 지원했다가 성적이 약간 모자라 2지망인 서울대 치대로 밀려 합격한 사람도 여럿 있을 정도로 학생들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학 시험이 있었다. 수준이 높다는 학생들도 대부분 30~40점을 맞을 정도로 문제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L이라고 하는 경기여고를 나온 삼수생이 90점을 맞았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런 어려운 문제에서 90점을 맞는 사람도 있다니,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독한 마음을 먹고 온종일 오직 공부만 하였다. 인천에서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시간이 아까워, 학원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청계천 변의 사설 독서실에서 먹고 자면서 오직 학원에만 다녔다. 잠은 독서실의 의자 서너 개를 붙여 놓고 잤다. 그때 부실해진 허리가 지금껏 나를 괴롭히고 있지만, 원 없이 공부해 본 시절이었다.
밥은 근처의 허름한 음식점에서 사 먹었다. 한 끼에 30원 하는 잡채밥을 사 먹었는데 한 달치 식권을 한꺼번에 사면 한 끼에 25원으로 할인해 주었다. 그런 잡채밥도 하루에 두 끼밖에 못 먹고, 한 끼는 골목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호떡 2~3개를 사 먹었다. 지나보니 미련스러웠지만, 워낙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하시는 아버지께 ‘돈을 주십사’ 말씀드리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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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 삶 속의 작은 깨달음3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편집부
@yakup.com
입력 2022-05-25 20:17
수정 최종수정 2022-06-08 22:03
제물포고(제고)는 다녀볼수록 훌륭한 학교였다. ‘양심(良心)은 민족의 소금, 학식(學識)은 사회의 등불’을 교훈으로 갖고 있는 학교였다. 모자에 달린 모표(帽標)도 소금 결정 3개 위에 등대가 서 있는 모습이었다. 도서관은 완전 개가식(開架式)으로 늘 열려 있었고, 시험은 무감독(無監督)하에서시행되었다.이런 명예로운 제도하에서 공부하는 것이 제고 학생들의 큰 자부심이었다. 제고에서 배운 양심이 평생 내 삶의 방부제가 되었다.
제고는 1학년이 300명이고 이과(理科)가 세 반으로 총 240명이었는데, 입학 후 첫 시험에서 나는 이과에서 110등 정도를 하였다. 기분이 좋았다. 130명 정도의 수재들을 제친 것이 아닌가! ‘한번 해 볼 만한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고에는 공부뿐이 아니라 글이나 그림 또는 음악 등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학생들이 많았다. 당시 교지인 ‘춘추(春秋)’에 실린 글을 읽어보면, 어떻게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이렇게 유식하고 멋있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기가 죽을 지경이었다. 제고에 다니는 동안 나는 성적도 그저 그렇고 인천중학교 출신이 아니어서 친한 친구도 별로 없어 전반적으로 약간 주눅이 들어 지냈던 것 같다.
(4) 대학입시 낙방(落榜):다른 길이 열리기 시작하다
제고 졸업 시 전교 60등 정도를 했다. 그때 동기생 11명이 연세대 의대에 응시했는데 9명이 붙고 나를 포함한 2명이 떨어졌다. 내가 떨어진 것은 수학 때문이었다. 수학은 고등학교 때 내 등수를 떨어뜨린 주범이기도 했다.
나는 재수하기로 하고 서울의 세종로 네거리에 있는 세종학원에 등록하였다. 돈만 내면 누구나 다닐 수 있는 학원이었지만 강사 선생님들의 강의 수준은 괜찮았다. 특히 ‘정통고문 교실’이라는 참고서의 저자인 하희주 선생님의 문법 강의가 재미있었다. ‘이’모음역행동화, 히아투스 현상, 움라우트 현상 등이 재미있어 앞으로 국어를 전공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수준은 내 기대치보다 많이 낮았다. 그래서 기회가 되면 명문학원으로 옮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침 그해 9월에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양영학원에서 4명 정도의 편입생을 뽑는다는 공고가 났다. 얼른 응시 원서를 내고, 시험 당일에 종로1가 낙원동에 있는 양영학원 건물에 가 보니 와! 수백 명의 응시자가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기가 질린 상태에서 2~3시간에 걸쳐 영어와 수학 시험을 치렀는데, 놀랍게도 결과는 합격이었다.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은 그 일을 지금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양영학원에 들어가 보니 소문대로 수업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1지망으로 서울대 의대에 지원했다가 성적이 약간 모자라 2지망인 서울대 치대로 밀려 합격한 사람도 여럿 있을 정도로 학생들의 수준이 매우 높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학 시험이 있었다. 수준이 높다는 학생들도 대부분 30~40점을 맞을 정도로 문제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L이라고 하는 경기여고를 나온 삼수생이 90점을 맞았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런 어려운 문제에서 90점을 맞는 사람도 있다니,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독한 마음을 먹고 온종일 오직 공부만 하였다. 인천에서 기차를 타고 통학하는 시간이 아까워, 학원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청계천 변의 사설 독서실에서 먹고 자면서 오직 학원에만 다녔다. 잠은 독서실의 의자 서너 개를 붙여 놓고 잤다. 그때 부실해진 허리가 지금껏 나를 괴롭히고 있지만, 원 없이 공부해 본 시절이었다.
밥은 근처의 허름한 음식점에서 사 먹었다. 한 끼에 30원 하는 잡채밥을 사 먹었는데 한 달치 식권을 한꺼번에 사면 한 끼에 25원으로 할인해 주었다. 그런 잡채밥도 하루에 두 끼밖에 못 먹고, 한 끼는 골목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호떡 2~3개를 사 먹었다. 지나보니 미련스러웠지만, 워낙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하시는 아버지께 ‘돈을 주십사’ 말씀드리기 어렵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