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에 있는 인천중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길영희 선생님이 교장으로 계시는 이 학교는 인천은 물론 경기, 충청도의 인재들이 몰려드는 최고의 명문 공립 중학교였다. 그런 학교에 나와 동창 2명(L군, N군)이 겁도 없이 원서를 냈다. 내가 3명 중에 가장 성적이 좋았다. 입학시험날, 시험지를 받아보니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내 시험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이었다. 나는 우리 세 명이 다 떨어진 줄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셋 중 가장 성적이 안 좋은 L군만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고 보니 담임이셨던 K선생님이 자신의 조카인 L군의 성적을 ‘전교 1등’으로 조작해 무시험으로 합격하게 한 결과였다. 인중에는 국민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한 학생은 무시험으로 입학을 시켜주는 특이한 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인천중학교에 입학한 L군은 두 번 연거푸 낙제한 끝에 결국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만약 그때 담임선생님이 나를 전교 1등으로 만들어 내가 무시험으로 합격하였다면 내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모르기는 해도 결말이 L군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그때 나를 전교 1등으로 만들어 주지 않은 담임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감당치 못할 일류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3)꿈을 갖게 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인천중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한 나는 같은 인천에 있는 사립 D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학교는 간단한 면접만으로 신입생을 뽑았다. 그 무렵 아버지는 ‘인천여상고’에 다니는 누님과 나의 공부를 위해 인천시 금곡동에 허름한 기와집 한 채를 사주셨다. 나는 그 집에서 누님이 해주는 밥을 먹으며 학교에 다녔다. 그 집은 워낙 지대가 낮은 곳에 있는 낡은 집이라 부엌 바닥은 물론 연탄아궁이 속까지 물이 고여 연탄불이 꺼지는 날이 많았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거의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 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6년 이상을 살았다.
D중학교의 한 반은 정원이 80명을 넘는 콩나물시루였다. 나는 첫 시험에서 84명 중 50여 등을 하였다. 아무리 시골 학교 출신이긴 하지만 국민학교 때 반에서 3~4등을 하던 나에게 이 등수는 충격이었다.
당시 1살 위인 외사촌 형이 인천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가끔 십정동에 있는 외갓집에 가면 그로부터 인천중학교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들을수록 그 학교가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고등학교는 그 학교에 딸린 제물포고등학교(제고)로 진학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 꿈을 갖고 중학교 3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였더니 졸업 시에 우등상을 받게 되었다. 1학년 첫 시험에서 반에서 50여 등 하던 촌놈이 졸업 때에는 500여 명 중에서 5등 안에 들어 우등상을 받은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3학년 담임선생님께 “제고로 진학하고 싶습니다”고 했더니 “D중학교에 딸린 D고등학교로 진학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데 뭐하러 제고로 가려느냐?”며 입학원서를 써 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미 제고에 대해 흔들릴 수 없는 환상을 갖게 된 나는 아버지를 동원(?)하여 제고 입학원서를 써 받았다.
그런데 그해인 1963년부터 고등학교 입시에 두 가지 큰 변화가 생겼다. 우선 입시제도가 ‘학교별 입시’로부터, 모든 응시생이 같은 시험 문제를 푸는 ‘연합고사’로 바뀌었다. 기존의 학교별 입시는 아무래도 제고에 딸린 인천중학교 졸업생들에게 유리한 제도였다. 그다음으로 그 해부터 제고의 입학 정원이 240명에서 300명으로 늘어났다. 나는 이처럼 유리한 변화에 힘입어 꿈에도 그리던 제고에 합격하였다.
외사촌 형을 통해 제고의 꿈을 갖게 해 주시고, 나의 제고 합격을 위해 입시 제도와 입학 정원까지 늘려 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한다. 이로써 인생에서 꿈을 갖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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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7> 삶 속의 작은 깨달음2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편집부
@yakup.com
입력 2022-05-12 00:23
수정 최종수정 2022-05-12 11:04
(2)불합격에 낙심하지 마라, 축복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1960년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에 있는 인천중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길영희 선생님이 교장으로 계시는 이 학교는 인천은 물론 경기, 충청도의 인재들이 몰려드는 최고의 명문 공립 중학교였다. 그런 학교에 나와 동창 2명(L군, N군)이 겁도 없이 원서를 냈다. 내가 3명 중에 가장 성적이 좋았다. 입학시험날, 시험지를 받아보니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내 시험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이었다. 나는 우리 세 명이 다 떨어진 줄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셋 중 가장 성적이 안 좋은 L군만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고 보니 담임이셨던 K선생님이 자신의 조카인 L군의 성적을 ‘전교 1등’으로 조작해 무시험으로 합격하게 한 결과였다. 인중에는 국민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한 학생은 무시험으로 입학을 시켜주는 특이한 제도가 있었던 것이다.
인천중학교에 입학한 L군은 두 번 연거푸 낙제한 끝에 결국 퇴학을 당하고 말았다. 만약 그때 담임선생님이 나를 전교 1등으로 만들어 내가 무시험으로 합격하였다면 내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모르기는 해도 결말이 L군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그때 나를 전교 1등으로 만들어 주지 않은 담임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감당치 못할 일류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3)꿈을 갖게 해 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인천중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한 나는 같은 인천에 있는 사립 D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학교는 간단한 면접만으로 신입생을 뽑았다. 그 무렵 아버지는 ‘인천여상고’에 다니는 누님과 나의 공부를 위해 인천시 금곡동에 허름한 기와집 한 채를 사주셨다. 나는 그 집에서 누님이 해주는 밥을 먹으며 학교에 다녔다. 그 집은 워낙 지대가 낮은 곳에 있는 낡은 집이라 부엌 바닥은 물론 연탄아궁이 속까지 물이 고여 연탄불이 꺼지는 날이 많았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거의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 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6년 이상을 살았다.
D중학교의 한 반은 정원이 80명을 넘는 콩나물시루였다. 나는 첫 시험에서 84명 중 50여 등을 하였다. 아무리 시골 학교 출신이긴 하지만 국민학교 때 반에서 3~4등을 하던 나에게 이 등수는 충격이었다.
당시 1살 위인 외사촌 형이 인천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가끔 십정동에 있는 외갓집에 가면 그로부터 인천중학교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들을수록 그 학교가 너무나 멋있어 보였다. 그래서 고등학교는 그 학교에 딸린 제물포고등학교(제고)로 진학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그 꿈을 갖고 중학교 3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였더니 졸업 시에 우등상을 받게 되었다. 1학년 첫 시험에서 반에서 50여 등 하던 촌놈이 졸업 때에는 500여 명 중에서 5등 안에 들어 우등상을 받은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3학년 담임선생님께 “제고로 진학하고 싶습니다”고 했더니 “D중학교에 딸린 D고등학교로 진학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데 뭐하러 제고로 가려느냐?”며 입학원서를 써 주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미 제고에 대해 흔들릴 수 없는 환상을 갖게 된 나는 아버지를 동원(?)하여 제고 입학원서를 써 받았다.
그런데 그해인 1963년부터 고등학교 입시에 두 가지 큰 변화가 생겼다. 우선 입시제도가 ‘학교별 입시’로부터, 모든 응시생이 같은 시험 문제를 푸는 ‘연합고사’로 바뀌었다. 기존의 학교별 입시는 아무래도 제고에 딸린 인천중학교 졸업생들에게 유리한 제도였다. 그다음으로 그 해부터 제고의 입학 정원이 240명에서 300명으로 늘어났다. 나는 이처럼 유리한 변화에 힘입어 꿈에도 그리던 제고에 합격하였다.
외사촌 형을 통해 제고의 꿈을 갖게 해 주시고, 나의 제고 합격을 위해 입시 제도와 입학 정원까지 늘려 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한다. 이로써 인생에서 꿈을 갖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