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얼마 전 TV에서 고 김수환 추기경님을 모시던 신부님이 하는 말씀을 들었다. 그는 예수님이 원수(怨讐)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먼데 사는 원수가 아니라 가까운 데 사는 ‘웬수’를 사랑하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자 불현듯 10년도 더 된 옛날에 본 TV 오락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시골 동네 노인들이 부부 대항 퀴즈 풀이를 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예컨대 영감님이 “배고픈데 먹는 게 뭐지?” 하고 물으면 마나님이 “밥이지 뭐”라고 대답하면 되는 프로그램이었다. 퀴즈가 시작되자 영감님이 물었다. “당신과 나 사이의 인연을 뭐라고 하지?” 방송국에서 생각해 놓은 정답은 ‘천생연분(天生緣分)’이었다. 이 질문을 들은 마나님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웬수’라고 외치는 것이 아닌가! 당황한 영감님은 “아니 그게 아니고 네 글자!”라고 힌트를 주었다. 그러자 마나님은 다시 확신에 찬 목소리로 “평생 웬수!!”라고 외쳤다. 이 장면을 본 시청자들은 “정답이네 뭐”하면서 배를 움켜쥐고 박장대소하였다.
이 장면을 떠올리자 신부님 말씀에 공감이 갔다. 그분 말씀은, 가족이나 친구처럼 마땅히 사랑하며 지내야 할 사람들을 ‘웬수’처럼 여기며 살고 있다면, 원수에 앞서 우선 그 ‘웬수’부터 사랑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고 보니 ‘웬수’와 ‘원수’는 전혀 어감이 다른 말이었다.
퀴즈 프로그램에 출연한 마나님은 영감님을 진짜로 ‘평생 원수’로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같이 방송에 출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 두 분의 표정과 말투만 봐도 두 분이 소위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잘살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을 ‘웬수’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마나님 나름의 애교였을 것이다. 더구나 그 앞에 ‘평생’이라는 접두어를 붙이는 것을 보면 마나님은 영감님과 평생을 함께 살기로 작정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서로를 웬수를 넘어 원수라고 생각하며 사는 부부도 적지 않아 보인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을 때는 상대방의 모든 것이 좋아 보였는데,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기대와 신뢰가 깨지자 사랑이 증오로 바뀌면서 웬수가 되었다가, 심하면 원수로까지 상황이 악화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웬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신부님 말씀이 그렇게 잘 이해될 수가 없었다. 그래! 멀리 있는 원수는 차치(且置)하고 우선 내 옆에 있는 웬수들, 즉 우리 가족, 우리 이웃, 우리 친구들부터 더욱 사랑해야겠다. 부부간의 연분이 웬수나 원수가 되지 않도록, 아니 애초에 웬수로 보이기 시작하지 않도록 결혼 초에 있던 사랑의 불씨를 살려내야겠다. 사랑은 증오심을 예방 치료하여 연분을 지켜내는 유일한 백신이자 치료제임이 틀림없다.
노파심에서 말하건대,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의 원뜻은 당연히 웬수를 넘어 진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깨닫고 믿는 수밖에 없다. 그 깨달음, 그 믿음이 곧 사랑의 근원인 것이다. 문제는 믿음이 부족한 탓에 우리 마음에 사랑이 잘 샘솟지 않는다는 것이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자식은 저절로 사랑스럽고 손주는 더더욱 사랑스럽다. 이런 ‘내리사랑’은 하나님이 DNA로 심어 주신 특성이다. 그래서 자식 사랑은 사실 별로 자랑할 것이 못 된다. 반면에 배우자와 부모님 등 평생 웬수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지금의 내 행복이 걸려 있는 중차대(重且大)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수 사랑은 차차 하더라도, 어떻게 당장 웬수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잘은 모르지만, 상대에게 따듯한 말을 건네는 것이 어떨까 싶다. 사랑은 따듯한 말은 통해 전달된다. 또 따듯한 말 자체가 일말(一抹)의 사랑이기도 하다. 그래, 웬수에게 따듯한 말을 건네 보자. 그리하여 평생 웬수를 천생연분으로 되돌려 놓자. 우리 나이가, 이 시대가, 특히 이 계절이 따듯한 말 한마디를 갈구(渴求)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