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지난 3월 초순에 초등학교 4학년짜리 손자가 전화를 걸어왔다. 흔치 않은 일이라 웬 일인가 하고 받았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할아버지, 저 회장 됐어요” 하는 게 아닌가? “그래? 와 축하한다, 근데 어떻게 된 거야?” 했더니, 남녀 합쳐서 7명이 나왔는데 자기와 어떤 친구 하나가 표가 같이 나와서 둘이서 결선 투표를 거쳐 한 표 차이로 자기가 뽑혔다는 것이다.
이 전화를 받고 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기뻤다. 첫째는 그 아이가 회장(옛날 말로는 반장)에 뽑힌 것이 좋았다. 사실 나는 평생 반장 한번 못 해 봤다. 초등학교 때는 한 학년에 한 반 밖에 없는 시골의 미니 학교에 다녔는데, 1학년때 반장으로 뽑힌 친구가 6학년 때까지 계속해서 1등을 하는 바람에 나를 비롯한 다른 아이들은 반장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도 나는 여러모로 깜냥이 못되어서 반장을 꿈도 꿔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늘 학생 때 리더십 훈련을 받아보지 못한 것이 좀 아쉽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손자는 벌써 리더십을 기를 기회가 생겼으니 잘 된 일이 아닌가.
그러나 내가 더 기뻤던 것은 손자가 그 ‘기쁜 소식’을 즉시 할아버지에게 자랑한 점이었다. 손자는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도착하기 전에, 즉 집에 가는 도중에 나에게 자랑한 것이다. 그것도 흥분된 목소리로!! 나는 처음에는 얘가 집에 도착해서 엄마로부터 “할아버지께 자랑 전화 드려라” 라는 말을 듣고 전화를 건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제가 자랑을 하고 싶어 급히 스스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나는 우리 손자가 좋은 일이 생기면 즉시 전화를 걸어 자랑을 하고 싶은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며칠 후 손자와 식사를 할 기회가 생겼을 때, 손자에게 다음과 같은 칭찬을 하였다. 우선 회장이 된 것을 축하해서 100점을 준다. 둘째, 그에 더하여 할아버지한테 그 기쁨을 참지 못해 즉시 전화를 걸어 자랑을 한 사실에 보너스 100점을 준다. 앞으로도 자랑할 일이 생기면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는 마음껏 자랑해라. 그게 가족이다. 그랬더니 손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 날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갈 때 평소와 달리 일부러 먼 길을 돌아 갔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등 네 군데 모두에 자랑 전화를 하려면 가까운 길로 가서는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즉석에서 “추가 보너스 100점을 준다!”고 말해 주었다. 기뻐서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가식(假飾)없이 말하는 순수한 모습에 감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만약에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뭐 어쩌다가 운 좋게 뽑혔어요, 별 거 아니니 너무 요란 떠시지 마세요” 와 같은 말을 내게 했다면 나는 매우 실망했을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겸양(謙讓)은 어린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위선(僞善)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기쁠 때는 기뻐하고 슬플 때는 울어야 아이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 사건(?)에서 나를 기쁘게 만든 포인트를 요약하면 다음의 세가지이다. 첫째는 우리 아이가 내가 못 해 봤던 회장으로 뽑혔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손자가 급히, 흥분된 목소리로 자랑하고 싶은 대상에 내가 당당히 들어 있다는 사실이며, 셋째로는 손자가 두루 자랑 전화를 하기위해 일부러 먼 길로 집에 갔다고 말할 만큼 영혼이 맑음을 깨달았다는 사실이다.
에필로그: 한껏 행복해진 나는 “’똑똑’보다 ‘따뜻’이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보다 자기보다 따뜻한 사람을 좋아한단다. 그러니까 똑똑하다거나 잘 났다고 하는 자랑은 친구들에게는 좀 참아야 한다”라고 마무리 코멘트를 했다. 그랬더니 손자는 ‘프로메테우스로부터 프롤로그(prologue)라는 말이, 그리고 판도라의 남편인 에피메테우스로부터 에필로그(epilogue)라는 말이 나왔다’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답례로 들려주었다.
후생(後生)이 가외(可畏)라더니, 정말 요즘 아이들은 모르는 게 없구나, 조국의 앞날은 밝구나! 감탄하며 손자와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