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둘째 손녀 예원이(초5)는 내게 잔소리를 많이 한다. 소파(의자 포함)에 앉을 때 허리를 구부리고 앉으면 제 손을 내 등에 갖다 대고 ‘허리 펴!’라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또 코가 보이게 마스크를 쓰면 바로 ‘마스크!’하며 경고를 준다. 손녀의 잔소리는 들을 수록 기분이 좋다. 내가 몇 십 년째 듣는 잔소리와는 영 다른 게 신기하다.
예원이의 잔소리를 들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소파에서 앉을 때 허리를 구부리는 이유는 소파의 앉는 자리 폭이 깊어 허리가 등받이에 닿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다리가 짧아 특히 더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 중에 사정이 나와 비슷한 사람이 제법 적지 않을 것이다.
왜 소파의 걸터앉는 자리를 이렇게 넓게 만들었을까? 모르긴 해도 소파가 서양의 발명품이라 다리가 긴 서양 사람들이 앉기 편하게 만들다 보니 이런 규격이 된 것은 아닐까? 아마 대부분의 서양사람들은 소파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허리가 등받이에 닿을 것이다. 서양인 체격에 맞게 만들다 보니 공연히 내가 손녀의 잔소리를 듣게 된 형국이다.
소파 이야기를 하다 보니 육군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던 시절이 생각난다. 1971년 7월에 입대한 나는 남보다 체격(키)이 작아 남들은 안 해도 되는 생고생을 많이 하였다. 우선 지급받은 신발(군화 포함)이 발보다 너무 커서 구보(驅步)를 할 때마다 발이 앞뒤로 움직여 뒤꿈치가 벗겨지기 일수였다. 또 판초(poncho)라고 하는, 비 올 때 입는 우의(雨衣)는 또 얼마나 크고 길던지 한껏 치켜 올려 요대(腰帶, 허리 벨트)로 고정해야 겨우 땅에 끌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 판초도 아마 키 큰 미군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만든 것은 길이와 무게는 각각 110cm와 4.2kg인 M1소총이었다. 체격이 왜소한 내가 들고 뛰기에는 우선 너무 무거웠다. 제일 문제는 이 총으로 사격 훈련을 받는 일이었다. 사격의 요령은 가늠구멍의 정중앙과 총열 끝에 있는 가늠쇠를 표적과 일직선이 되도록 맞추어 놓고 격발하는 것이다. 일직선이 된 상태에서 격발해야 총탄이 표적에 적중하기 때문이다. 이 때 눈을 되도록 가늠구멍 가까이 갖다 대 가늠구멍이 넓게 보일 때 일직선으로 맞추는 것이 요령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아무리 목을 잡아 뽑아도 눈(얼굴)이 가늠구멍 가까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총이 너무 길어서 가늠구멍은 그야말로 내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당시 사격 훈련에 불합격된 훈련병들은 2인 1조를 이루어 한 사람이 “사격”하면 상대방은 “합격”이라고 외치며 서로 상대방의 따귀를 교대로 때리는 비인간적인(?) 벌을 받았다. 그래서 사격 훈련장은 늘 공포 분위기였다. 그 기합을 받지 않으려고 내가 목을 얼마나 잡아 뽑았겠는가!
M1소총은 미군의 체격에 맞게 고안된 총이다. 6.25 전쟁 때 그런 총을 지급받은 한국
군인들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을까? M1소총은 세월이 흐른 후 당연히 한국인 체격에 맞게 개발된 K1소총으로 대체되었다. 아마 그 때부터는 우리나라 군인들이 사격때마다 목을 잡아 빼는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다시 소파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는 특히 더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등을 구부리지 않고 앉을 수 있는 소파(의자 포함)를 만들기 위해서는, 걸터앉는 부위를 지금보다 훨씬 짧게 만들면 좋지 않을까? 아니면 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추듯 개개인의 신장 특성을 고려하여 소파를 맞춤 제작하면 어떨까? 소총의 경우 M1대신 K1을 개발하여 목을 잡아 빼지 않아도 되도록 만든 것처럼, 소파도 이제 K 맞춤 소파를 만들자는 이야기이다. 십중팔구 국민 허리 건강에 막대한 도움이 될 것이다.
‘21세기는 맞춤 약학 시대’라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그런데 이 ‘맞춤’이라는 시대 정신을 소파(의자)에도 적용하는 것이 마땅해 보인다. ‘K 맞춤 소파!’, 손녀의 애정 어린 잔소리 덕분에 획기적인(?) 아이디어 하나를 얻었다. 다만 이렇게 좋은 아이디어를 손녀의 허락없이 이렇게 공개해도 될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