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러스
심창구 교수의 약창춘추
<319> 장모님의 일생
편집부
입력 2021-03-18 10:38 수정 최종수정 2021-03-18 10:40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스크랩하기
작게보기 크게보기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우리 장모님께서 지난 2월 6일 98세로 소천하셨다. 늘 건강하셨는데 작년 설에 찾아 뵈었더니 모처럼 본인의 일생 이야기를 장편 소설처럼 말씀해 주셨다.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어 집에 돌아오자 마자 그 이야기를 컴퓨터에 입력해 놓았다. 그 이야기의 일부를 공유하고자 한다.    

장모님은 일제 하인 1924년에 충남 산골(사곡)에서 태어나셨다. 1943년, 19살 어머니는 공주 읍내의 고모 댁에 가서 살았는데, 어느 날부터 읍내 국민학교(?)에 동원(動員)되어 일본인(군인?)의 교육을 받게 되었다. 약 20명의 처녀들이 함께 동원되었다. 당시는 일제 말기라 인력 동원이 극심하였다. 한국 남자는 건강하면 군인으로 징병(徵兵)되었고, 덜 건강하면 노동자로 징용(徵用)되었으며, 처녀들은 근로보국대라는 이름으로 동원되었다. 

어느 날 일본인이 동원된 처녀들의 뒷머리를 한 웅큼씩 가위로 잘랐다. 여기저기서 아이고 하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잘린 처녀들은 조만간 정신대(挺身隊)로 끌려 나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신대로 끌려갔다가 도망 나온 어떤 여성이 소문을 냈다. 그 때 일본인 밑에서 일하는 한국인 조수 한 사람이 장모님에게 “재주껏 도망 가라, 걸리면 너도 죽고 나도 죽으니 알아서 하라” 귀뜸을 했다. 어머니는 그 길로 도망쳐 고향인 사곡으로 돌아왔지만 언제 끌려갈지 몰라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장모님의 아버지는 따님을 서둘러 시집보내려 들었다. 결혼한 사람은 정신대로 끌려 나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70리 떨어진 충남 유구라는 곳에 두 아들이 딸린 32살 먹은 한 아무개 (후에 나의 장인)라는 홀아비가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장티푸스로 상처(喪妻)해서 홀아비가 된 것이라 했다. 

장모님의 아버지는 몰래 유구에 가서 사윗감을 보았다. 홀아비는 마치 인력거 꾼처럼 키만 크고 말라 보였다. 장모님의 아버지는 아무리 아무나에게 시집을 보내 정신대를 피해야 할 상황이긴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싶지 않으셨다. 그래서 집(사곡)으로 돌아오다가 다른 동네에 사는 친구를 만나 신세 한탄을 하였다. 사정을 들은 친구는 집안 내에 젊고 잘 생긴 총각이 있다며 급히 사람을 보내 불러왔다. 청년을 본 장모님의 아버지는 너무 마음에 들어 하며 내일 당장 사주 단자를 보내라고 서둘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장모님은 그렇게 좋은 총각이 징병에 끌려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모부를 통해 알아보았더니 역시 그 총각은 한 달 후에 징병으로 끌려 나갈 사람이었다. 총각 집에서는 징병에 끌려 나가기 전에 씨라도 받아 놓겠다고 결혼을 서둘렀다. 당시는 징병에 끌려가면 거의 100퍼센트 전사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장모님의 아버지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그 청년과 혼인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 일로 장모님은 아버지한테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흐르도록 매를 맞았다. 실제로 그 총각은 징병에 끌려 나간 후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한편 장모님에 관한 소문을 들은 장인은 사곡까지 찾아가 장모님께 청혼을 하였다. 장인은 “실은 내가 36살이고 딸린 아들이 넷이나 되는데 괜찮겠냐”고 솔직하게 물으셨다. 장모님은 ‘기왕지사 나이는 먹은 것이고 아이는 둘이나 넷이나 그게 그것’이라며 청혼을 받아들였다.  
마음이 급한 장인의 아버지는 장모님을 모셔오려고 사곡까지 70리 길에 4인교 가마를 보냈다. 장모님이 타고 보니 4인교에는 유리 창문이 달렸으며 안에 이불도 있는 등 2인교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안락하였다. 4인교 이야기를 하실 때 처음으로 어머님의 표정에 미소가 보였다. 

두 분은 1945년 해방되던 해, 즉 장인이 36세, 어머니가 21세 때에 결혼하셨다. 그 후 두 분은 남매를 낳았고, 딸은 후에 내 아내가 되었다. 시련은 계속되어 전쟁 중에 장인은 장티푸스에 걸려 1952년에 43세로 작고하셨다. 결혼한지 7년, 어머니가 27세, 아들 딸이 각각 5살, 3살 때의 비극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고난의 일생을 사셨지만 우리 장모님은 늘 인자하고 온화하셨다. 할렐루야. 
전체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약업신문 타이틀 이미지
[]<319> 장모님의 일생
아이콘 개인정보 수집 · 이용에 관한 사항 (필수)
  - 개인정보 이용 목적 : 콘텐츠 발송
- 개인정보 수집 항목 : 받는분 이메일, 보내는 분 이름, 이메일 정보
- 개인정보 보유 및 이용 기간 : 이메일 발송 후 1일내 파기
받는 사람 이메일
* 받는 사람이 여러사람일 경우 Enter를 사용하시면 됩니다.
* (최대 5명까지 가능)
보낼 메세지
(선택사항)
보내는 사람 이름
보내는 사람 이메일
@
Copyright © Yakup.com All rights reserved.
약업신문 의 모든 컨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약업신문 타이틀 이미지
[]<319> 장모님의 일생
이 정보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
스크랩한 정보는 마이페이지에서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Copyright © Yakup.com All rights reserved.
약업신문 의 모든 컨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