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가을에 친구네 부부하고 교외의 조용한 곳에 놀러 갔었다. 그 곳 식당 앞 양지 녘에 점잖게 생긴 개 한 마리가 편하게 앉아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평소 개를 좋아하는 친구 부인은 아내와 함께 그 개에게 다가가 반가운 척을 했다.
그러나 그 개는 두 할머니가 보이지도 않는 듯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과자를 주면서 불러보고 얼러봐도 요지부동이었다. 아, 사람을 싫어하는 개 인가 하고 생각할 즈음에 예쁜 어린 아이 한 명이 개 앞에 나타났다.
그러자 그 점잖기만 하던 개가 벌떡 일어나 꼬리를 치며 어린이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그 아이는 어르지도, 과자를 주지도 않았는데 개가 먼저 아는 척을 한 것이다. 순간 두 할머니는 어이 없다는 듯 실소를 하며 “우이씨, 개도 이제는 우리가 늙었다고 쳐다보지도 않네, 그야말로 완전 ‘개 무시’ 당했네!” 하며 씩씩거렸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개도 눈이 있겠지. 내가 개라도 할머니보다는 어린이와 놀겠다. 할머니보다는 아이가 예쁘지. 예쁜 사람을 선호(選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개가 눈이 얼마나 정확한데…”.
2. 무릇 모든 생명체는 어릴 때가 예쁘고 늙으면 추해진다. 꽃도, 단풍도 그렇고 무엇보다 사람이 그렇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집 손자 손녀 4명도 한결 같이 예쁘다. 객관적으로 봐도 우리 애들이 제일 예쁜 것 같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나만 보면 ‘점쟁이 할아버지’라고 놀린다. 내 얼굴에 점이 많다고 하는 말이다. 내가 “할아버지도 너희들 만했을 땐 점도 없고 예뻤단다” 해도 잘 믿지 않는다. 어릴 때 사진도 거의 없으니 증거를 보여줄 수 없지만, 내가 어렸을 땐 예뻤다는 것은 사실이다.
어릴 때 예쁘고 늙어서 추해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그리고 자연의 법칙이란 곧 하나님의 섭리이다. 만약에 늙었을 때 예쁘고 갓났을 때가 추하다고 가정해 보자. 누가 힘들여 아기를 돌봐 인류가 번성할 수 있었겠는가? 늙으면 추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니 순종하는 수 밖에 없다.
그나저나 ‘점쟁이’라고 놀려도 좋으니 손주들이 나를 자주나 만나주면 좋겠는데, 그 놈의 학원인지 뭔지 때문에 애들이 너무 바빠 나를 만날 시간이 없단다. 내 마음 같아서는 애들을 저녁 늦게까지 학원에 보내는 부모를 처벌하는 아동학대법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시간이 있다고 손주들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할지는 잘 모르겠다. 할아버지에 대한 손주들의 애정이 세월과 함께 식어감이 느껴져 허무할 따름이다. 뭐 어쩌겠는가!
3. 요즘도 여전히 후배 교수들이 정년퇴임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정년퇴임이 옛날과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느낌이다. 옛날에는 노숙한 노교수님들만 정년 퇴임을 하셨다. 생약학의 이선주 교수님은 한참이나 인자한 할아버지의 풍모를 자랑하신 연후에 정년퇴임을 하셨다.
그런데 요즘은 새파란(?) 후배들이 정년퇴임을 하고 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아니 그 사람이 벌써 정년을?” 하며 놀란다. “요즘 애들은 나이만 먹었다”는 농담이 농담이 아니다. 돌아 보니 내가 아는 사람들은 이미 60을 다 훌쩍 넘었고 젊어 봤자 50 중반 이후의 중늙은이들이었다. 내 주변에 젊은이는 오래 전에 사라진 것이다. 아!!!
4. 예전에는 정년퇴임을 하신 교수님들은 어딜 가셔도 깍듯이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퇴임을 해 보니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디 가서 허리 한번 빳빳하게 펴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동창회에 가면 더 그랬다. 팔십 구십 잡순 선배님들이 무수히 건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로당에 육칠십 대의 젊은이(?)는 나오지 않는다 이야기가 있다. 그 나이에는 주전자를 들고 심부름이나 해야 되기 때문이란다. 이제 어디 가도 팔십은 넘어야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좋은 일이다. 그래도 가끔은 ‘나는 언제 왕초 노릇 한번 해 보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걸 노추(老醜)라고 하는 모양이다.
5. 코로나 사태 속에서도 또 한 해가 지나감에 감회가 새롭다. 아 세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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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개 무시
편집부
webmaster@yakup.com
입력 2021-01-06 10:00
수정 최종수정 2021-01-06 11:06
▲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1. 지난 가을에 친구네 부부하고 교외의 조용한 곳에 놀러 갔었다. 그 곳 식당 앞 양지 녘에 점잖게 생긴 개 한 마리가 편하게 앉아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평소 개를 좋아하는 친구 부인은 아내와 함께 그 개에게 다가가 반가운 척을 했다.
그러나 그 개는 두 할머니가 보이지도 않는 듯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과자를 주면서 불러보고 얼러봐도 요지부동이었다. 아, 사람을 싫어하는 개 인가 하고 생각할 즈음에 예쁜 어린 아이 한 명이 개 앞에 나타났다.
그러자 그 점잖기만 하던 개가 벌떡 일어나 꼬리를 치며 어린이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그 아이는 어르지도, 과자를 주지도 않았는데 개가 먼저 아는 척을 한 것이다. 순간 두 할머니는 어이 없다는 듯 실소를 하며 “우이씨, 개도 이제는 우리가 늙었다고 쳐다보지도 않네, 그야말로 완전 ‘개 무시’ 당했네!” 하며 씩씩거렸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개도 눈이 있겠지. 내가 개라도 할머니보다는 어린이와 놀겠다. 할머니보다는 아이가 예쁘지. 예쁜 사람을 선호(選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개가 눈이 얼마나 정확한데…”.
2. 무릇 모든 생명체는 어릴 때가 예쁘고 늙으면 추해진다. 꽃도, 단풍도 그렇고 무엇보다 사람이 그렇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우리 집 손자 손녀 4명도 한결 같이 예쁘다. 객관적으로 봐도 우리 애들이 제일 예쁜 것 같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나만 보면 ‘점쟁이 할아버지’라고 놀린다. 내 얼굴에 점이 많다고 하는 말이다. 내가 “할아버지도 너희들 만했을 땐 점도 없고 예뻤단다” 해도 잘 믿지 않는다. 어릴 때 사진도 거의 없으니 증거를 보여줄 수 없지만, 내가 어렸을 땐 예뻤다는 것은 사실이다.
어릴 때 예쁘고 늙어서 추해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그리고 자연의 법칙이란 곧 하나님의 섭리이다. 만약에 늙었을 때 예쁘고 갓났을 때가 추하다고 가정해 보자. 누가 힘들여 아기를 돌봐 인류가 번성할 수 있었겠는가? 늙으면 추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니 순종하는 수 밖에 없다.
그나저나 ‘점쟁이’라고 놀려도 좋으니 손주들이 나를 자주나 만나주면 좋겠는데, 그 놈의 학원인지 뭔지 때문에 애들이 너무 바빠 나를 만날 시간이 없단다. 내 마음 같아서는 애들을 저녁 늦게까지 학원에 보내는 부모를 처벌하는 아동학대법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시간이 있다고 손주들이 할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할지는 잘 모르겠다. 할아버지에 대한 손주들의 애정이 세월과 함께 식어감이 느껴져 허무할 따름이다. 뭐 어쩌겠는가!
3. 요즘도 여전히 후배 교수들이 정년퇴임을 하고 있다. 그런데 정년퇴임이 옛날과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느낌이다. 옛날에는 노숙한 노교수님들만 정년 퇴임을 하셨다. 생약학의 이선주 교수님은 한참이나 인자한 할아버지의 풍모를 자랑하신 연후에 정년퇴임을 하셨다.
그런데 요즘은 새파란(?) 후배들이 정년퇴임을 하고 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아니 그 사람이 벌써 정년을?” 하며 놀란다. “요즘 애들은 나이만 먹었다”는 농담이 농담이 아니다. 돌아 보니 내가 아는 사람들은 이미 60을 다 훌쩍 넘었고 젊어 봤자 50 중반 이후의 중늙은이들이었다. 내 주변에 젊은이는 오래 전에 사라진 것이다. 아!!!
4. 예전에는 정년퇴임을 하신 교수님들은 어딜 가셔도 깍듯이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퇴임을 해 보니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디 가서 허리 한번 빳빳하게 펴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동창회에 가면 더 그랬다. 팔십 구십 잡순 선배님들이 무수히 건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로당에 육칠십 대의 젊은이(?)는 나오지 않는다 이야기가 있다. 그 나이에는 주전자를 들고 심부름이나 해야 되기 때문이란다. 이제 어디 가도 팔십은 넘어야 어른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좋은 일이다. 그래도 가끔은 ‘나는 언제 왕초 노릇 한번 해 보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걸 노추(老醜)라고 하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