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시골에 사는 할아버지가 주말에 내려 오기로 한 서울 손주를 맞기 위해서 토요일 하루 종일 집안 구석 구석을 청소해 놓았다. 그 때 며느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애가 바빠서 내일 못 찾아 뵙겠다’는 내용이었다.
할아버지는 “알았다. 다음에 와라”하며 전화를 끊었지만 그날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얼마 전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그 할아버지가 써 보낸 사연이란다.
나이가 들수록 손주와 노는 것 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재미도 보람도 손주보기가 최고이다. 내가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손주는 노인네의 항우울제이고 우황청심환이다.
손주의 유일한 문제는 마약처럼 중독성, 의존성이 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손주를 안보면 금단현상이 나타난다. 사는 게 재미가 없어지고 우울해진다. 심하면 위에 소개한 할아버지처럼 울게 되기도 한다.
나는 요즘 젊은 부부를 만나면 “부모님께 대한 가장 확실한 효도는 손주를 자주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적어도 내 경우는 분명히 그렇다. 아들 며느리를 보는 것도 물론 좋지만 손주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문제는 아들 며느리가 손주들을 실컷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들을 잘 만날 수 없는 데에는 세 가지쯤 되는 이유가 있다.
1. 우선 아이들이 바쁘다. 학교 갔다 오면 학원에 가거나 집에서 과외 공부를 받아야 한다. 때로는 이게 아동학대가 아니고 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배우는 것이 정말 많다.
그래서 애들이 할아버지와 놀아 줄(?) 짬이 거의 없는 것이다. 제발 아이들이 방과 후 수업을 너무 많이 하지 않도록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으면 좋겠다.
2. 둘째로 행여 짬이 있더라도 손주들 입장에서 할아버지와 노는 것은 별 재미가 없을 것이다. 나도 국민학교 다닐 때 할아버지가 맨날 “너 오늘 학교에서 무얼 배웠니?”, “네 학교 교장 선생님 이름이 뭐랬지?” 같은 질문을 하시는 것이 지루하고 귀찮았다.
또 옛날에 어머니가 교수가 된 나만 보면 “밥은 먹었냐?”고 물으셔서, 하루는 “그럼 굶고 다닐까 봐요?” 하고 짜증을 냈던 기억이 있다.
아들에게 “오늘 강의는 잘 했느냐?”고 물으실 실력이 없는 어머니가 ‘밥 먹었냐?’ 말고 뭘 더 물으실 수 있었겠는가? 말 한마다 걸어 보려고 하셨던 어머니에게 불효막심했던 내 짜증이 두고 두고 후회스럽다.
3. 세 번째로 아들 며느리는 내가 손주들을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아들 며느리의 탓이 아니다. 그 나이에는 거의 누구나 부모님이 손주를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정확히 깨닫지 못한다.
그런 아들 며느리도 나이가 더 먹어 손주를 보게 되면, 틀림없이 내 마음을 잘 알게 될 것이다. 나도 젊었을 때는 잘 몰랐다. 그래서 아버지 어머니께 손주들을 잘 보여드리지 못 했다.
우리 내외는 비교적 자주 부모님을 찾아 뵈었지만, 이제 와 보니 부모님은 우리보다 손주가 더 보고 싶으셨을 것이다. 이를 잘 잘 헤아리지 못한 불효가 이제 와 몹시 송구스럽다.
고 홍문화 교수님은 아놀드 토인비 박사의 주장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신 바 있다. “동물들은 태어나서 바로 본능에 따라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사람의 본능은 보잘것없어서 그냥 내버려 주면 이 세상에 살아 남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에겐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에는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 교육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가정교육이고, 가정 교육의 핵심은 조부모의 무르팍 교육이다”.
나는 우리 손주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자기들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성장했다는 자존감을 느끼게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줄 아는 아이들은 이 세상의 웬만한 시험을 능히 이겨낼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일곱 살짜리 손녀에게 음식을 주며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아이는 “먹을 만 한데요” 라며, 할아버지 무르팍에서 큰 손녀다운 대답을 하였다. 하하하, 이러니 어찌 내가 손주들을 예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미라 살짝 슬픕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