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일본 사람들은 동경(東京)을 영어로 쓸 때 Tokyo라고 쓴다. 우리 생각에는 Dokyo가 좀 더 사실에 가까운 표기 같아 보이는데 일본인 생각은 다른 것이다. 오래 전 동경대학에 유학 할 때 비슷한 의문이 생겨서 클라스메이트에게 이 발음을 확인해 본 적이 있었다.
즉 한번은 “토-쿄”라고 하고 한번은 “또-꾜”라고 말하며 어떻게 들리냐고 물었더니 두 발음이 똑 같이 들린다는 것이었다.
몇 번씩 테스트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격음(激音, 크, 프, 트 등과 같은 거센 소리)과 경음(硬音, 끄, 뜨, 쁘 등과 같은 된소리)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인들에게는 토-쿄나 또-꾜나 그게 다 그거인 것이다. 그러나 둘을 명백하게 다르게 듣는 우리에겐 토-쿄가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다.
우리도 못 듣는 음이 많다. 일본어에는 탁음(濁音, 다꾸옹)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잘 듣지 못한다. 한번은 일본에서 동영(東映)라는 상점을 찾아가려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에이가 어딘가요?’ 물었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잘 모르겠단다.
이번에는 그 때 거기서 유치원 다니던 큰애가 물었다. 그러자 그 일본 사람은 금방 ‘아, 도”에이? 조기 보이는 곳이네요‘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귀에는 ‘도’나 ‘도”’나 그게 그거였지만 일본인 귀에는 둘은 전혀 다른 발음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영어의 th나 v, z 발음 등을 잘 못하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몇 번씩 들어 봐도 귀로도 입으로도 구분이 안 된다. 예전에 C 교수가 런던에 가서 zoo 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왜 유대인(Jew)을 찾느냐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대충 비슷하게 발음했으면 알아서 들어야지 그렇게 못 알아 듣냐고 할 수 도 있겠지만, 나도 미국인이 틀린 한국어 발음으로 내게 뭘 묻는데 도저히 못 알아들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못 알아듣는 걸 서로 비웃거나 나무랄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회 성가대에서 찬양을 하던 어떤 장로님이 청력을 잃고 가장 괴로운 것은 찬양을 부를 수 없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음의 높낮이가 잘 안 들리니 자연히 음치 비슷하게 되더라는 것이었다. 말도 노래도 잘 들려야 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청각장애인이 언어 장애인인 경우가 많은 것도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최근에 그 장로님으로부터 들었는데 갑자기 들리지 않는 상황이 오면 긴급 상황으로 생각하고 빨리 이비인후과에 가야 한단다. 빨리 가서 조치를 받으면 청력의 상당 부분을 되돌릴 수 있지만 저절로 회복되겠지 하고 시간을 끌면 치명적으로 청력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들리니까 이런 정보도 금방 입수할 수 있었다.
새삼 귀와 입은 긴밀하게 협력하는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둘은 동업자라고 할까? 함께 합력하여 선(善)을 이루는 관계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귀와 입이 얼굴이라는 한 동네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도 알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가깝기로 치면 입과 코처럼 가까운 사이도 없을 것이다. 최근 아내 친구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냄새를 잘 못 맡게 된 이후로 영 커피 맛을 모르게 되었고 한다. 그래서 입에서의 맛도 코에서 향을 잘 맡아주어야 더 잘 느낄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럼 눈은 또 왜 얼굴에 있을까? 아마도 그 답은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라는 속담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요즘 국론이 갈라져 서로 내 주장만 옳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도 분명 많건만, 그런 사람들은 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라며 자신들만 애국자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참된 리더십은 공감(compassion)에서 나온다고 한다. 공감은 아픔(passion)을 함께(com)하는 것이란다. 공감의 말을 하려면 우선 듣고 보고 맡아봐야 한다. 그래서 말이 험한 사람을 보면 눈, 코, 귀에 이상이 있나 의심이 든다.
한 동네에 모여 사는 이목구비(耳目口鼻)여! 서로 합력하여 선(善)을 이룰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