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길을 가다가 실수로 깊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 미국 사람들은 “Help me!”, 일본 사람들은 “다스께떼!”, 중국 사람들은 “救命!”이라고 외칠 것이다. 그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알다시피 우리는 “사람 살려!” 라고 외친다. 미국 사람들은 ‘나’를 강조하고, 일본과 중국 사람은 누구를 살려달라는지 불투명한 채로 살려달라고 외치는데 반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라고 외치는 것이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만 ‘내’가 아닌 ‘사람’을 살리라고 외칠까? 나는 이게 오랫동안 궁금하였다.
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구덩이에 빠진 것이 ‘나’라는 개인이라기 보다 우리 모두가 소속되어 있는 ‘사람(인간)’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일원(一員)이 빠진 것이니 심각하게 생각해서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호소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비록 하찮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나를 봐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집단의 존귀성을 생각해서 나를 살리라는 설득 같다는 말이다. ‘나’의 문제를 ‘인간’이라는 집단의 문제로 확대함으로써 궁지를 벗어나려는 전략(?)이 엿보인다.
이 대목에서 문뜩 맹꽁이가 생각난다. 맹꽁이는 건드릴수록 배를 크게 부풀리는데, 이는 십중팔구 ‘내 덩치가 이처럼 크니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고 상대방에게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동물은 몰라도 사람은 그 모습을 우스꽝스러워 할 뿐 더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사실 ‘나 살려’라고 안하고 사람 살리라고 과장해서 외친다고 해서 지나가던 사람이 더 긴박하게 구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사람 살려’로 부터 맹꽁이의 배 부풀리기와 유사한 허장성세(虛張聲勢)가 느껴진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람’이라는 표현을 어떻게 쓰고 있나를 관찰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현상들이 더 발견된다. 예컨대 시장에서 두 사람이 삿대질을 하며 싸움 (실은 말다툼)을 하고 있는 상황을 떠 올려보자. 말다툼이 조금 더 격해지면 십중팔구 서로 밀치거나 멱살을 잡으려는 듯한 동작으로 발전한다.
그러면 그 중 한 사람이 “어어! 이러다 사람 치겠네!” 하고 소리친다. 이때도 ‘나’를 강조하지 않고 ‘사람’을 강조하는 것이다. 나는 그냥 ‘나’가 아니라 ‘사람’의 하나인데, 네가 사람이면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칠 수 있느냐’는 고상한 논리를 펴는 것이다.
여담(餘談)이지만 전통적인 우리네 싸움은 육탄전이 아니다. 서로 구경꾼들에게 상대방이 얼마나 나쁜 사람인가를 설명함으로써 여론이 나에게 유리하도록 홍보하는 여론전(與論戰)인 것이 시장 싸움의 특징이다.
그래서 시장에서의 싸움은 늘 시끄럽다. 홍보전이기 때문에 목소리 큰 사람이 유리하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허위 과대 비방도 나온다. “이놈이 제 아버지한테도 막 덤비는 놈이예요”라는 식이다. 상대방이 ‘사람’같지도 않은 막 돼먹은 X이라고 결정타를 먹여 여론을 내 편으로 돌리려는 의도이다.
다시 여담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싸움은 대개 말싸움이기 때문에 시끄럽지만, 미국이나 일본 사람들의 싸움은 전혀 다르다. 그들은 입으로 싸우지 않고 살인 무기인 총이나 칼로 싸우기 때문에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는 말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총이나 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 훨씬 실리적이다.
그래서일까? 영어와 일본어에는 우리말에서와 같은 ‘얼큰한’ 욕들이 없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보고 “싸우되 절대로 욕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다들 속이 터져서 1-2분 안에 차라리 싸움을 그만두고 말 것이다.
고 홍문화 교수님은 아놀드 토인비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동물들은 본능만으로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식욕, 성욕 등 극히 초보적인 본능 밖에 갖지 못하고 태어나기 때문에 태어난 그대로는 이 세상에 살아 남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가정, 학교, 사회에서의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다면 ‘사람 살려’는 우리에게 ‘나’라는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제대로 교육받은 ‘사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