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나는 요즘 고 홍문화(洪文和) 교수님 추모 책자 발간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대 약대의 ‘한국약학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이다.
홍교수님은 1916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1934년 19세의 나이에 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약전)에 입학하셨다. 1937년 경성약전을 수석으로 졸업하신 후 3년간 주안에 있던 제염시험소 소장으로 근무하신 것을 제외하면 평생의 대부분을 서울대학교 약학대학 교수로 지내셨다.
홍교수님은 “나의 가장 짧은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인생을 설명하신 적이 있다. “(전략) 살다 보니 육십오년 어느덧 지났다네. (중략) 삼십에 철들어 시험관과 책 들고 분필로 썼다 지웠다 삼십년을 지나면서 박사, 교수, 소장, 학장, 원장, 회장 지냈노라 하였으나 그 흔한 노벨상도 못 타고 남이 한 말 받아 판 것 말고 무엇이 남았는가. 일차대전 총소리에 태어나 삼일독립만세, 중일전쟁, 이차대전, 팔일오, 육이오, 사일구, 오일륙, 십이륙, 숱하게 겪었건만 이십에 알았다던 인생이 갈수록 모르게 되어가니. 하나님이시여! 인류에게 평안을 내리소서 빌 수 밖에 없구나. 내일 모르는 세상에 백세를 사는 지혜랍시고 아는 소리 모르는 소리 지껄이다 보면 하루가 지나가고. 이래도 좋은가 나의 인생.” 이 글은 홍교수님이, 그리고 우리나라가 얼마나 어려운 시대를 통과해 오늘에 이르렀는지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홍교수님은 서울대 약대 교수로 재직 중 2년반 동안 국립보건연구원장 직을 지내신 후 서울대 생약연구소 교수로 임명 받아 10년간 재직하셨는데, 그때 가장 많은 공부를 했다고 회고하셨다. 그 기간에 ‘한방 처방의 통계학적 연구’ 등 한약의 과학화에 기여하는 많은 논문들을 발표하셨는데, 이 논문들의 특징은 대부분 공저(共著)가 아니고 단독 저술이라는 점이다. 이는 문헌 복사나 데이터 처리 같은 연구의 전 과정을 본인 스스로 하셨다는 의미이다. 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홍교수님은 6.25 전쟁 중에 졸업하는 약대 학생들에게 ‘소금에 붙이는 독백’이라는 유명한 축하 시를 주셨다. 졸업생들에게 ‘소금처럼 세상의 방부제(防腐劑)가 되고 나아가 세상을 살 맛나게 만드는 조미제(調味劑)가 되거라’고 격려하신 것이다.
홍교수님은 약사 사회에 대해서도 ‘약사 십계 (藥師十戒)’ 같은 글의 연재 (약업신문)를 통하여 과학정신에 기반한 좋은 약사가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일깨워주셨다.
일반 국민들에게는 건강 전도사를 자처하며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생활화를 통하여 합리적인 사고와 생활을 해야 한다고 계몽하셨다. 수많은 건강 관련 저서를 남기셨고 수많은 강연을 하셨다. 1994년의 경우 총 500회의 강연을 하셨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이 같은 열정은 엉터리 건강법이 범람했던 시대에 약학자로서 방관할 수 없는 사명감의 발로였을 것이다.
홍교수님은 미술, 조각, 서예, 음악, 문학, 철학 등 약학 이외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남이 따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이르셨다. 홍교수님의 업적을 살피다 보면, 시대가 낳은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연상된다. 그러나 홍교수님이 남기신 두 개의 수첩을 보면 전혀 다른 감동을 받게 된다.
수첩 하나는 약대 학장이실 때 3년간 본부 학장회의에 참석하여 기록한 메모장이다. 거기에는 거의 매주 열린 회의에서 총장님이 지시한 사항은 물론, 참석 대상자 중 불참자의 이름과 사유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또 다른 수첩은 외국 여행을 가실 때마다 영어로 기록한 메모장인데 거기에는 비행기 출발 및 도착 시간, 비행기 좌석 번호, 숙박한 호텔의 이름 및 방 번호 등 사소한(?) 사항들이 그야말로 깨알같이 적혀 있다. 이를 보면 홍교수님의 그 많은 성취가 결코 재능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대하(大河) 홍문화 교수님은 2007년에 향년 91세로 영면하셨다. 우리가 홍 교수님을 약학계의 영원한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삼십에 인생을 다알 것 같았는데 예순이 지나면서도 부족하고 모르는 것이 더 많으니 하루 하루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