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우리 아버지의 첫 번째 인생 철학은 내가 보기에는 ‘근검절약(勤儉節約)’이었다. 넉넉하지 못한 농촌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버지는 근면하게 일하고 검소하게 절약하며 사는 것만이 잘 사는 비결이라고 믿으셨던 것 같다.
40대까지 군청에 다니셨던 아버지는, 당시 대부분의 시골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새벽같이 일어나 농사 및 집안 일을 돌 본 후 출근하셨고, 퇴근 후에도 저녁 늦게까지 같은 일을 돌보셨다.
우리 집에서는, 제법 잘 살게 된 이후에도, 상당 기간 하루 한끼는 김치죽을 쑤어 먹었는데, 이는 묵은 김치를 활용하여 밥의 양을 늘리는 아이디어였다. 나는 괜찮았지만 할아버지는 김치죽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소천(所天)하시기 한참 전 어느 날 “내가 나이 먹어보니 김치죽을 먹어서는 영 기운이 나질 않는구나. 그걸 모르고 전에 할아버지께 계속해서 김치 죽을 드린 것이 죄송하구나”하는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는 “아무개 집안은 가방을 하나 사서 삼대(三代)가 썼다더라”는 식의 교훈을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한번은 내가 중학생 때에 학생모자를 새로 사주십사 말씀 드렸더니 “머리에 가만히 얹어 놓고 다니는 모자가 어째가 헤지느냐?”고 질책하셨다.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었다. 당시 학생 모자는 검은색 천으로 만들고 검은 색 비닐 챙을 달은 조잡한 물건이었지만 머리 위에 얌전히 얹고만 다녔다면 그렇게 빨리 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시로 의자 대신 깔고 앉고, 챙을 잡고 던지고 장난치는 바람에 모자가 빨리 망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유구무언 (有口無言)! 새 모자 사기 실패! 범사가 이런 식이었다.
아버지는 본인부터 철저한 본을 보이시는 분이셨다. 예컨대 아버지는 평생 돈 내는 이발소에는 다니지 않으셨다. 시골 앞 동네에 이발사 한 분이 있었는데 우리 가족이 일년 내내 필요할 때 이발을 하고 가을에 곡식 일정량을 주도록 계약이 되어 있었다.
순회 공연처럼 이 이발사가 우리 동네에 오면 동네 사람들이 차례로 와서 머리를 깎곤 했었다. 마침 머리가 길었는데 이발사가 안 오는 때에는 오리 (五里)도 더 되는 산골까지 이발사 집을 찾아가 이발을 하고 와야만 했다. 나는 이발사 집을 찾아가서 이발하는 것이 특히 싫었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다.
나는 대학생 때 담배를 피웠지만 특히 아버지가 모르시도록 조심하였다. 이는 ‘담배를 피우는 것이 건방져 보일까 봐’가 아니라, ‘버는 것도 별로 없는 학생이 담배를 사서 피우는 낭비를 한다고 야단 맞을까 봐’ 때문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제약회사에 취직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서울에 오신 일이 있었다. 모처럼 두 분께 점심 식사를 대접하려고 대중 음식점에 모시고 들어 갔는데, 벽에 붙어 있는 가격표를 보신 아버지가 이내 “무슨 점심이 저리 비싸냐? 다른 집에 가면 훨씬 싼데… ” 하며 앞장 서 나가시는 것이었다. 이런 절약 정신 때문에 아버지가 칠십이 되시기 전까지맛 있는 음식도 제대로 사드릴 수 없었다.
부모님이 계신 시골집에 가는 것은 늘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경인선을 타고 부평에서 내려 시외 버스를 타고 장기리라는 곳에 내린 다음 오~십리 시골길을 한 40분 이상 터벅터벅 걸어야만 갈 수 있었다.
결혼 후 한 번은 아내와 서너 살짜리 두 아들과 함께 장기리에서 택시를 탔다. 어린 애들이 걷기에는 날씨가 너무 더웠고, 부모님께 드리려고 산 수박이 손이 끊어지게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택시가 시골집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이었다. 행여 아버지가 보시면 ‘젊은 놈이 벌써부터 택시나 타고 다니며 돈 낭비를 한다’고 걱정을 하실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골 집에서 택시가 보이기 시작할 것 같은 지점에서 택시에서 내려 집에까지 걸어 간 적이 있었다. 우리가 택시를 탄 것은 그 때 한번뿐이었다.
아버지는 이처럼 근검절약의 본을 보이셨지만 결코 남에게 인색하지는 않으셨다. 2년 전 98세로 소천하신 아버지가 요즘의 내 생활을 보신다면 얼마나 지적하실 게 많을까 때때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