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사람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참 효자이시네”, “늘 챙겨줘서 고마워요”, “당신이 제일이야”, “은혜 잊지 않고 삽니다”, “존경합니다”, “대단하십니다” 또는 “믿음이 참 좋으시네요” 같은 소리를 들으면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다.
누구나 ‘듣기 좋은 말’을 듣기 좋아한다. 또 좋은 사람이라는 인정(認定)을 받고 싶어 한다. 때로는 아부의 말이 분명한 데도 들으면 기분이 살짝 좋아진다. 나이가 들수록, 남에게 인정받을 만한 것이 없어질수록 더욱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생전의 우리 아버지는 건성으로 인사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해하셨다. 저만치서 고개만 까닥 하고 마는 인사를 제일 싫어하셨다. 아버지는 두 손을 붙잡고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공손하게 여쭈며 확실하게 인사하는 사람을 좋아하셨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수록 체력이나 정신 활동이 저하되는 것을 본인 스스로 깨닫는다. 자존감(自尊感)이 낮아지고 누가 뭐래지 않아도 자격지심(自激之心)이 들어 주눅이 들 때가 많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대접하지 않고 무시한다고 삐치고 섭섭해 한다. 섭섭증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이 증상이 반복되면 마음의 상처가 된다. 상처는 누가 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받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상처는 자가발전(自家發電)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상처의 자가발전을 원천 봉쇄하기 위한 지혜였을까? 옛 어른들은 고개만 까딱이는 목례(目禮)대신 큰 절 인사 받기를 예절이라는 이름 하에 제도화 해 놓았었다.
어머니는 말년에 병원에 입원하시길 좋아하셨다. 입원이나 해야 친척들이 찾아 오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문안 온 친척들의 염려, 위로의 말을 들으시면 당신의 삶에 대한 인정을 받는 것 같으셨을 것이다. 찾아 온 사람들이 용돈을 쥐어드리면 더욱 좋아하셨다. 반면에 꼭 올 만한 사람이 찾아오지 않으면 조바심을 내셨다. ‘아무개는 내가 베푼 것이 많으니까 꼭 찾아오겠지’ 하며 꼽고 계시기도 하였다.
나도 큰 병으로 입원해 보니, 친구들이 찾아 오는 것이 큰 위로가 되었다. 친구들을 보면 ‘아, 내가 크게 잘못 살진 않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특히 늙어서 앓아 누웠을 때 가족, 친지, 친구, 세상으로부터 잊혀 가는 과정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그래서일까? 요양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 가장 좋아하는 방은, 전망이 좋거나 조용한 방이 아니라, 현관이 잘 보이는 방이라고 한다. 혹시 나를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을 금방 발견할 수 있는 방이 가장 인기가 높다는 것이다.
왕년에 잘 나갔던 사람일수록 말년에 외로움, 섭섭증, 마음의 상처, 우울증 등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모든 부정적인 증상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령(聖靈)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오직 성령을 받아야만 남의 인정이나 이생의 자랑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으면 내가 남에게 인정을 덜 받아도 외로움, 섭섭증, 상처, 우울증으로 고생하지 않게 되고 성격이 온유해진다.
“오직 주의 이름만 이곳에 있습니다”라고 찬양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이를 보고 ‘겸손해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겸손해질 수 없다. 최소한 ‘겸손한 사람’ 이라는 평판이라도 듣고 싶어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이기 때문이다.
최근 어떤 목사님의 글을 읽었다. 그분은 신학 대학원 학생 때에 전액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다른 학생에게 양보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순간 그는 ‘돈을 포기하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고자 하는 자신의 비열한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참으로 겸손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아닌 남을 사랑하는 것이 겸손의 극치라고 한다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스스로 달리신 예수님 밖에 안 계시다 할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성령을 받아 나에 대한 인정의 욕구, 위장된 겸손의 가식을 벗어버리고 ‘진리가 나를 자유롭게 하였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