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하였다. 한참을 달려가던 그가 내게 “야, 이 차 느낌이 좀 특별하지 않냐?”고 물었다. 무식한 나는 ‘잘 모르겠는데’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차가 속도를 낼수록 착 가라 앉는 느낌이 들지 않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길래 다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몹시 실망한 표정으로 ‘이 차가 그 유명한 독일제 BMW라는 차인데 가격이 매우 비싸지만 승차감이 최고’라는 사실 등을 자랑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BMW라는 이름도 못 들어 보았으며 승용차의 승차감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촌 놈이었다. 그래서 그 차나 승차감에 대해서 감탄의 말을 하지 못 했던 것이다.
내가 BMW를 제대로 알아 보았다면, “야, 너 출세했구나, 이런 비싼 차를 타고 다니다니 얼마나 좋니, 정말 부럽다” 이렇게 반응했을 텐데…. 그 때 무식해서 친구를 부러워해 주지 못했던 일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2. 미국에 처음 간 1988년 뉴욕에 사는 친구 B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의 집은 전형적인 미국식 2층 단독주택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자기 집 소개를 마친 그는 우리 가족의 무덤덤한 반응에 다소 실망하는 것 같았다.
그는 우리들로부터 “와, 집이 정말 크고 좋다. 이 집 비싸지? 야 너 미국 와서 진짜 출세했구나”와 같은 반응을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으로 이민 간 1970년대의 우리나라의 집들은 정말 허름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이처럼 멋진 2층집을 장만한 것은 스스로도 너무나 대견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8년에는 이미 우리나라 집들도 제법 좋아져 있었고, 무엇보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집은 다 크고 멋있다는 선입감(?)을 갖고 있었기에 우리 가족은 그의 집에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자가용 차를 갖고 있느냐고도 물었다. 나는 “응, 우리도 차가 하나 있어”라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대답하는데 왠지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당시 미국으로 이민 가서 온갖 고생 끝에 성공한 동포들에게 있어서 조국 대한민국의 갑작스런 발전은 오직 반가워만 하기에는 무언가 다소 심사가 복잡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B가 자기 집을 보여 주었을 때 조금 더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못했던 것을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3. 1989년 약 1년간의 방문교수 생활을 마치고 미국에서 귀국할 때, 늘 고마웠던 국내의 대학동기 C에게 골프 클럽 한 세트를 사다 주었다. 당시 한국에서 미제 한 세트를 미국 가격으로 사기가 쉽지 않은 시기였다. 이를 고맙게 생각한 C는 어느 날 내게 ‘머리를 얹어 준다’며 골프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미국의 연습장에서 몇 번 연습을 해 본 이래 처음으로 내가 한국의 골프장에 나간 날이었다. 둘이서 호젓이 골프를 치는데, 어느 순간 C가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자기가 ‘이글’을 쳤다며 떠들기 시작하였다. 나는 골프를 치다 보면 규정타 보다 한두 개 적게 칠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걸 가지고 호들갑을 떠나 생각하였다. ‘이글’이라는 용어도 나는 그 때 처음 들었다.
훨씬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골퍼 들은 이글을 치면 ‘기념패’를 만들거나 기념식수를 하는 것이 관례일 정도로 “이글”을 치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 후 C는 친구들을 만나기만 하면, ‘이글을 쳤는데도 내가 알아 주지 않더라’고 투덜대곤 하였다. 벌써 오래 전에 고인이 된 C를 생각할 때마다 그 때 마음껏 축하해 주고 널리 친구들에게 자랑을 해주지 못한 것이 마냥 아쉽기만 하다.
지나고 보니 뭘 몰라서 부러워하거나 감탄을 해주지 못해 상대방을 서운하게 만들었던 일들이 아쉬움으로 회상된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하였다. 한참을 달려가던 그가 내게 “야, 이 차 느낌이 좀 특별하지 않냐?”고 물었다. 무식한 나는 ‘잘 모르겠는데’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차가 속도를 낼수록 착 가라 앉는 느낌이 들지 않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길래 다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몹시 실망한 표정으로 ‘이 차가 그 유명한 독일제 BMW라는 차인데 가격이 매우 비싸지만 승차감이 최고’라는 사실 등을 자랑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BMW라는 이름도 못 들어 보았으며 승용차의 승차감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촌 놈이었다. 그래서 그 차나 승차감에 대해서 감탄의 말을 하지 못 했던 것이다.
내가 BMW를 제대로 알아 보았다면, “야, 너 출세했구나, 이런 비싼 차를 타고 다니다니 얼마나 좋니, 정말 부럽다” 이렇게 반응했을 텐데…. 그 때 무식해서 친구를 부러워해 주지 못했던 일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2. 미국에 처음 간 1988년 뉴욕에 사는 친구 B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의 집은 전형적인 미국식 2층 단독주택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자기 집 소개를 마친 그는 우리 가족의 무덤덤한 반응에 다소 실망하는 것 같았다.
그는 우리들로부터 “와, 집이 정말 크고 좋다. 이 집 비싸지? 야 너 미국 와서 진짜 출세했구나”와 같은 반응을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그가 미국으로 이민 간 1970년대의 우리나라의 집들은 정말 허름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이처럼 멋진 2층집을 장만한 것은 스스로도 너무나 대견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8년에는 이미 우리나라 집들도 제법 좋아져 있었고, 무엇보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집은 다 크고 멋있다는 선입감(?)을 갖고 있었기에 우리 가족은 그의 집에 놀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자가용 차를 갖고 있느냐고도 물었다. 나는 “응, 우리도 차가 하나 있어”라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대답하는데 왠지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당시 미국으로 이민 가서 온갖 고생 끝에 성공한 동포들에게 있어서 조국 대한민국의 갑작스런 발전은 오직 반가워만 하기에는 무언가 다소 심사가 복잡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B가 자기 집을 보여 주었을 때 조금 더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못했던 것을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한다.
3. 1989년 약 1년간의 방문교수 생활을 마치고 미국에서 귀국할 때, 늘 고마웠던 국내의 대학동기 C에게 골프 클럽 한 세트를 사다 주었다. 당시 한국에서 미제 한 세트를 미국 가격으로 사기가 쉽지 않은 시기였다. 이를 고맙게 생각한 C는 어느 날 내게 ‘머리를 얹어 준다’며 골프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미국의 연습장에서 몇 번 연습을 해 본 이래 처음으로 내가 한국의 골프장에 나간 날이었다. 둘이서 호젓이 골프를 치는데, 어느 순간 C가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자기가 ‘이글’을 쳤다며 떠들기 시작하였다. 나는 골프를 치다 보면 규정타 보다 한두 개 적게 칠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걸 가지고 호들갑을 떠나 생각하였다. ‘이글’이라는 용어도 나는 그 때 처음 들었다.
훨씬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골퍼 들은 이글을 치면 ‘기념패’를 만들거나 기념식수를 하는 것이 관례일 정도로 “이글”을 치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 후 C는 친구들을 만나기만 하면, ‘이글을 쳤는데도 내가 알아 주지 않더라’고 투덜대곤 하였다. 벌써 오래 전에 고인이 된 C를 생각할 때마다 그 때 마음껏 축하해 주고 널리 친구들에게 자랑을 해주지 못한 것이 마냥 아쉽기만 하다.
지나고 보니 뭘 몰라서 부러워하거나 감탄을 해주지 못해 상대방을 서운하게 만들었던 일들이 아쉬움으로 회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