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러스
심창구 교수의 약창춘추
<119> 진작 말하지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입력 2013-02-06 10: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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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967년 약대 1학년이었을 때 1,2학기에 걸쳐 문화사(文化史)라는 교양 과목을 수강해야 했다. 문화사 강의를 담당하신 유 아무개 교수님은 외부 강사이셨는데, 작지만 뚱뚱한 체구에 늘 올백으로 머리를 빗어 넘기셨다. 그 분은 강의 중에 ‘우리가 집권하면 이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식의 허풍을 떠시곤 해서 어떤 학생 하나가 ‘선생님 도대체 집권할 가능성은 있으십니까?’라고 물었던 적도 있다. 1학기 수업이 끝날 즈음 교수님은 ‘모든 학생들은 방학 중 리포트를 써서 개학 전에 제출하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는 출석부를 보고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시면서 “아무개 군은 인천 개항사(開港史)”, 아무개 군은 차이나타운의 역사, 아무개 군은 조선의 쇄국정책에 대해서…” 라는 식으로 학생마다 다른 주제를 과제로 주셨다. 어찌나 빨리 주제를 불러 주시는지 학생들이 받아 적기가 바쁠 정도이었다.
 

그리고 1학기말이 되어 시험을 보았는데 나는 나름 잘 본 것 같았다. 그래서 내심 A학점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2학기 개학을 해서 성적표를 받아보니 어럽쇼? 내 문화사 학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2학기 첫 수업 후 교단 앞으로 교수님을 찾아가 ‘왜 제 학점이 안 나왔습니까? 제 답안지를 한번 보여 주시죠’ 라고 여쭈었다. 그랬더니 교수님 왈, “학생에게 답안지나 보여 주고 그러는 사람이 교수인줄 아나?” 하시는 것이었다. 이상한 반격이었지만 감히 반박을 못하고 그냥 물러 나왔다.

그런데 누군가가 “야 그건 말이야, 술 한 병을 사 들고 교수님 댁을 찾아가서 부탁을 드려야 되는 거야”라고 귀뜸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청주[淸酒, 당시 말로 ‘정종 (正宗)’] 큰 것 한 병을 사 들고 원효로에 있는 교수님 댁을 방문하였다. 혼자 갈 용기는 없었는데 고맙게도 친구인 최응칠 군과 고 공영식 군이 동행해 주었다. 

유교수님 댁은 약간 초라하였다. 우리 셋은 교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술 한잔씩을 따라 올리며 학점 이야기를 꺼내었다. 교수님은 생뚱맞게 “여러분에게 나누어 준 방학 숙제 주제를 내가 기억할 것 같은가?” 물으셨다. 그리고는 ‘사실은 출석 부르며 즉흥적으로 주제를 주었기 때문에 교수님 자신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지엄하신(?) 교수님이 이런 허술한 이야기를 하시다니’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내 학점 이야기를 드렸다. 그러자 교수님은 이번에는 “자네 어느 고등학교 나왔나?”고 물으셨다. 내가 “제물포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라고 말씀 드렸더니, 교수님은 바로 “야, 그럼 진작 말하지, 나는 인천중학교 나왔잖아” 하시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제물포고등학교에 딸린 인천중학교를 졸업하신 분이었던 것이다. 교수님은 곧 이어 “야, 학점 걱정하지 마라, 2학기 학점도 걱정하지마” 하셨다.

교수님은 끝내 동문(同門)으로서의 의리(?)를 지키셨다. 실제로 나는 2학기 말에 1학기 문화사 학점을 A로 소급해서 받았을 뿐만 아니라, 2학기 학점까지도 A를 받았다. 나는 그 때 우리나라에서 동문(同門)이 얼마나 중요한 인자인가 하는 것을 알았다. 모르긴 해도 같은 고등학교 동문인 최군도 그 때 아마 A학점을 받았을 것이다. 

최근 이 이야기를 절친한 친구인 대웅제약 이종욱 사장에게 들려 주었더니 그는 한 수 더 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가 약대에 들어 와서 보니 S고등학교 때의 국어 선생님이셨던 P선생님이 대학국어 강의를 담당하고 계셨더란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 가 인사를 드렸더니 선생님도 반가워 하시면서 “야, S고등학교 출신 학생들 이름 다 적어와” 하셨단다. 그 후 S고등학교 출신 학생들 성적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이 사장의 간곡한 부탁도 있고 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이런 일들이 다반사(茶飯事)로 있었다. 그리고 얼마쯤은 이런 이야기가 미담(美談)으로 치부 (置簿)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다. ‘인류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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