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는 요양기관을 제외하고 제약사 450여개소, 수입상 840여개소, 도매상 660 여개소 등 1,900여개소의 의약품 관련 업소가 혼재해 있다. 이들 중 제약사의 90% 이상이 중소기업 수준이고 도매업체의 88%가 연매출 100억 미만의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또 의약품 소비시장인 요양기관 역시 97% 이상이 의원 약국 등 소규모 형태다.
이런 가운데 유통구조의 복잡성과 과다한 물류비 지출이 의약품 유통의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제약회사와 도매상이 보관 운송설비와 인력을 별도로 운영하고 있어 유통시설의 영세성 및 전근대성을 면하기 어려우며, 업무의 비효율성으로 유통비용이 과다하게 발생되고 있다.
현행 의약품 공급체계는 이러한 중복 투자를 불가피하게 하고 있다. 요양기관과 제약사 도매업체 간에 품목별로 개별계약을 체결하고 요양 기관의 주문에 따라 배송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공급체계는 다품목 소량 중복배송에 따른 차량 적재효율을 저하시키고 물류비용과 재고관리비용까지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전근대적인 우리나라 의약품 유통체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제약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도모하는 한편, 의약분업의 성공적 수행을 위한 기반구축의 일환으로 의료계와 제약업계가 모두 참여하여 상호 정보를 공유, 활용할 수 있는 국가적 정보망 운영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정부 일관된 의지로 중장기 마스터플랜 세워야
업계와의 의견 조율 통해 개혁 공감대 형성
의약품대금 직접지불제 대체대안 제시 시급
“헬프라인은 개개의 업체를 통제하는 곳이 아니라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는 전국적인 정보망이다.”
요양기관…프로그램 설치 자체를 반대
도매·제약…거래내역노출, 수수료부담
각분야 입장차이로 참여 전체 1% 그쳐
진행 상황
보건복지부에서 1998년 9월 19일 의약품유통개혁방안을 마련, 99년 10월 의약품유통개혁의 기본방안을 수립하면서 의약품 유통정보화 사업이 시작됐다. 1999년 12월 전담 사업자가 선정되고, 2000년 4월 한국의약품정보센터가 설립되면서 헬프라인 시스템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 후 2001년 5월에 헬프라인 구축을 완료했으며 그동안 시범서비스와 시스템 확산을 마치고 7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하고 있다.
그러나 의약품유통개혁이라는 중차대한 사명을 띠고 의욕적으로 출범한 의약품유통정보화사업은 현재 별다른 진전 없이 공전중이다. 시스템에 대한 모든 준비는 마쳤지만, 관련 업계가 다양한 이유로 또 각각의 입장차이로 인해 참여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최근 보건복지부장관의 입김으로 복지부 산하 국립병원을 중심으로 거래가 일어나고 있기는 하나 이 역시 전체 유통량의 1%선에 불과한 양이다.
관련 업계의 반응
현재 한국의약품정보센터에서는 다각적인 노력으로 실거래를 유도하고 있지만, 아직도 업계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그나마 사업 시행 초기에는 강하게 반발했었는데 시스템의 연기와 본격 가동을 거치면서 현재는 어떻게 진행되는지 관망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관망하고 있다고 해서 각 업계의 근본적인 입장이 바뀐 것은 아니다.
요양기관은 프로그램 설치 자체를 반대하고 있다. 지금 제도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돈과 시간을 들여 굳이 프로그램을 설치할 필요가 없다는 것. 하지만 이는 표면상의 이유일 뿐 실제로는 거래내역이 드러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또 약품대금을 공단에서 지불할 경우, 그동안 약품 대금 지급을 이유로 누려왔던 다양한 이점을 요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공급업체도 표면적인 저항은 덜 하지만 내심 현행대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요양기관과 마찬가지다. 제약사나 도매상들 역시 거래처인 사용자들이 어떤 약을 얼마만큼 얼마에 구매했는지가 유리알처럼 보이는 것을 꺼리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헬프라인 사용 수수료에 대한 부담도 적잖게 작용하고 있다.
또한 공급업체들에게는 회전기일 단축이라는 큰 이점이 되었던 의약품 대금 직불제도도 요양기관들과 의·약사들의 강한 반발로 인해 현재는 언제 시행될지조차 불투명한 상태다.
현재까지도 관련 업계는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정부와 평행선을 긋고 있다. 최근 많은 업체들이 헬프라인에 관심을 갖고 있기는 하나 이들 역시 다른 업체들의 사용결과를 본 뒤 참여하겠다고만 할 뿐, 선뜻 뛰어들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의약품 유통정보사업 정상화 방안
의약품 유통개혁의 원칙론에는 모두가 공감한다. 그렇다면 왜 시행이 되지 않는가? 그것은 원칙은 좋지만 `나'는 희생하기 싫다는 것이다. 원칙에는 모두가 동감하지만 직접적인 이해와 관련된 문제일 경우, 조금의 불편이나 번거로움도 감수할 수 없다는 것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의약품유통정보화사업의 조속한 정상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의약품 유통개혁에 대한 정부의 변함없는 의지다. 처음 이 사업을 왜 시작하게 됐는지로 거슬러 올라가 그 원칙론에 변함이 없다면, 정부가 좀더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여건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 의욕만 앞세우다보면 파행으로 치닫게 되고 만다. 사업계획단계에 이미 극복됐어야 할 관련 업계의 인식차이를 여전히 풀지 못한 과제로 놔둔 채 이 사업을 계속 끌고 갈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업계가 반대하는 이유를 듣고, 업계와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음성적인 의약품 거래 근절과 의료보험 재정 정상화를 위해서는 의약품 유통개혁이 시급하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등 공감대를 형성시켜야 한다.
100% 찬성하는 정책이란 있을 수 없다. 특히 그 정책이 누군가에게 변화에 따른 불편들을 감수시켜야 하는 `개혁'의 성격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가능한 다수의 의견을 수렴하여 다수가 찬성하는 방향으로 가되, 일단 방향이 결정되면 일관된 추진력을 보여주는 정부의 리더십이 필요한 것이다. 업계의 눈치만 보다가는 정부의 정책이 용두사미가 될 뿐이다.
또 정부에서 해야 할 시급한 일은 의약품대금 직접 지불제를 대체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만약 직불제가 시행되지 않으면 사용의 당위성과 강제성이 없어져 헬프라인도 여타의 전자상거래 시스템 중 하나가 돼 버리고, 그렇게 된다면 정부가 꿈꾸었던 유통개혁 역시 흐지부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약제비 직불제를 당장 시행하기 어렵다면 의약품 유통체계의 선진화를 위한 다각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업체의 참여를 유도할 수 있는 대안들을 짜냄과 동시에 유통개혁의 중장기 마스터플랜을 다시 마련해야 한다. 아무리 대의가 좋다고는 하나 실제 눈에 보이는 이점과 사용의 당위성이 마련되지 않는 한 단기간 내에 모두의 참여를 끌어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유통의 흐름에 따른 새로운 문제 발생의 측면에서도 생각할 수 있다. 급속히 변하는 유통의 흐름을 타고 의약계에도 여러 성격의 전자상거래 업체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고 있다. 의약품의 전자상거래가 활성화되지 않았을 때는 괜찮지만 의약품의 전자상거래가 활발히 일어난다고 했을 때 생각지 않은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즉 새로운 업체와 거래를 할 때마다 새로운 시스템을 사용해야 한다. 다른 시스템을 사용하는 여러 업체들과 거래를 할 경우, 여러 가지 시스템을 사용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럴 경우 주문의 번거로움은 물론, 재고관리나 거래처 관리 등의 각종 불편이 파생되게 된다. 만약 이런 불편이 싫다면 계속 수발신으로 주문을 하거나 아니면 고정된 업체에 한해서만 거래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러한 모든 점들을 감안해 정부에서 의약품유통정보시스템(헬프라인)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정부가 계획한 헬프라인은 개개의 업체들을 구속하고, 모두를 일괄된 틀로 묶어 정부가 통제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정부에서 모든 요양기관과 공급업체를 망라하는 전국적인 정보망을 제공할테니 그 안에서 자유롭게 거래를 하라는 얘기다.
이를 위해 각 업체들은 헬프라인을 설치해 사용하거나 기존에 있는 자체 시스템과 헬프라인간의 인터페이스를 하면 된다.
얼마 전 김원길 복지부장관이 한 신문의 기고에서 “지금처럼 자유롭게 거래하고 공급업체간의 경쟁을 통해 시장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의약품 유통구조를 과감히 개조하여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하는 주장이 많이 있었으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 좀더 넓은 고속도로를 건설하지 못한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적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는지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는 말로 의약품유통정보화사업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일리가 있는 얘기다.
의약품유통정보화사업도 이와 같다. 앞서 언급했듯이 각각의 업체는 정부가 구축한 전국적인 전자상거래망을 이용해 자사의 특성에 맞게 자유롭게 거래를 하는 것이고, 정부는 그 장을 마련해주는 것일 뿐이다.
이제 시각을 바꾸자. 의약품 유통개혁이라는 말 앞에,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문제의 근본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고민해 보아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업계의 자율적인 제도 수용력과 미래에 대한 안목이 요구되는 때이다. 정부는 업계를 포용하고 업계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 논리적인 비판과 대안을 제시한다면, 유통의 투명화가 이루어지고 모두가 윈-윈하는 2002년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