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사의 담보 요구에 등이 휠 지경입니다”
“약국에 공급은 하지만 반품 걱정이 앞섭니다. 약국은 무조건 공급하라고 독촉하지만 처방약 리스트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위로 구비하는 약국의 반품은 불 보듯 뻔한 일 아닙니까”
“제약사와 약국 사이에서 애꿎은 도매상만 죽어납니다. 도매업을 정리하고 딴 일을 찾고 싶을 정도니 이해되십니까”
도매상 경영자들의 한결 같은 목소리다. 이구동성으로 `못해먹겠다'라는 말이 거침없이 나오고 있다. 의약분업 영향으로 업계의 상황이 이처럼 극도로 피폐해 있다. 동업자 정신도 시들해 지고 있다.
도매상의 `빈익빈 부익부'를 부추기는 일부 제약사의 영업정책이 이들을 반목으로 몰아가고 있다.
여기에 ETC·OTC전문도매로 의약품 시장을 사이좋게 분할했던 과거 영업방식으로는 수익구조상 어려운 점이 많아지자 `업종 월경'을 하는 업체가 생겨나면서 더더욱 사이를 벌어지게 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논리보다는 업권 유지를 위해 동고동락한 이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을 야기 시킨 가장 큰 배경은 다름 아닌 의약분업.
의약분업의 성패는 환자의 불편도 처방전의 발행도 아닌 약국과 유통업체의 처방약 구비 실태다. 이런 측면에서 도매상의 처방약 구비는 한마디로 `돈으로 메꿔야'하는 힘겨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국내 최대의 OTC도매업체인 백제약품도 의약분업의 호된 물살을 피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높은 신용도를 앞세워 신용거래를 주로 해왔던 백제약품도 최근에는 제약사의 담보 요구에 시장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신용으로 거래하던 제약사의 20% 정도가 새로이 담보를 요구하고 있다는 백제약품 관계자의 말에서 제약사의 여신정책 변화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백제의 경우 충분한 담보력과 신용으로 분업파고를 넘고 있지만 `쥴릭'이라는 암초가 가로막고 있어 100% 공급은 어려운 상태에 있다.
병원직영 도매도 쥴릭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매출면으로 따졌을 때 국내 최대를 기록하고 있는 직영도매 역시 쥴릭과 거래가 없기 때문에 일부 의약품 구비가 어려운 상태다.
쥴릭이 취급하는 의약품은 전체 처방약에서 빙산의 일각. 올들어 각 제약사들은 여신관리를 강화, 최대한 리스크를 줄이는 방향에서 창고 문을 지키고 있다.
현재 도매업체의 처방약 구비를 가장 어렵게 하고 있는 문제는 담보와 거점도매정책.
제약사의 선별적인 정책이 처방약 미구비로 이어지면서 매를 맞고 있다.
도매업계의 처방약 구비는 비율로 따지기 어렵다. 이유는 거래 특성과 담보에 맞게 의약품을 구비해 왔기 때문이다.
병원도매는 전문의약품, 약국도매는 일반의약품을 위주로 구색을 갖추고 영업을 해왔다.
그러나 최근의 상황은 이들 도매상으로 하여금 전문·일반 구분없이 가급적 많은 의약품을 구비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도매유통업이 갑자기 소매상이 되는 듯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한쪽만 고집할 수 없는 시장 상황이라는 게 업계의 토로다.
시장 상황에 맞게 의약품을 구비하자니 걸리는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제약사의 담보 요구가 도매업계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불투명하고 불분명한 의약분업 시대에 제약사의 담보 요구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의약분업 자체도 `선시행 후보완'이 된 마당에 의약품도 `선공급 후담보' 또는 신용거래를 해야 한다는 볼멘 목소리도 귀담아 들어 봐야 한다.
정부의 의약분업 정책이 `삐그덕' 거린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도매상과 약국의 처방약 미구비 때문이라는 것이 현실로 증명되고 있기 때문에 이들 목소리가 더욱 설득력있게 들린다.
이에 따라 정부가 지급보증을 서는 방안도 제기되고 있다. 제약사가 설마 정부를 못 믿겠냐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정부 입장에서 보면 의약분업이 일종의 구조조정 역할을 할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빚을 끌어 와서라도 담보를 제공하고 공급을 받는 것인데, 과연 담보가 여유로운 업체가 몇이나 되겠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분업전 까지 ETC전문도매로 어느 정도 위치를 확보한 N약품의 담보현황을 살펴보자.
자본금 27억의 이 회사는 99년 매출이 470억원에 담보가 130억원이 설정되어 있다.
담보 내용을 보면 보증기금을 이용한 것이 23억원, 나머지는 집이며 땅, 회사건물 등을 담보로 제공하고 있다. 한마디로 `있는 거 없는 거' 다 주고 이를 날리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영업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회사는 최근에 시장 상황에 발맞춰 OTC도매를 시작, 제약사에 의약품 공급을 요청했지만 회사의 성장성은 뒷전에 놓고 오직 담보제공을 얼마나 할 수 있느냐가 거래의 전제조건이었다는 게 이 업체 대표의 서운한 목소리다.
결국 구조조정도 구조조정이지만 업권 전체가 흔들리고 의약품 유통구조가 자칫 대 혼란에 빠질 우려도 낳게 하고 있어 제약사의 전향적인 재검토가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다.
이는 다 살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그게 어렵더라도 충격은 최소화하고 가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외자 제약사를 중심으로 한 거점도매정책도 도매상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전국적으로 40여개 정도 도매상만 선정, 자사 제품을 공급하는 제약사의 정책은 자칫 도도매를 조장하는 역효과를 가져 올 수 있어 시장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제약사의 편의적인 영업정책이 `유통일원화'를 역행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과거처럼 풀던지 아니면 차등마진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해 확대시켜야 한다는 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와함께 자성론도 들리고 있다. 도매가 그동안 유통일원화를 강도 높게 추진했다면 지금처럼 제약사의 아쉬운 소리도 듣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책이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자체적으로 구조조정을 진행시켜 신용도를 높이는 업체로 거듭나야 할 때라고 많은 업체관계자들은 말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도매업체의 처방약 공급실태를 요약한다면 `진행중'이다. 있을 건 있고 없는 건 없는 것이 현 도매상의 실태다.
종합도매상이라고 100% 구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빈도 처방에 쓰이는 외자제약사 제품 등이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약국에서는 마치 도매상이 의약품 구비에 전능한 것처럼 오해하고 있지만 지금은 더더욱 약국의 입맛을 맞출 수 없는 상황이다.
또 적어도 의약분업의 순조로운 출발을 위해 전체의 희생을 감내하는 시기라면 제약사도 한발 물러서 의약품 공급 원활화에 기여하는 차원에서 도매상 신용거래를 확대시켜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있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