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기자 |     기사입력 2007-02-08 10:39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분다는 말이 있다. 차가운 북풍이지만 눈보라치는 강풍은 아니다. 단지 살을 에듯 불어오는 쌀쌀한 겨울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를 실감하는 기회는 많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무 끝을 볼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추운 겨울철에....

만산홍엽이 사라지고 징글벨이 울려 퍼질 때면 마음이 설렌다. 첫 눈이라도 내리는 날엔 안절부절 못한다. 백설(白雪)을 휘날리며 슬로프를 누비는 스키의 환상이 유혹하기 때문이다. 겨울을 추위와 눈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스키어들은 그 반대다. 스키는 겨울 스포츠의 꽃이다. 눈 위를 달리며 스피드를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 아닌가. 그리고 뛰어난 순발력과 강력한 하체 근육은 물론이고 몸의 유연성을 키울 수 있다. 이는 바로 젊음이다. 숲 속 눈 위에서 펼쳐지는 젊음의 향연 이 바로 스키다.

스키를 탄지 벌서 십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 미숙하다. 숏 턴이나 패러렐 턴을 제대로 구사할 수가 없다. 물론 정식으로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항상 부츠에 탓을 돌리고 있었다. 사이즈가 작기도 하지만 각도가 맞지 않아 무릎이 제대로 굽혀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몸에 맞는 부츠를 준비해야 할 텐데... 생각하면서 세월만 흘렀다. 그런데 올해 대망의 부츠를 새 것으로 바꾼 것이다. 거기다가 플레이트도 요즘 유행하는 카빙으로 교체했다. 말하자면 완전히 현대식 스키를 장만한 셈이다. 나이가 많을수록 장비가 좋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잘 탈 수 있겠지. 뿌듯한 가슴을 안고 스키장을 향했다. 

베어스 타운. 스키를 처음 배울 땐 천마산 스키장을 자주 다녔다. 그곳의 중급자 코스를 아마 수백 번은 오르내렸을 것이다. 전국의 스키장을 안 가본 데가 없지만 베어스가 역시 가깝고 슬로프가 넓어서 좋다.

카빙스키에 새 부츠를 신었으니 조심스럽게 중급자 코스를 한 바퀴 돌았다.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는 상급자 코스로 갔다. 리프트를 타고 휑하니 오르니 초보자들 교육장 위로 두둥실 뜬다. ‘A’자형을 실습하는 왕초보들의 엉거주춤하면서 나뒹굴어지는 모습이 얼핏 보이더니 어느덧 산 속으로 가볍게 날아든다. 양편에 도열한 나무들은 사람들을 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울까. 더구나 울긋불긋 스키복은 개성 있고 화려하다. 정말 스키장에 있는 나무들은 행복해. 여름 한철 날씨 따뜻하고 잎이 무성해서 좋고, 겨울에는 스키어들을 보면서 즐거운 날을 보낼 수 있으니 말이다. 리프트가 사뿐히 위로 솟구치니 나무 끝이 바로 발 아래다. 겨울바람이 텅 빈 나뭇가지를 맴도는 것이 눈에 선하게 들어온다. 오~라 저것이 삭풍이지? 이 나무도 흔들어 보고 저 나무도 흔들어 본다. 삭풍이 장난을 치는구나! 겨울잠을 자는 나무들을 깨우고 내가 왔다고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가 보다. 스키를 앞뒤로 흔들며 나도 그들에게 반갑다고 화답한다.

왼편에 도열한 전나무들은 나란히 나란히 하늘로 곧추섰다. 밑둥치가 굵어질 틈도 없이 길게만 자랐다. 어째서 전나무는 위만 보고 클까? 참나무나 관목처럼 앞도 보고 옆도 보며 어깨동무도 하면서 여유 있게 자라면 얼마나 좋아. 세상을 그렇게 폭 넓게 살아야 하는 건데... 아무튼 오늘은 이들이 해맑은 웃음과 훈훈한 몸짓을 해주니 나도 기분이 좋다.

언덕배기 나무 위에 까치집이 보인다. 하나 둘. 까치집 사이로 휑하니 하늘이 보인다. 아마도 삭풍과 친구하려고 저렇게 구멍을 많이 만들었나 보다. 그래 까치와 삭풍은 친구야.

숲을 벗어나니 덩실 슬로프위로 나왔다. 하얀 속살이 눈부시다. 마침 보드 하나가 눈을 휘젓고 내려온다. 앞뒤로 몸을 흔드는 폼이 대단한 실력가다. 스키 타는 사람에겐 악명 높은 보드지만 저 정도면 기술이 아니고 예술이다. 나도 보드를 미워하지만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인간의 균형감각의 극치는 바로 보드다. 3단 평행봉이나 서커스 공연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균형 운동이다. 그러나 이는 거리와 율동을 짜 맞추듯 훈련하지만 보드는 부정형 균형운동이다. 그리고 전자는 몇몇 훈련된 자만 시행하는 것이지만 보-드는 너도나도 다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스키하면 보드를 말할 정도다. 여하튼 보-드는 인간의 균형감각과 유연성과 반사 신경이 얼마나 우수한가를 보여주는 훌륭한 운동이다. 그런데 바로 뒤이어 패러렐 턴을 하면서 멋지게 내려오는 스키어가 있다.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아가씨다. 머리뭉치가 마치 여우꼬리처럼 나풀거린다. 스키도 저 정도면 대단한 거야, 아 멋있다! 탄성이 절로난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겠지? 부츠를 갈았으니까...

몇 번을 오르내렸다. 발을 모아서 턴을 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뒤에서 박박 긁고 내려오는 보드 때문에 정신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지난 번 스키와 별로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이다. 패러렐 턴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플레이트 길이가 짧아 오히려 안정감이 없는 듯하다. 스키만 바꾸면 잘 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다. 실망스럽고 고민스럽다. 뭔가 새로운 연습이 필요한 거야. 결국 패러렐 턴을 배우지 못하는 건가? 마음이 무겁다.

마지막 리프트에 올랐다. 휑하니 나무 위로 날아오른다. 그런데 삭풍이 간데없다. 어, 작별인사라도 하고 가야 할 텐데.... 허전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삭풍은 없다. 까치집에 갔나?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에 얹혀있는 까치집에는 마침 까치 두 마리가 서로 짖어대고 있다. 아마 그들도 삭풍 간 곳을 몰라 서로 물어 보고 있는 모양이다. 태양은 중천에 떠서 대지가 온기를 품으니 삭풍은 잠시 자취를 감춘듯하다.
돌아오는 길에 스키 기술교본이 담긴 테이프 하나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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