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소환하는 명곡들의 향연, ‘베놈: 라스트 댄스’
이 영화에는 40대 이상의 추억을 소환하는 노래들이 많이 삽입되어 있는데, 각 장면마다 가사와 리듬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강한 인상을 남긴다. 베놈이 말의 몸과 결합해 에디를 태우고 위험천만한 레이싱을 펼치는 장면에는 퀸의 ‘돈 스탑 미 나우(Don’t Stop Me Now)’가 삽입되어 웃음을 유발시키고, 베놈이 첸아주머니와 함께 스위트룸에서 춤을 추는 장면에는 아바의 ‘댄싱 퀸(Dancing Queen)’이 사용되었다. ‘댄싱 퀸’은 다소 진부한 선택이었지만, 두 사람(?)이 합을 맞추며 추는 춤에 이만큼 어울리는 곡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에디를 라스베가스까지 태워다주는 친절한 ‘마틴’ 가족은 캠핑카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스페이스 오더티(Space Oddity)’를 부른다. 우주선을 타고 떠난 톰 소령의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가 담긴 이 노래는 어쩐지 외계생명체와 지구인의 신비로운 동행과도 닮아 있는 듯하다.
에디가 베놈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마지막 신에서 흐르는 곡은 마룬 파이브의 ‘메모리즈(Memories)’다. 마룬 파이브의 리더, 애덤 리바인이 절친한 친구였던 조던 필드스테인을 추모하며 만든 이 노래는 한 몸이었던 에디를 위한 베놈의 희생을 기리기에도 더없이 적절한 곡이다. 이 장면에서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관객들도 많은데, 베놈 시리즈의 팬들이라면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이 가사를 계속 되뇌이지 않았을까.
‘지금은 널 볼 수 없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
(Cause I can’t reach out to call you, but I know I will one day, yeah)’
윤성은의 Pick 무비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공포의 근원, ‘롱레그스’
‘롱레그스’(감독 오즈 퍼키스)는 미국에서 1억 천 달러 이상의 극장 수입을 거둬들인 ‘올해의 독립영화’다. 여성 FBI 요원이 연쇄살인마를 쫓는다는 설정 때문에 개봉 당시 ‘양들의 침묵’(감독 조나단 드미, 1991)과 비견되며 극강의 공포를 선사한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이러한 소문은 비록 개봉 이후 상당 부분 과장된 것이라는 실관람객 리뷰들로 덮이게 되었지만, 공포영화로서 이례적인 흥행만으로도 이 영화가 특별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롱레그스’는 1974년 오리건주의 한 소녀가 집 앞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4:3 비율의 화면에 보이는 외딴 2층집과 을씨년스러운 설경 안에서 이 의문의 남자는 소녀에게 이상한 말들을 건네는데, 처음에는 소녀의 눈높이를 보여주려는 듯 남자의 입까지밖에 화면에 보이지 않다가 마지막 부분에서야 괴기스러운 사운드와 함께 얼굴 전체가 드러난다. 자신을 ‘롱레그스’라 말하는 남자, ‘코블’(니콜라스 케이지)의 얼굴은 여느 사탄숭배자들과 마찬가지로 기괴한 메이크업으로 뒤덮여 있다. 이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는 ‘롱레그스’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 중 하나로, 이 영화가 시간적 순서나 논리에 구애받지 않는 한 편의 악몽이라면 꿈에서 깬 뒤에도 계속 떠오를 이미지 중 하나다.
다음 장면은 90년대 중반에 FBI 요원이 되어 있는 그 소녀, ‘리 하커’(마이카 먼로)의 불안한 얼굴로 넘어간다. FBI는 지난 30년간 열 가정에서 아버지가 아내와 딸을 죽이고 자살한 사건을 조사중이다. 신입 요원임에도 초능력이라 할 만큼 뛰어난 직관력을 가진 리는 중요한 단서들을 척척 찾아내더니 모든 사건의 배후에 코블이 있다는 것까지 알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집에 침입의 흔적이 없었다는 점 때문에 리는 코블에게 공범이 있었을 것이라 판단하고 더 깊숙이 사건을 파헤치다가 급기야 끔찍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사실 ‘롱레그스’에는 관객을 갑자기 놀래키는 장치(점프 스케어)도 거의 없고, 초자연적 존재가 일그러진 얼굴로 달려드는 종류의 공포도 없다. ‘세븐’(감독 데이빗 핀처, 1995)처럼 범죄 미스터리물로서의 서사가 탄탄하거나 경악할 수준의 반전이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신들의 응집력이 다소 떨어지고, 설명이 생략된 부분이 많아 이야기의 퍼즐을 완벽히 맞추기도 어렵다. 그러나 미국 관객들에게 ‘롱레그스’가 통했던 것은 이 영화에서 혼란에 빠진 동시대 미국 사회의 초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딸이 성장하기를 바라지 않는 아버지, 아주 오래전 물건들까지 버리지 못하는 어머니는 과거라는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구세대를 표상한다. 일부러 원래 시간적 배경보다 더 먼 과거처럼 꾸민 세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를 앞세웠던 미국을 떠올리게 한다. 그 시절 미국은 가부장적인 아버지, 남편에게 순종적이기를 강요당했던 주부들을 양산했고, 딸들 또한 인형과 동일시되는 삶을 세뇌당했다. 오즈 퍼킨스 감독은 가장 친근하고 무해한 모습으로 집에 들어와 가정을 파국으로 치닫게 만드는 존재를 종교인과 인형, 검은 연기 등으로 표현해냄으로써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데 성공했다.
‘롱레그스’에 대한 국내 관객들의 반응은 극과 극이다. 응당 미국과 같은 흥행 성적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회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과 공포의 근원을 대입해 볼 때, 분명 공감할 만한 지점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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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소환하는 명곡들의 향연, ‘베놈: 라스트 댄스’
이 영화에는 40대 이상의 추억을 소환하는 노래들이 많이 삽입되어 있는데, 각 장면마다 가사와 리듬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강한 인상을 남긴다. 베놈이 말의 몸과 결합해 에디를 태우고 위험천만한 레이싱을 펼치는 장면에는 퀸의 ‘돈 스탑 미 나우(Don’t Stop Me Now)’가 삽입되어 웃음을 유발시키고, 베놈이 첸아주머니와 함께 스위트룸에서 춤을 추는 장면에는 아바의 ‘댄싱 퀸(Dancing Queen)’이 사용되었다. ‘댄싱 퀸’은 다소 진부한 선택이었지만, 두 사람(?)이 합을 맞추며 추는 춤에 이만큼 어울리는 곡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에디를 라스베가스까지 태워다주는 친절한 ‘마틴’ 가족은 캠핑카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스페이스 오더티(Space Oddity)’를 부른다. 우주선을 타고 떠난 톰 소령의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가 담긴 이 노래는 어쩐지 외계생명체와 지구인의 신비로운 동행과도 닮아 있는 듯하다.
에디가 베놈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마지막 신에서 흐르는 곡은 마룬 파이브의 ‘메모리즈(Memories)’다. 마룬 파이브의 리더, 애덤 리바인이 절친한 친구였던 조던 필드스테인을 추모하며 만든 이 노래는 한 몸이었던 에디를 위한 베놈의 희생을 기리기에도 더없이 적절한 곡이다. 이 장면에서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관객들도 많은데, 베놈 시리즈의 팬들이라면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이 가사를 계속 되뇌이지 않았을까.
‘지금은 널 볼 수 없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
(Cause I can’t reach out to call you, but I know I will one day, yeah)’
윤성은의 Pick 무비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공포의 근원, ‘롱레그스’
‘롱레그스’(감독 오즈 퍼키스)는 미국에서 1억 천 달러 이상의 극장 수입을 거둬들인 ‘올해의 독립영화’다. 여성 FBI 요원이 연쇄살인마를 쫓는다는 설정 때문에 개봉 당시 ‘양들의 침묵’(감독 조나단 드미, 1991)과 비견되며 극강의 공포를 선사한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이러한 소문은 비록 개봉 이후 상당 부분 과장된 것이라는 실관람객 리뷰들로 덮이게 되었지만, 공포영화로서 이례적인 흥행만으로도 이 영화가 특별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롱레그스’는 1974년 오리건주의 한 소녀가 집 앞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4:3 비율의 화면에 보이는 외딴 2층집과 을씨년스러운 설경 안에서 이 의문의 남자는 소녀에게 이상한 말들을 건네는데, 처음에는 소녀의 눈높이를 보여주려는 듯 남자의 입까지밖에 화면에 보이지 않다가 마지막 부분에서야 괴기스러운 사운드와 함께 얼굴 전체가 드러난다. 자신을 ‘롱레그스’라 말하는 남자, ‘코블’(니콜라스 케이지)의 얼굴은 여느 사탄숭배자들과 마찬가지로 기괴한 메이크업으로 뒤덮여 있다. 이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는 ‘롱레그스’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 중 하나로, 이 영화가 시간적 순서나 논리에 구애받지 않는 한 편의 악몽이라면 꿈에서 깬 뒤에도 계속 떠오를 이미지 중 하나다.
다음 장면은 90년대 중반에 FBI 요원이 되어 있는 그 소녀, ‘리 하커’(마이카 먼로)의 불안한 얼굴로 넘어간다. FBI는 지난 30년간 열 가정에서 아버지가 아내와 딸을 죽이고 자살한 사건을 조사중이다. 신입 요원임에도 초능력이라 할 만큼 뛰어난 직관력을 가진 리는 중요한 단서들을 척척 찾아내더니 모든 사건의 배후에 코블이 있다는 것까지 알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피해자들의 집에 침입의 흔적이 없었다는 점 때문에 리는 코블에게 공범이 있었을 것이라 판단하고 더 깊숙이 사건을 파헤치다가 급기야 끔찍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사실 ‘롱레그스’에는 관객을 갑자기 놀래키는 장치(점프 스케어)도 거의 없고, 초자연적 존재가 일그러진 얼굴로 달려드는 종류의 공포도 없다. ‘세븐’(감독 데이빗 핀처, 1995)처럼 범죄 미스터리물로서의 서사가 탄탄하거나 경악할 수준의 반전이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신들의 응집력이 다소 떨어지고, 설명이 생략된 부분이 많아 이야기의 퍼즐을 완벽히 맞추기도 어렵다. 그러나 미국 관객들에게 ‘롱레그스’가 통했던 것은 이 영화에서 혼란에 빠진 동시대 미국 사회의 초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딸이 성장하기를 바라지 않는 아버지, 아주 오래전 물건들까지 버리지 못하는 어머니는 과거라는 악령에 사로잡혀 있는 구세대를 표상한다. 일부러 원래 시간적 배경보다 더 먼 과거처럼 꾸민 세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를 앞세웠던 미국을 떠올리게 한다. 그 시절 미국은 가부장적인 아버지, 남편에게 순종적이기를 강요당했던 주부들을 양산했고, 딸들 또한 인형과 동일시되는 삶을 세뇌당했다. 오즈 퍼킨스 감독은 가장 친근하고 무해한 모습으로 집에 들어와 가정을 파국으로 치닫게 만드는 존재를 종교인과 인형, 검은 연기 등으로 표현해냄으로써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데 성공했다.
‘롱레그스’에 대한 국내 관객들의 반응은 극과 극이다. 응당 미국과 같은 흥행 성적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회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과 공포의 근원을 대입해 볼 때, 분명 공감할 만한 지점도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