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얘길 제발 들어줘!”
여기, 한 소녀가 있다. 어딘가 겁에 질린 듯한 소녀는 있는 힘껏 목소리를 내보려 하지만, 이내 돌아온 것은 절망뿐이다. 한길 바닷속처럼 검푸른 어둠의 심연 속에서 아무도 보고 들으려 하지 않는 이야기를 과연 그는 어떻게 전해야만 할까.
창작 초연 뮤지컬 <홍련>이 개막과 동시에 매진 사례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7월 30일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개막한 <홍련>은 한국 전통 설화인 ‘장화홍련전’ 주인공 홍련과 ‘바리데기’의 바리가 사후 세계 재판에서 만나게 된다는 설정을 기반에 두고 창작한 뮤지컬이다. 신예 배시현 작가와 박신애 작곡가의 작품으로 흥미로우면서도 익숙한 소재와 참신한 설정의 만남 덕분에 초기 단계부터 궁금증을 자아냈는데, 오래 공들인 만큼 완성도 높은 결과물로 관객들의 발길을 이끄는 분위기다.
작품은 2022년 CJ문화재단의 뮤지컬 창작자 지원사업인 ‘스테이지업’을 통해 발굴돼 기획 개발을 거친 뒤 2022년 ‘스테이지업’ 최종지원작으로 선정되며 리딩 쇼케이스를 열었다. 이어 문화체육관광부와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최하고 주관하는 ‘K-뮤지컬 국제 마켓’의 ‘선보임 쇼케이스’로 기대를 모았고, 이후 지속적인 수정과 보완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초연 무대를 이끌 13명의 출연진 역시 시선을 모은다. 먼저 홍련 역으로 한재아, 김이후 홍나현이, 바리 역으로는 이아름솔, 김경민, 이지연이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강림 역 고상호, 신창주, 이종영, 월직차사와 일직차사 역에 김대현, 임태현, 신윤철, 정백선도 함께한다.
조선시대 작자 미상의 고전 소설 ‘장화홍련전’은 가정형 계모 소설의 대표작이라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좌수 배무룡이 전처로부터 뒤늦게 얻은 장화·홍련 자매와 후처로 들이게 된 계모 허 씨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중심으로 하는데, 두 딸을 학대하고 음해한 끝에 끝내 목숨을 잃게 만드는 허 씨의 악랄함과 이를 중재하지 못하는 가장의 무능함이 아득한 분노와 허탈감을 자아낸다. 설화에는 이후 원귀가 된 자매가 자신들의 억울함을 해소해 달라며 새로 부임하는 부사를 찾아가는 것으로 전해지지만, <홍련>은 다르다. 뮤지컬에서는 ‘장화홍련전’ 속 홍련이 아버지를 죽이고, 남동생이자 계모의 아들 장쇠에게 해를 가했다는 죄로 삼도천을 건너기 전 바리공주에게 저승의 재판을 받는다는 설정이 출발 지점이다.
청보랏빛 조명으로 물든 무대 위, 천도정의 주인인 저승신 바리공주는 차사 강림과 함께 홍련의 진짜 죄를 파헤치기 위한 재판을 시작한다. 무려 13만 9998번째 재판인 홍련의 재판은 바리공주가 주관하는 마지막 재판이다. 어려서 부모로부터 버림받았으나 그런 부모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약을 구해다 주고, 죽은 사람들의 한을 풀어준다던 바리데기 설화의 주인공 바리는 시작부터 비협조적인 홍련을 바라보면서도 사랑을 말한다. 홍련은 진실을 고하라는 바리의 말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벌인 일은 맞지만, 하늘이 내릴 벌을 대신한 것이니 무죄라고 주장한다. 월직차사와 일직차사의 도움으로 지난 과거의 거울을 비추는 강림은 마치 콘서트장에 온 것처럼 강렬한 조명 세례를 받으며 재판을 이어가고, 바리는 마지막까지 주장을 꺾지 않는 홍련의 말에 허점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그가 진실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밀도 있는 스토리 라인, 국악과 서양 음악이 어색하지 않게 어울린 넘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는 <홍련>이 가진 힘이다. 무엇보다 홍련과 바리를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가정 학대의 피해자로 바라보면서 그들이 마음속에 품은 응어리를 현대적 관점에서 풀 수 있도록 하고, 이를 록 콘서트와 씻김굿으로 승화한 점도 흥미롭다. 다만 공간적 한계와 아쉬운 음향 문제는 차츰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작품에 등장하는 상황 설정들이 보기에 따라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하려 노력한 흔적도 곳곳에서 엿보인다. <홍련>은 가정 내에서 겪을 수 있는 문제 상황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했거나 혹은 비슷한 사례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싼다. 또한 죽거나 다쳐야만 뒤늦게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 사회의 오랜 병폐를 지적하며, 사회적 약자를 위로하고 동시에 변화를 촉구한다. 작품을 통해 불붙은 연대는 분명 자신을 향한 사랑을 시작할 용기이자, 담장 밖으로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과 감동을 선사하는 <홍련>은 오는 10월 20일까지 이어진다.
<필자소개>
최윤영 씨는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와 경인방송 라디오 리포터 등 방송 활동과 더불어 문화예술공연 전문 진행자로 다양한 무대에 선 바 있다.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후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칼럼을 기고해 왔고 현재 한국영상대학교 미디어보이스과 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으며,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채널을 운영중이다.
“내 얘길 제발 들어줘!”
여기, 한 소녀가 있다. 어딘가 겁에 질린 듯한 소녀는 있는 힘껏 목소리를 내보려 하지만, 이내 돌아온 것은 절망뿐이다. 한길 바닷속처럼 검푸른 어둠의 심연 속에서 아무도 보고 들으려 하지 않는 이야기를 과연 그는 어떻게 전해야만 할까.
창작 초연 뮤지컬 <홍련>이 개막과 동시에 매진 사례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7월 30일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개막한 <홍련>은 한국 전통 설화인 ‘장화홍련전’ 주인공 홍련과 ‘바리데기’의 바리가 사후 세계 재판에서 만나게 된다는 설정을 기반에 두고 창작한 뮤지컬이다. 신예 배시현 작가와 박신애 작곡가의 작품으로 흥미로우면서도 익숙한 소재와 참신한 설정의 만남 덕분에 초기 단계부터 궁금증을 자아냈는데, 오래 공들인 만큼 완성도 높은 결과물로 관객들의 발길을 이끄는 분위기다.
작품은 2022년 CJ문화재단의 뮤지컬 창작자 지원사업인 ‘스테이지업’을 통해 발굴돼 기획 개발을 거친 뒤 2022년 ‘스테이지업’ 최종지원작으로 선정되며 리딩 쇼케이스를 열었다. 이어 문화체육관광부와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최하고 주관하는 ‘K-뮤지컬 국제 마켓’의 ‘선보임 쇼케이스’로 기대를 모았고, 이후 지속적인 수정과 보완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초연 무대를 이끌 13명의 출연진 역시 시선을 모은다. 먼저 홍련 역으로 한재아, 김이후 홍나현이, 바리 역으로는 이아름솔, 김경민, 이지연이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강림 역 고상호, 신창주, 이종영, 월직차사와 일직차사 역에 김대현, 임태현, 신윤철, 정백선도 함께한다.
조선시대 작자 미상의 고전 소설 ‘장화홍련전’은 가정형 계모 소설의 대표작이라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좌수 배무룡이 전처로부터 뒤늦게 얻은 장화·홍련 자매와 후처로 들이게 된 계모 허 씨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중심으로 하는데, 두 딸을 학대하고 음해한 끝에 끝내 목숨을 잃게 만드는 허 씨의 악랄함과 이를 중재하지 못하는 가장의 무능함이 아득한 분노와 허탈감을 자아낸다. 설화에는 이후 원귀가 된 자매가 자신들의 억울함을 해소해 달라며 새로 부임하는 부사를 찾아가는 것으로 전해지지만, <홍련>은 다르다. 뮤지컬에서는 ‘장화홍련전’ 속 홍련이 아버지를 죽이고, 남동생이자 계모의 아들 장쇠에게 해를 가했다는 죄로 삼도천을 건너기 전 바리공주에게 저승의 재판을 받는다는 설정이 출발 지점이다.
청보랏빛 조명으로 물든 무대 위, 천도정의 주인인 저승신 바리공주는 차사 강림과 함께 홍련의 진짜 죄를 파헤치기 위한 재판을 시작한다. 무려 13만 9998번째 재판인 홍련의 재판은 바리공주가 주관하는 마지막 재판이다. 어려서 부모로부터 버림받았으나 그런 부모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약을 구해다 주고, 죽은 사람들의 한을 풀어준다던 바리데기 설화의 주인공 바리는 시작부터 비협조적인 홍련을 바라보면서도 사랑을 말한다. 홍련은 진실을 고하라는 바리의 말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벌인 일은 맞지만, 하늘이 내릴 벌을 대신한 것이니 무죄라고 주장한다. 월직차사와 일직차사의 도움으로 지난 과거의 거울을 비추는 강림은 마치 콘서트장에 온 것처럼 강렬한 조명 세례를 받으며 재판을 이어가고, 바리는 마지막까지 주장을 꺾지 않는 홍련의 말에 허점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그가 진실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밀도 있는 스토리 라인, 국악과 서양 음악이 어색하지 않게 어울린 넘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배우들의 노래와 연기는 <홍련>이 가진 힘이다. 무엇보다 홍련과 바리를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될 가정 학대의 피해자로 바라보면서 그들이 마음속에 품은 응어리를 현대적 관점에서 풀 수 있도록 하고, 이를 록 콘서트와 씻김굿으로 승화한 점도 흥미롭다. 다만 공간적 한계와 아쉬운 음향 문제는 차츰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작품에 등장하는 상황 설정들이 보기에 따라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하려 노력한 흔적도 곳곳에서 엿보인다. <홍련>은 가정 내에서 겪을 수 있는 문제 상황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했거나 혹은 비슷한 사례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감싼다. 또한 죽거나 다쳐야만 뒤늦게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 사회의 오랜 병폐를 지적하며, 사회적 약자를 위로하고 동시에 변화를 촉구한다. 작품을 통해 불붙은 연대는 분명 자신을 향한 사랑을 시작할 용기이자, 담장 밖으로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과 감동을 선사하는 <홍련>은 오는 10월 20일까지 이어진다.
<필자소개>
최윤영 씨는 인천국제공항 아나운서와 경인방송 라디오 리포터 등 방송 활동과 더불어 문화예술공연 전문 진행자로 다양한 무대에 선 바 있다.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졸업 후 공연 칼럼니스트로서 칼럼을 기고해 왔고 현재 한국영상대학교 미디어보이스과 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으며, 네이버 오디오클립 ‘최윤영의 Musical Pre:view’ 채널을 운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