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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를 외운다는 것에 대하여
박병준
입력 2024-08-09 10:1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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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를 외운다는 것에 대하여

 

유학 시절 빈에서 열린 바리톤 사이먼 킨리사이드(S. Keenlyside, 1959- )의 독창회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이 날의 메인 프로그램은 슈만(R. Schumann, 1810-1856)의 유명한 연가곡 시인의 사랑(Dichterliebe), Op. 48’.  16개의 노래 중 14번째 곡 밤마다 꿈에서 그대를 보네(Allnächtlich im Traume seh’ ich dich)’가 시작되고 조금 지났을 때였습니다킨리사이드는 갑자기 노래를 멈추고 피아니스트를 본 뒤그 곡의 처음부터 다시 불렀습니다그가 가사를 틀렸기 때문이었지요다시 시작한 그는 무사히 그 곡의 끝에 다다랐습니다그런데마지막 가사가 절묘했습니다. “그리고 난 그 단어를 잊어버렸어 (Und’s Wort hab’ ich vergessen)”. 다음 곡으로 넘어가기 전홀에는 청중들의 조용한 웃음소리가 잠시 가득했습니다.

 

음악가들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대 위에서 청중에게 음악을 전달해야 하는 음악가들에게 악보를 외우는 것은 상당한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마련입니다무대 위에서 혹은 중요한 시험이나 오디션에서 갑자기 음악이 기억이 나지 않아 연주가 끊길 수 있다는 불안함 때문이지요서두에 예를 들었던 킨리사이드의 경우처럼모두가 잠시 미소지으며 넘어갈 수 있다면 정말 다행이지만그런 행운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자칫 당황한 음악가가 그 이후의 공연을 제대로 끌고 나갈 수 없을 수도 있고잠시 끊겨버린 음악을 잘 복구한다고 하더라도 시험이나 오디션에서는 그 순간이 당락을 좌우할 요인이 되겠지요

 

악보를 외우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 요즘의 음악가들에게는 억울하겠지만사실 음악가들이 처음부터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지는 않았습니다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는 관습은 1830-40년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었지요이것이 도입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인물로 여러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이는 바로 로베르트 슈만의 부인이기도 했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클라라 슈만(C. Schumann, 1819-1896)입니다물론 클라라 이전에도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는 경우들은 적지 않게 있었지만이는 관습이라기 보다는 예외적인 경우라고 여겨지는데이는 분명 한 인물이 계속해서 외워서 연주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연주활동을 했던 클라라는 노년이 되기 전까지 리사이틀에서 지속적으로 악보를 외워 연주했지요그녀는 17세 때 베토벤(L. v. Beethoven, 1770-1827)의 피아노 소나타 제23열정을 외워서 연주해 화제를 모았는데악보를 보고 연주하던 당대의 관습에서 벗어난 그녀의 연주에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비판의 요지는 이것이었습니다악보를 보지 않고 연주하는 클라라가 교만하다는 것이었지요오늘날에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악보를 보고 연주하면연주자가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악보조차 못 외운 것 아니냐며 교만하다는 말이 나왔을 것입니다하지만당대에는 클라라와 같은 연주 형태가 청중으로 하여금 작곡가와 작품이 아니라연주자에게 집중하게 한다는 이유로 교만하다고 여겨졌습니다.

화가 안드레아스 슈타우프가 그린 1839년 경의 클라라 슈만 (public domain)

 

시간이 흐를수록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는 형태는 서서히 퍼져 나갔습니다여기에는 19세기 중반에 늘어난 중산층과 그들을 사로잡은 비르투오소(뛰어난 예술적 기교를 갖춘 인물)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중산층들이 연주회장에 더 자주 오게 되었고외워서 연주하는 관습의 시작을 논할 때 클라라와 함께 자주 등장하는 리스트(F. Liszt, 1811-1886)와 같은 비르투오소의 존재는 그들을 열광하게 했습니다외워서 연주하는 것이 아직 보편적이지는 않았던 당시에화려한 기교뿐 아니라 외워서 연주하는 능력을 갖춘 비르투오소는 더 큰 매력을 지닌 연주자로 인정받았지요.

 

외워서 연주하는 관습이 보다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였습니다그리고 이와 함께 어쩌면 필연적이게도연주 도중 음악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 갑자기 잊어버리는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도 늘게 되었지요이 시기에 지휘자 한스 폰 뷜로(H. v. Bülow, 1830-1894)는 악보를 외워서 지휘했고시간이 흐르며 외우는 방식에 대한 연구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는 관습에 대해 논할 때 성악에 대한 언급이 눈에 띄지 않는데이것은 오페라와 같은 극 음악의 특성상 가수가 악보를 외워서 공연하는 것이 처음부터 당연하게 여겨진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오늘날 음악회에 가거나 공연 영상을 본다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이지만무대에서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는 것이 사실 무대 위 모든 음악가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이는 독주자와 협연자에 주로 해당되지요하지만그들이 현대음악을 연주할 때에는 악보를 보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집니다실내악 연주자나 오케스트라 연주자는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당연한변하지 않는 관습으로 자리잡고 있지요그런데이러한 관습에 반하는 사례들도 있어 흥미롭습니다. 1920년대 초부터 40년대 초까지 활약했던 콜리쉬 현악 사중주단(Kolisch Quartet)은 쇤베르크(A. Schönberg, 1874-1951)나 버르토크(B. Bartok, 1881-1945)의 작품을 연주할 때에도 악보 없이 연주한 적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최근에는 오케스트라가 악보 없이 연주하는 경우도 있는데대표적으로 런던에 기반을 둔 오로라 오케스트라(Aurora Orchestra)를 들 수 있습니다그들은 모차르트(W. A. Mozart, 1756-1791)의 교향곡 제40번과 제41주피터’, 베토벤의 교향곡 제3영웅’, 56전원’ 그리고 베를리오즈(H. Berlioz, 1803-1869)환상교향곡’ 등을 악보 없이 연주했지요이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은 악보 없이 연주할 때의 자유로움과 서로 간의 원활한 소통 등을 언급하며 만족을 나타냈지만보는 입장에서는 꼭 저렇게까지 해야할까그냥 악보 보고 해도 되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다만기존과는 다른 신선함을적어도 시각적인 면에서 확실하게 전달해 주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요예전 칼럼에서 노르웨이 체임버 오케스트라(Norwegian Chamber Orchestra)가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Verklärte Nacht)’을 어두운 조명 아래 악보를 외워서 연주한 공연을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단순히 악보를 외워 연주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이를 활용하여 청중들에게 인상 깊은 공연을 어떤 방식으로 창조해낼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되는 의미있는 공연이었지요.

 

처음에는 낯설었던 현상이 어떻게 지금 당연하게 여겨지는 관습으로 변모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늘 흥미롭습니다지금 당연하게 여겨지는 악보를 외우는 관습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지금 낯설게 다가오는 공연 방식이 앞으로 더 대중적인 위치를 확보하게 될까요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날 사회에서 음악의 관습이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더욱 궁금해집니다.

 

추천영상오로라 오케스트라가 2016년 연주한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41주피터’  4악장 마지막 부분입니다선율이 서로 시간차를 두고 진행되곤 하는 이 4악장은 많은 집중력을 필요로 하지요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통상의 경우보다 많은 리허설을 소화하고 선보였을 이 연주에서 단원들의 확신에 찬 모습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인상적입니다조금은 공격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선명한 음향도 귀 기울여볼 가치가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n6DgC8ubUo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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