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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준의 클래스토리
관록과 패기 사이
박병준
입력 2024-06-07 11:46 수정 최종수정 2024-06-07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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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평단과 대중의 커다란 호응을 얻은 베토벤(L. v. Beethoven, 1770-1827)의 교향곡 전집 음반이 탄생했습니다. 1990년과 91년에 걸쳐 녹음된 이 음반의 지휘자는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N. Harnoncourt, 1929-2016). 원래 첼리스트였다가 지휘자가 된 그는 작곡가 당대의 악기와 연주 관습 등을 살려 연주하는 원전연주(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도 유명한 음악가였지요그가 1953년 설립하여 오래도록 이끌었던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Concentus Musicus Wien)은 현재도 세계적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원전연주 단체입니다.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은 원전연주 단체가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이 잇따라 발매되며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시기였습니다바로 그 시기에 아르농쿠르도 베토벤을 다룬 것인데 악단 선택이 참 의외였습니다당연히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과 함께 하리라는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원전연주 단체도 아닌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Chamber Orchestra of Europe)를 선택한 것이었지요. 1981년 창단된 이 오케스트라는 아르농쿠르와의 베토벤 교향곡 녹음 당시에는 비교적 신생 악단이었습니다또 단원들의 평균연령이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젊은 단체였지요아르농쿠르는 왜 오래도록 함께해온 자신의 악단도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춘 관록있는 오케스트라도 아닌이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선택했던 것일까요?

 

아르농쿠르는 이에 대해 흥미로운 언급을 하였습니다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이전에 베토벤의 교향곡들을 연주한 경험이 실질적으로 없는데 이는 다른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에는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었습니다그는 완전히 새로운 것에 대한 놀라움의 경험은 음악가 스스로에게 무척 귀중한 것인데 이는 베토벤 연주를 계속 해왔던 다른 오케스트라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라고도 했지요다른 오케스트라에서의 베토벤 교향곡 연주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닐테니까요.

 

사실아르농쿠르의 이 말은 조금 의아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아무리 단원들이 젊다고 해도 그들이 베토벤 교향곡을 연주한 경험이 아예 없었을까요베토벤의 교향곡 모두를 연주해본 단원은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오케스트라 레퍼토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베토벤의 교향곡들 중 일부는 연주해본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아르농쿠르와의 작업 이전에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클라우디오 아바도(C. Abbado, 1933-2014)의 지휘로 베토벤 교향곡 2번을 연주한 기록이 있기도 하지요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리허설하고 있는 아르농쿠르 (2010)  ©Werner Kmetitsch/Chamber Orchestra of Europe Homepage

 

아르농쿠르의 말을 조금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이 오케스트라는 일년 내내 활동하는 상설 오케스트라가 아니라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그때그때 모여 집중적으로 리허설과 공연을 하는 오케스트라입니다단원들은 오케스트라 단원이기도 하지만 독주자실내악 연주자 혹은 교수로서의 활동에 적극적인 경우가 많지요이러한 특성을 고려해보면 아르농쿠르의 말은 이 오케스트라에는 아직 그들만의 베토벤 연주 전통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합니다.

 

결국 아르농쿠르는 자신만의 베토벤 해석을 마음껏 공유할 수 있는 오케스트라를 원했고 그런 그에게 젊고 실력이 출중한 연주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베토벤 연주는 이래야 한다는 선입견이 기존의 오케스트라보다 확연히 적을 수밖에 없는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최고의 선택이었을 것입니다음악에 대한 아르농쿠르의 해박함과 오랜 시간 쌓여진 관록이 패기 넘치는 젊은 앙상블과 만나 좋은 시너지 효과를 낸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풍부한 경험을 통해 관록이 쌓여간다는 것은 물론 두말할 필요도 없이 많은 긍정적인 부분들을 갖고 있습니다작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연주에서의 안정감도 보장될 확률이 높아지지요어느 연주단체에 그들만의 연주 전통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소중한 것입니다이것이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그러나 이러한 전통과 관록이 때로 지나친 익숙함이 되어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요많은 스케줄을 소화해 내야 하는 보통의 오케스트라의 경우에 특히 그렇습니다아바도는 한 대담에서 유서깊은 전통을 자랑하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리허설하며 기존의 어떤 것을 바꾸고자 했을 때 이를 받아들이는 단원들도 있었지만어떤 단원들은 우리는 항상 이렇게 연주한다고 항변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아바도는 대부분의 오케스트라가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고 덧붙였지요

 

3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상임 지휘자였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 v. Karajan, 1908-1989)의 뒤를 이어 1989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된 아바도는 취임한 지 10년 정도 되었을 때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녹음합니다이 전집은 새로운 시도와 해석으로 많은 주목과 찬사를 받았는데 이 시기의 베를린 필은 카라얀 재임시절부터 있던 단원들 중 상당수가 이미 은퇴하고 아바도의 재임 기간에 새로 입단한 젊은 단원들 수가 많이 늘어났던 때였습니다그만의 새로운 시도와 해석이 카랴얀의 방식에 익숙한 단원들이 대부분이었을 때 큰 무리없이 가능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물론 관록있는 연주 단체가 변화에 늘 부정적이라고 단정지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다만익숙함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것에 안주하는 것보다 어렵기 마련이어서 변화와 새로움의 시도는 더 많은 노력과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하지요분명 쉽지 않지만이러한 시도 끝에 관록과 패기익숙함과 새로움의 조화가 잘 이루어질 때우리는 아르농쿠르와 아바도의 베토벤 음반과 같은 의미있는 결과물들을 계속해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추천영상아르농쿠르와 유럽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제5 1악장입니다기존의 대편성 오케스트라의 풍성한 소리를 대신하는 단단하고 투명한 울림이 인상적으로 다가옵니다대편성 오케스트라의 두터운 현악기 소리에 가려지곤 했던 관악기 소리가 보다 선명한 것도 커다란 매력입니다많은 찬사를 받았던 이들의 베토벤 연주를 감상해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SQO-rZ8LMJw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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