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의 호수’의 진화
지난 6월 말, 모던 발레계의 거장 앙쥴랭 프렐조카쥬가 4년 만에 방한했다. 2020년 첫 선을 보인 프렐조카쥬의 ‘백조의 호수’는 LG아트센터 기획공연 패키지 중 하나로 국내의 많은 발레 팬들이 기대를 모은 공연이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는 약 200여년간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발레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1877년 2월 볼쇼이 극장 초연 당시에는 실패로 끝나버린 작품이었다. 실패작으로 영영 묻힐 뻔한 이 작품을 소생시켜 지금까지 사랑받게 만든 사람은 마린스키 극장의 예술감독 마리우스 프티파와 안무가 레프 이바노프였다. 그들은 화려하기만 했던 의상에 변화를 주고 2,4막의 비중을 늘려 줄거리를 강화했으며, 특히 2막에 백조의 날갯짓을 닮은 군무를 추가해 인물의 상징성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변화 덕에 ‘백조의 호수’는 지금까지 다양하게 재해석되며 대표적인 발레 작품 중 하나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백조의 호수’는 원작이 분명하지 않으나 러시아 전래동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지그프리트 왕자가 악마 로트바르트의 저주에 걸린 오데트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전형적인 형태의 러브스토리로 둘의 사랑의 힘이 저주를 극복해내는 과정을 처연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이다. 특히 마지막 결말이 주인공들의 죽음으로 그려지지만 동시에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는 점에서 새드엔딩과 해피엔딩 두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초기 볼쇼이발레단의 안무는 오데트가 마법에서 풀려나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어 러시아에 정치적인 이슈가 있을 때마다 방영되기도 했다. 반면 1986년 파리 오페라발레단은 로트바르트의 승리로 오데트와 로트바르트가 함께 승천한다는 새드엔딩으로 재해석되었다.
그 밖에도 ‘백조의 호수’는 끊임없이 재해석과 재창조를 되풀이해왔다. 1995년 매튜 본은 남성 백조가 등장하는 ‘백조의 호수’를 등장시키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고, 이후 2005년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주인공 빌리가 발레리노의 꿈을 꾸게 되는 계기로 등장하기도 했다. 2011년 영화 ‘블랙 스완’에서는 주인공이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오딜이라는 1인 2역을 소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심리스릴러 장르로 재해석되어 주연 나탈리 포트만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쾌거를 안겨주었다. 또, 국내에서 제작된 2016년 애니메이션 ‘신비 아파트’에서는 발레리나 귀신 마리오네트 퀸의 테마곡으로 백조의 호수가 사용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백조의 호수 작품들은 대다수가 원작이 가진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 않거나 인용되는 선에 그치고 있다. 이에 반해 프렐조카쥬의 작품은 고전에서 백조와 호수가 가진 의미에서 벗어나 ‘현재’라는 시대성을 부여하고 최근 강조되는 환경을 새로운 주제의식으로 끌어당겼다. 그리하여 악마 로트바르트는 호수의 화석을 캐내 부를 축적하려는 개발자로, 지그프리트의 아버지는 로트바르트의 동업자로 등장한다. 오데트는 환경운동가, 지그프리트는 시추 장비 개발회사 후계자 등 역할에 현대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해 주제의식을 강하게 어필했다. 더불어 백조 의상은 종이접기에서 영감을 얻어 주제의식의 반영 뿐만 아니라 백조의 깃털을 연상시켜 무대연출의 아름다운 요소로써 매력을 더했다.
프렐조카쥬의 백조의 호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 대담한 무대연출로 관객을 장악한다. 별도의 무대장치 없이 오로지 LED화면을 통해 계속 변화하는 무대와 새롭게 작곡한 음악과 클래식의 결합은 관객들이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경험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프렐조카쥬는 인터뷰를 통해 “호수는 물을 상징하며 이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천연자원이다. 이에 대한 질문이 백조의 호수 프로젝트를 관통하는 주제다.”라고 전하며 백조의 호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함에 있어 환경이 소스가 된 이유를 밝혔다.
이렇게 참신한 시도는 프렐조카쥬 이전에도 있었다. 1995년 초연된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발레의 통념을 깬 새로운 시도로 회자되며 사랑받고 있다. 깃털 바지를 입은 근육질의 남성 백조 무용수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매튜 본의 작품은 발레리노들만이 표현할 수 있는 힘 있는 점프와 안무로 관객들의 시선을 압도한다. 더불어 그 역시 시대적 배경을 현대로 옮겨 표현해 영국 왕실에서 왕자와 여왕과의 관계를 풍자하고 런던 뒷골목이 등장한다. 이는 기존의 백조의 호수가 갖고 있던 우아함과 다소 거리가 멀지만 그래서 더욱 색다르고 매력적인 연출로 느껴진다.
그렇다면 백조의 호수 뿐만 아니라 고전 작품들은 왜 끊임없이 각색되고 재창조되며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일까. 고전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작품’을 뜻하는 것으로 시대를 초월한 인류의 공통된 감정을 담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사랑, 분노, 배신이 농축된 희노애락의 표현은 고전만이 가진 힘이며 이에 매료된 많은 연출가들과 관객들에게 계속해서 러브콜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고전에서 현대적 의미를 재발견하며 백조의 호수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현대의 관객들은 이후에 등장할 ‘새로운 고전의 탄생’을 목도할 준비를 마쳤다. 연출가들의 새로운 시도를 기대하고 응원한다.
박선민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예술경영)와 홍콩과학기술대학(MBA)을 졸업한 후 미국 뉴욕필하모닉 기획팀 및 싱가포르 IMG Artists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는 선아트 매니지먼트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강의하고 있다.
‘백조의 호수’의 진화
지난 6월 말, 모던 발레계의 거장 앙쥴랭 프렐조카쥬가 4년 만에 방한했다. 2020년 첫 선을 보인 프렐조카쥬의 ‘백조의 호수’는 LG아트센터 기획공연 패키지 중 하나로 국내의 많은 발레 팬들이 기대를 모은 공연이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는 약 200여년간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발레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나 1877년 2월 볼쇼이 극장 초연 당시에는 실패로 끝나버린 작품이었다. 실패작으로 영영 묻힐 뻔한 이 작품을 소생시켜 지금까지 사랑받게 만든 사람은 마린스키 극장의 예술감독 마리우스 프티파와 안무가 레프 이바노프였다. 그들은 화려하기만 했던 의상에 변화를 주고 2,4막의 비중을 늘려 줄거리를 강화했으며, 특히 2막에 백조의 날갯짓을 닮은 군무를 추가해 인물의 상징성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변화 덕에 ‘백조의 호수’는 지금까지 다양하게 재해석되며 대표적인 발레 작품 중 하나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백조의 호수’는 원작이 분명하지 않으나 러시아 전래동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지그프리트 왕자가 악마 로트바르트의 저주에 걸린 오데트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전형적인 형태의 러브스토리로 둘의 사랑의 힘이 저주를 극복해내는 과정을 처연하고도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이다. 특히 마지막 결말이 주인공들의 죽음으로 그려지지만 동시에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는 점에서 새드엔딩과 해피엔딩 두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초기 볼쇼이발레단의 안무는 오데트가 마법에서 풀려나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어 러시아에 정치적인 이슈가 있을 때마다 방영되기도 했다. 반면 1986년 파리 오페라발레단은 로트바르트의 승리로 오데트와 로트바르트가 함께 승천한다는 새드엔딩으로 재해석되었다.
그 밖에도 ‘백조의 호수’는 끊임없이 재해석과 재창조를 되풀이해왔다. 1995년 매튜 본은 남성 백조가 등장하는 ‘백조의 호수’를 등장시키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고, 이후 2005년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 주인공 빌리가 발레리노의 꿈을 꾸게 되는 계기로 등장하기도 했다. 2011년 영화 ‘블랙 스완’에서는 주인공이 백조의 호수의 오데트/오딜이라는 1인 2역을 소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심리스릴러 장르로 재해석되어 주연 나탈리 포트만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쾌거를 안겨주었다. 또, 국내에서 제작된 2016년 애니메이션 ‘신비 아파트’에서는 발레리나 귀신 마리오네트 퀸의 테마곡으로 백조의 호수가 사용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백조의 호수 작품들은 대다수가 원작이 가진 흐름을 크게 벗어나지 않거나 인용되는 선에 그치고 있다. 이에 반해 프렐조카쥬의 작품은 고전에서 백조와 호수가 가진 의미에서 벗어나 ‘현재’라는 시대성을 부여하고 최근 강조되는 환경을 새로운 주제의식으로 끌어당겼다. 그리하여 악마 로트바르트는 호수의 화석을 캐내 부를 축적하려는 개발자로, 지그프리트의 아버지는 로트바르트의 동업자로 등장한다. 오데트는 환경운동가, 지그프리트는 시추 장비 개발회사 후계자 등 역할에 현대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해 주제의식을 강하게 어필했다. 더불어 백조 의상은 종이접기에서 영감을 얻어 주제의식의 반영 뿐만 아니라 백조의 깃털을 연상시켜 무대연출의 아름다운 요소로써 매력을 더했다.
프렐조카쥬의 백조의 호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더 대담한 무대연출로 관객을 장악한다. 별도의 무대장치 없이 오로지 LED화면을 통해 계속 변화하는 무대와 새롭게 작곡한 음악과 클래식의 결합은 관객들이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경험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프렐조카쥬는 인터뷰를 통해 “호수는 물을 상징하며 이는 인간에게 필수적인 천연자원이다. 이에 대한 질문이 백조의 호수 프로젝트를 관통하는 주제다.”라고 전하며 백조의 호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함에 있어 환경이 소스가 된 이유를 밝혔다.
이렇게 참신한 시도는 프렐조카쥬 이전에도 있었다. 1995년 초연된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발레의 통념을 깬 새로운 시도로 회자되며 사랑받고 있다. 깃털 바지를 입은 근육질의 남성 백조 무용수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매튜 본의 작품은 발레리노들만이 표현할 수 있는 힘 있는 점프와 안무로 관객들의 시선을 압도한다. 더불어 그 역시 시대적 배경을 현대로 옮겨 표현해 영국 왕실에서 왕자와 여왕과의 관계를 풍자하고 런던 뒷골목이 등장한다. 이는 기존의 백조의 호수가 갖고 있던 우아함과 다소 거리가 멀지만 그래서 더욱 색다르고 매력적인 연출로 느껴진다.
그렇다면 백조의 호수 뿐만 아니라 고전 작품들은 왜 끊임없이 각색되고 재창조되며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일까. 고전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작품’을 뜻하는 것으로 시대를 초월한 인류의 공통된 감정을 담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사랑, 분노, 배신이 농축된 희노애락의 표현은 고전만이 가진 힘이며 이에 매료된 많은 연출가들과 관객들에게 계속해서 러브콜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고전에서 현대적 의미를 재발견하며 백조의 호수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현대의 관객들은 이후에 등장할 ‘새로운 고전의 탄생’을 목도할 준비를 마쳤다. 연출가들의 새로운 시도를 기대하고 응원한다.
박선민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예술경영)와 홍콩과학기술대학(MBA)을 졸업한 후 미국 뉴욕필하모닉 기획팀 및 싱가포르 IMG Artists에서 근무한 바 있다. 현재는 선아트 매니지먼트 대표를 맡고 있으며 한양대학교에서 예술경영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