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에 대하여
얼마 전 빈에 위치한 세계적인 연주홀 무직페어라인(Musikverein)의 SNS에 사진 몇 장이 올라왔습니다. 올해 81세가 된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M. Pollini, 1942- )가 6월 15일에 가졌던 리사이틀 사진이었지요. 폴리니는 작년과 올해 건강상의 이유로 많은 연주회들을 취소해야 했습니다. 그 연주회들 가운데에는 작년과 올해 연이어 취소했던 서울에서의 리사이틀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아쉽게 했지요. 빈에서의 리사이틀 역시 작년에 취소된 이후 다시 열린 것이었습니다. 쇤베르크(A. Schönberg, 1874-1951)와 슈만(R. Schumann, 1810-1856), 그리고 쇼팽(F. Chopin, 1810-1849)의 작품들로 구성된 프로그램이 끝난 후, 앙코르로는 쇼팽의 발라드 1번이 연주되었습니다. 고령의 나이에, 그것도 오래도록 아파서 연주 활동에 지장이 있었던 폴리니가 앙코르로 거의 10분 가까이 걸리는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광적인 기립박수로 마무리되었다는 폴리니의 빈 리사이틀 사진에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것은 나이든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조금은 창백하고 수척한 그의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고, 등도 많이 굽어 있는 듯 했습니다. 2013년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L. v. Beethoven, 1770-1827)의 피아노 협주곡 제 5번 <황제>를 직접 보았을 때, 그의 등이 생각보다 많이 굽어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더 흘렀으니 그의 등이 그 때보다 더 굽어 있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겠지만, 더 굽어진 등을 보는 안타까움도 더 커졌지요.
고령의 폴리니 사진을 보며 한 가지 질문이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무엇이 현재의 폴리니처럼 고령의 음악가들을 계속해서 무대로 이끄는 것일까요? 80세가 넘은 나이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역보다는 은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립니다. 더구나 폴리니처럼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던 인물에게는 더욱 그렇지요. 물론, 80이 넘은 나이에도 세계적인 무대에 계속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음악가가 지난 수십 년 동안 빛나는 업적을 쌓아왔음을 방증하지만, 그렇게 빛나는 업적을 오래 쌓아 왔다면, 보통의 생각으로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큰 걱정이 없을 테니, 적당한 나이에 은퇴하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것이 결코 이상한 그림은 아닐 것입니다.
무대에 선다는 것은 어느 나이대에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고령의 음악가들에게는 신체적인 기능의 저하라는 어려움이 추가됩니다. 이는 지휘자보다는 기악 연주자에게, 그리고 연주자보다는 성악가에게 더 가혹하게 다가오기 마련이지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신체적 기능의 저하는 한 음악가가 전성기에 선보일 수 있었던 빛나는 기교를 어느 정도 퇴보시키며, 연주 중 실수가 나올 가능성을 높입니다. 또한, 악보를 외우는 것에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지요. 10년 전 당시 71세의 폴리니가 연주했던 <황제 협주곡>을 떠올려보면, 맑고 빛나는 음색과 유창한 흐름이 감탄을 불러일으켰지만, ‘폴리니’라는 이름에 썩 어울리지 않는 적지 않은 미스터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청중들은 그의 연주에 큰 박수를 보냈지만, 만일 젊은 연주자가 <황제 협주곡> 연주에 이 정도의 미스터치를 냈다면 어땠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지요.
고령의 나이가 되며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신체적 기능의 저하와 이것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점들은 사실 그 누구보다도 음악가 자신이 잘 알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많은 고령의 음악가들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P. Casals, 1876-1973)는 96세로 사망했던 1973년까지 지휘자로서 무대에 올랐습니다. 케네디(J. F. Kennedy, 1917-1963) 대통령 앞에서 연주해 화제를 모았던 1961년 백악관 리사이틀 당시 그의 나이는 84세였죠. 바이올리니스트 나탄 밀스타인(N. Milstein, 1904-1992)은 1986년 82세의 나이에 결국은 마지막이 된 리사이틀에서 연주했습니다. ‘결국은 마지막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그 리사이틀 당시 느꼈던 왼손 엄지 손가락 통증으로 인해 은퇴의 수순을 밟아야 했기 때문이지요. 만약 불의의 부상이 없었더라면 그의 커리어는 조금 더 연장되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 9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피아니스트 메나헴 프레슬러(M. Pressler, 1923-2023)는 9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현역으로 활동했는데, 2013년 90세의 나이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처음 공연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왜 고령의 음악가들은 무대에 오를까요? 지극히 단순한 혹은 너무 이상적이기만 한 대답일 수 있으나, 그들이 지난 수십 년간 연주하고 지휘해 왔음에도, 청중에게 전달하고 싶은 무언가가 여전히 그들의 마음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무언가는 세월이 흘러간다고 저절로 생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애쓰고 끈질기게 탐구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겠지요. 이 관점에서 볼 때, 누군가 고령의 카잘스에게 그가 계속해서 연습하는 이유를 묻자 그가 한 대답 “왜냐하면 내가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는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오랜 세월 음악을 위해 애쓴 음악가들의 무대를 만나는 것은 진정 설레고 벅찬 일입니다. 젊은 시절의 빛나는 화려함은 다소 옅어졌을지라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무르익어간 그들의 음악은 여전히, 아니 어쩌면 그들의 젊은 시절의 음악보다 더 우리를 매료시킵니다. 고령의 나이에 무대에서 음악에 몰입하는 모습은 우리를 숨죽이게 하지요. 고령의 음악가들이 선보이는 가슴 벅찬 무대를 더 풍성하게 접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추천영상: 2019년 77세의 폴리니가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 2악장입니다. 40여년 전에 그가 같은 작품을 녹음한 음반이 오래도록 명반이라고 불리우는 가운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새롭게 녹음했지요. 주제와 변주로 이루어진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의 마지막 악장을 풍부하고 생생하게 이끌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중간중간 보여지는 음악에 몰입한 그의 표정이 감동적이기도 하지요. 지난해와 올해 연이어 무산된 그의 내한공연이 다시 성사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J6WFV2J5LY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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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에 대하여
얼마 전 빈에 위치한 세계적인 연주홀 무직페어라인(Musikverein)의 SNS에 사진 몇 장이 올라왔습니다. 올해 81세가 된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M. Pollini, 1942- )가 6월 15일에 가졌던 리사이틀 사진이었지요. 폴리니는 작년과 올해 건강상의 이유로 많은 연주회들을 취소해야 했습니다. 그 연주회들 가운데에는 작년과 올해 연이어 취소했던 서울에서의 리사이틀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을 아쉽게 했지요. 빈에서의 리사이틀 역시 작년에 취소된 이후 다시 열린 것이었습니다. 쇤베르크(A. Schönberg, 1874-1951)와 슈만(R. Schumann, 1810-1856), 그리고 쇼팽(F. Chopin, 1810-1849)의 작품들로 구성된 프로그램이 끝난 후, 앙코르로는 쇼팽의 발라드 1번이 연주되었습니다. 고령의 나이에, 그것도 오래도록 아파서 연주 활동에 지장이 있었던 폴리니가 앙코르로 거의 10분 가까이 걸리는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했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광적인 기립박수로 마무리되었다는 폴리니의 빈 리사이틀 사진에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것은 나이든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조금은 창백하고 수척한 그의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고, 등도 많이 굽어 있는 듯 했습니다. 2013년 그가 연주하는 베토벤(L. v. Beethoven, 1770-1827)의 피아노 협주곡 제 5번 <황제>를 직접 보았을 때, 그의 등이 생각보다 많이 굽어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더 흘렀으니 그의 등이 그 때보다 더 굽어 있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겠지만, 더 굽어진 등을 보는 안타까움도 더 커졌지요.
고령의 폴리니 사진을 보며 한 가지 질문이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무엇이 현재의 폴리니처럼 고령의 음악가들을 계속해서 무대로 이끄는 것일까요? 80세가 넘은 나이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현역보다는 은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립니다. 더구나 폴리니처럼 건강상의 문제가 있었던 인물에게는 더욱 그렇지요. 물론, 80이 넘은 나이에도 세계적인 무대에 계속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음악가가 지난 수십 년 동안 빛나는 업적을 쌓아왔음을 방증하지만, 그렇게 빛나는 업적을 오래 쌓아 왔다면, 보통의 생각으로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큰 걱정이 없을 테니, 적당한 나이에 은퇴하고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것이 결코 이상한 그림은 아닐 것입니다.
무대에 선다는 것은 어느 나이대에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고령의 음악가들에게는 신체적인 기능의 저하라는 어려움이 추가됩니다. 이는 지휘자보다는 기악 연주자에게, 그리고 연주자보다는 성악가에게 더 가혹하게 다가오기 마련이지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신체적 기능의 저하는 한 음악가가 전성기에 선보일 수 있었던 빛나는 기교를 어느 정도 퇴보시키며, 연주 중 실수가 나올 가능성을 높입니다. 또한, 악보를 외우는 것에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지요. 10년 전 당시 71세의 폴리니가 연주했던 <황제 협주곡>을 떠올려보면, 맑고 빛나는 음색과 유창한 흐름이 감탄을 불러일으켰지만, ‘폴리니’라는 이름에 썩 어울리지 않는 적지 않은 미스터치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청중들은 그의 연주에 큰 박수를 보냈지만, 만일 젊은 연주자가 <황제 협주곡> 연주에 이 정도의 미스터치를 냈다면 어땠을까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지요.
고령의 나이가 되며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신체적 기능의 저하와 이것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점들은 사실 그 누구보다도 음악가 자신이 잘 알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많은 고령의 음악가들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P. Casals, 1876-1973)는 96세로 사망했던 1973년까지 지휘자로서 무대에 올랐습니다. 케네디(J. F. Kennedy, 1917-1963) 대통령 앞에서 연주해 화제를 모았던 1961년 백악관 리사이틀 당시 그의 나이는 84세였죠. 바이올리니스트 나탄 밀스타인(N. Milstein, 1904-1992)은 1986년 82세의 나이에 결국은 마지막이 된 리사이틀에서 연주했습니다. ‘결국은 마지막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그 리사이틀 당시 느꼈던 왼손 엄지 손가락 통증으로 인해 은퇴의 수순을 밟아야 했기 때문이지요. 만약 불의의 부상이 없었더라면 그의 커리어는 조금 더 연장되었을 것입니다. 얼마 전 9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피아니스트 메나헴 프레슬러(M. Pressler, 1923-2023)는 90세를 훌쩍 넘긴 나이에도 현역으로 활동했는데, 2013년 90세의 나이에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처음 공연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왜 고령의 음악가들은 무대에 오를까요? 지극히 단순한 혹은 너무 이상적이기만 한 대답일 수 있으나, 그들이 지난 수십 년간 연주하고 지휘해 왔음에도, 청중에게 전달하고 싶은 무언가가 여전히 그들의 마음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 무언가는 세월이 흘러간다고 저절로 생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애쓰고 끈질기게 탐구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겠지요. 이 관점에서 볼 때, 누군가 고령의 카잘스에게 그가 계속해서 연습하는 이유를 묻자 그가 한 대답 “왜냐하면 내가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는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오랜 세월 음악을 위해 애쓴 음악가들의 무대를 만나는 것은 진정 설레고 벅찬 일입니다. 젊은 시절의 빛나는 화려함은 다소 옅어졌을지라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무르익어간 그들의 음악은 여전히, 아니 어쩌면 그들의 젊은 시절의 음악보다 더 우리를 매료시킵니다. 고령의 나이에 무대에서 음악에 몰입하는 모습은 우리를 숨죽이게 하지요. 고령의 음악가들이 선보이는 가슴 벅찬 무대를 더 풍성하게 접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추천영상: 2019년 77세의 폴리니가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 2악장입니다. 40여년 전에 그가 같은 작품을 녹음한 음반이 오래도록 명반이라고 불리우는 가운데,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새롭게 녹음했지요. 주제와 변주로 이루어진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의 마지막 악장을 풍부하고 생생하게 이끌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중간중간 보여지는 음악에 몰입한 그의 표정이 감동적이기도 하지요. 지난해와 올해 연이어 무산된 그의 내한공연이 다시 성사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J6WFV2J5LY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