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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의 매력이 더해질 때
박병준
입력 2023-03-10 11:06 수정 최종수정 2023-03-10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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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의 매력이 더해질 때

연극과 오페라 그리고 뮤지컬 등 무대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조명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조명은 때로 무대 전체를 형형색색의 빛깔로 화려하게 수를 놓기도 하고, 때로는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 주인공에게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며 청중의 모든 시선을 한 곳으로 모으기도 하지요. 반면, 극음악이 아닌 성악이나 기악 음악이 연주되는 공연에서 조명의 역할은 많은 경우 제한적입니다. 이 경우 조명은 무대와 청중석의 밝기를 각각 알맞게 조절해주는 정도의 역할에 그치지요. 물론 좋은 공연을 위해서 이러한 조명의 역할은 필수적이지만, 일반적으로 음악회에서 조명이 기억에 남지는 않을 것입니다. 연주자와 청중 모두에게 말이지요.

그런데, 조명의 매력이 음악에 더해질 때 굉장히 멋진 공연이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이 사례들은 크게 두 가지 경우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작곡가가 작품의 구성에 조명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지시한 경우와 반대로 작곡가는 조명에 대해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지만 연주자가 판단하여 음악의 흐름에 조명을 더한 경우입니다.

우선, 첫번째 경우를 살펴볼까요? 두 대의 솔로 바이올린과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시닛케(A. Schnittke, 1934~1998)의 작품 ‘하이든 식의 모츠-아트 (Moz-Art à la Haydn)’는 무대가 어두운 가운데 조용히 시작됩니다. 그러다 점차 커져간 음악이 격렬해질 때 무대가 갑자기 환하게 밝혀지죠. 보통의 연주회처럼 밝은 조명 아래에서 진행되는 음악이 어느덧 마무리될 즈음, 연주자들이 한 두 명씩 무대에서 퇴장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하이든(J. Haydn, 1732-1809)이 작곡한 ‘고별 교향곡’의 마지막을 연상하게 하는 장면인데 이 때 조명도 서서히 어두워지고 끝내 무대는 다시 캄캄해 집니다.
1977년 작곡된 이 작품에서 조명이 음악의 흐름에 따라 밝기가 조절되는 것이라면, 음악의 흐름에 따라 색채의 변화를 꾀한 작품도 있습니다.

바로 1910년 완성된 스크리아빈(A. Scriabin, 1872~1915)의 교향시 ‘프로메테우스, 불의 시 (Prométhée. Le Poème du feu, Op. 60)’ 입니다. 대규모 오케스트라에 합창까지 등장하는 커다란 편성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악보에는 독특한 파트가 존재합니다. 바로 ‘색채 키보드(Tastiera per luce)’ 파트입니다. 색채 키보드는 건반을 누르면 특정한 색을 비추는 기능을 지닌 악기를 의미합니다. 악보에 표기된 음을 누르면 특정 색을 비추는 것이지요. 악기라기보다는 장치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데 이 작품이 초연되었던 1911년 당시에는 스크리아빈의 이상에 맞는 악기가 존재하지 않았고 결국 이 파트를 제외한 채 초연되었습니다. 

스크리아빈은 음악과 색채의 조합이 이루어진 공연을 보지 못한 채 1915년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세월이 흐르며 조명 기술은 발달했고 이를 이용하여 다양한 색채를 음악의 흐름에 따라 연주홀 전체에 수놓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다만, 색채 키보드 파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색채와 관련하여 스크리아빈의 정확한 의도를 알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 파트는 대부분 두 음으로 된 화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렇다면 동시에 두 색채를 어떤 방식으로 내야하는지 의문이 있는것이지요. 만일 스크리아빈이 오늘날처럼 그의 음악이 근사한 색채의 조명과 함께 공연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면 그의 이상을 더 명확하게 실현시킬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2010년 예일 대학교 심포니 홀에서 공연된 스크리아빈의 ‘프로메테우스’
(출처: https://activetheory2100.com/mysticchord.html)


위와 같은 경우와는 반대로, 작곡가는 조명에 대한 지시를 하지 않았는데 연주자의 판단으로 조명을 더해 멋진 공연을 창조해낸 사례로는 어떤 것을 들 수 있을까요? 예전에 아바도(C. Abbado, 1933-2014)가 말러(G. Mahler, 1860~1911)의 교향곡 9번을 지휘하면서 음이 점차 사라져가며 끝나는 4악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조명을 점점 어둡게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음악이 끝났을 때 연주홀에 있는 모두가 어두움 속에서 청각적, 그리고 시각적 고요에 휩싸이게 되었지요.

보다 적극적이며 정말 굉장하다는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사례로는 노르웨이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던 쇤베르크(A. Schönberg, 1874~1951)의 ‘정화된 밤 (Verklärte Nacht, Op. 4)’ 공연을 들 수 있습니다. 원래 현악6중주 편성인 이 작품은 독일의 시인 데멜(R. Dehmel, 1863-1920)의 시 ‘두 사람 (Zwei Menschen)’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곡되었고 음악은 시의 내용을 따라갑니다. 시는 달빛이 비치는 숲을 걷고 있는 두 남녀의 이야기인데 여자가 남자에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였다고 고백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용서하며 그 아이를 받아들이겠다고 답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노르웨이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공연에서는 이 모든 이야기가 시간적으로는 밤에, 공간적으로는 숲 속에서 일어난 것을 나타내듯 기본적으로 굉장히 어두운 조명을 채택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황량하고 스산한 숲길을 거닌다는 구절을 음으로 옮긴 시작부분은 청중이 연주자의 모습조차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의 어둠이 깔려 있지요. 그리고, 어두운 가운데 조명의 밝기나 색채가 시의 내용에 맞춰 변화됩니다. 예를 들어, 여자의 고백을 들은 남자가 여자를 용서하며 아이를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지점에서 차가운 느낌의 푸르스름한 조명이 따스한 느낌의 붉은 색 계통의 조명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보통 이렇게 어두운 무대에서는 연주자들이 악보를 보기 위해 보면대에 작은 램프를 설치하는데 이 공연에서는 그 램프의 빛조차 없애고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연주자들이 25분이 넘게 걸리는 이 변화무쌍한 곡을 모두 외워서 연주하였습니다. 그것도 지휘자 없는 공연에서 말입니다. 연주자들이 보통의 이 작품 공연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한 것인데 이 대담한 시도 끝에 탄생한 공연을 직접 현장에서 접한 청중들은 음악을 감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체험하는 수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조명의 매력을 음악에 담는 시도는 물론 잘못하면 억지스럽고 유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이루어진다면 정말 커다란 매력을 지닌 공연 및 영상이 탄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주홀이나 영상 매체를 통해 우리는 음악을 듣지만 동시에 보기도 하니까요. 조명의 매력을 음악에 제대로 더하여 음악 자체도 더 빛나는 공연 및 영상이 앞으로 더 많이 제작되기를 바래봅니다.

추천영상: 본문에서 언급한 노르웨이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쇤베르크 ‘정화된 밤’ 공연 영상입니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영상인데, 강약의 진폭을 더 무리없이 잡아내지 못한 음향이 조금 아쉽습니다. 되도록 큰 화면으로 그리고 어두운 방 안에서 감상한다면 이 공연의 진가를 조금 더 맛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연주자들의 노력과 악장의 빈틈없는 리드, 섬세한 조명 조절과 치밀한 기획까지 보면 볼수록 많은 부분에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영상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h5Xc-rUef4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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