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개봉한 ‘아바타: 물의 길’(감독 제임스 카메론, 2022)의 스크린 점령에도 불구하고 해를 넘기면서까지 꾸준히 관객을 불러모으고 있는 한국영화가 있다. ‘영웅’(감독 윤제균, 2022)은 2009년 초연된 동명의 창작뮤지컬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으로, 개봉 안중근 의사의 최후 1년을 담고 있다.
한국에서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들이 크게 성공을 거둔바 있는 만큼 한국에서도 뮤지컬 영화 제작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던 상황에서 ‘영웅’은 일종에 시험대에 오른 작품이다. ‘인생은 아름다워’(감독 최국희, 2022)가 본래 인기 있던 대중음악들을 삽입한 일명 ‘주크박스 뮤지컬’이었다면 ‘영웅’은 이 각본만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뮤지컬 ‘영웅’은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공연으로 무대 규모면에서도 영화의 블록버스터급이라 할 수 있으며, 장중한 음악과 화려한 안무로 10년 넘게 뮤지컬 팬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영화 ‘영웅’에는 오상준 작곡가가 작곡한 31곡의 넘버 중 16곡이 그대로 담겼다. 영화 초반부의 ‘단지동맹’은 비장하고, 조마리아 여사가 부르는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도 심금을 울리지만 안중근 의사가 ‘누가 죄인인가’를 열창하는 부분은 공연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불리한 재판 중에도 당당하게 임하는 도마의 모습을 강조해 연출되었다. ‘누가 죄인인가’는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 하나하나가 정확히 관객들에게 박히도록 한 곡 안에서 박자의 변화를 많이 준 곡으로, 뮤지컬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인상적인 넘버로 꼽힌다.
사실, 연출적으로는 전체적으로 아쉽다. 신과 신 사이가 잘 붙지 않는 부분이 많고, 노래 장면에서 카메라 워크도 진부하며, 편집은 제 기능을 잃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검증된 뮤지컬을 영상화시켜 관객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과 뮤지컬 장르에 적합한 배우들을 기용해 음악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점에서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배고픔을 다 달래주지 못한 첫 술의 아쉬움은 뒤로 하고, 좀 더 세련되게 다듬어진 다음 뮤지컬 영화를 기다려 본다.
윤성은의 Pick 무비
새로운 이야기를 향한 기다림, ‘3000년의 기다림’
어른이 되어서도 종종 알라딘, 아니 지니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현실의 고달픔 때문일 것이다. 알라딘을 처음 접했던 유년기에는 알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었던 일상의 무게, 그저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의 버거움이 어깨를 짓눌러올 때 우리는 간절히 지니를 불러본다. 부귀영화를 다 누렸을 법한 노장 감독도 별반 다르지 않은 걸까.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수식어가 잘 들어맞는 ‘3000년의 기다림’(2022)은 팔순이 멀지 않은 할리우드의 거장, 조지 밀러 감독이 강렬한 SF 액션 판타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 이후 처음 내놓은 신작이다. 가족영화인 ‘꼬마 돼지 베이브’나 ‘해피 피트’ 시리즈도 연출한 바 있으니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왜 지금, 램프 속의 지니를 불러냈을까.
‘알리테아’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에 통달한 서사학자다. 그녀는 새롭고 강렬한 이야기를 갈구하면서도 이미 평생을 함께 한 수많은 이야기들에 지쳐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어느 날 그녀는 이스탄불에 출장을 갔다가 사연이 많아 보이는 유리병 하나를 사게 되는데, 그 안에 갇혀있던 ‘진’이 봉인해제 되고 만다. 그녀가 소원을 빌어야만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진에게 알리테아는 그간의 사연을 묻고, 진은 자신이 3000년 동안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여기서 진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허구다.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은 성경에 등장하고, 무스타파와 그의 아버지, 그리고 무라드와 이브라힘 형제는 오스만 제국 때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즉, 진은 실제 있었던 사건에 판타지를 가미해 흥미로운 서사로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현대 창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삶의 낙으로 삼는 수용자(독자, 관객 혹은 시청자)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이다. 요정에게 소원을 비는 이야기는 모두 현재에 충실하라는 교훈으로 끝난다며 소원 빌기를 거부하던 알리테아 또한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진의 카리스마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특히, 진의 사랑 이야기는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어떤 순애보 보다 강하고 깊어서 알리테아는 마침내 진심으로 소원을 빈다. 진의 사랑을 받고 싶다고. 진은 그녀가 평생 연구해온 이야기의 원천이자 이야기 자체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알리테아는 진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스스로 거대한 서사의 일부이자 주체가 된다.
전세계에서 만들어지는 문화 콘텐츠를 순식간에 안방에 들여다 놓을 수 있는 시대지만 신선한 이야기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지고 있다. 평생 온갖 이야기를 상상해온 노장 감독에게 ‘3000년의 기다림’은 어쩌면 그 욕구의 절정에서 기획된 작품일지 모르겠다. 진과 알리테아의 사랑은 연인간의 로맨스일 뿐 아니라 매혹적인 콘텐츠에 대한 창작가와 수용자의 열정으로도 읽힌다. 이 새로운 스타일의 블록버스터 또한 누군가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지난 연말 개봉한 ‘아바타: 물의 길’(감독 제임스 카메론, 2022)의 스크린 점령에도 불구하고 해를 넘기면서까지 꾸준히 관객을 불러모으고 있는 한국영화가 있다. ‘영웅’(감독 윤제균, 2022)은 2009년 초연된 동명의 창작뮤지컬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으로, 개봉 안중근 의사의 최후 1년을 담고 있다.
한국에서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들이 크게 성공을 거둔바 있는 만큼 한국에서도 뮤지컬 영화 제작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던 상황에서 ‘영웅’은 일종에 시험대에 오른 작품이다. ‘인생은 아름다워’(감독 최국희, 2022)가 본래 인기 있던 대중음악들을 삽입한 일명 ‘주크박스 뮤지컬’이었다면 ‘영웅’은 이 각본만을 위해 만들어진 음악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뮤지컬 ‘영웅’은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공연으로 무대 규모면에서도 영화의 블록버스터급이라 할 수 있으며, 장중한 음악과 화려한 안무로 10년 넘게 뮤지컬 팬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영화 ‘영웅’에는 오상준 작곡가가 작곡한 31곡의 넘버 중 16곡이 그대로 담겼다. 영화 초반부의 ‘단지동맹’은 비장하고, 조마리아 여사가 부르는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도 심금을 울리지만 안중근 의사가 ‘누가 죄인인가’를 열창하는 부분은 공연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불리한 재판 중에도 당당하게 임하는 도마의 모습을 강조해 연출되었다. ‘누가 죄인인가’는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목 하나하나가 정확히 관객들에게 박히도록 한 곡 안에서 박자의 변화를 많이 준 곡으로, 뮤지컬에서도 가장 유명하고 인상적인 넘버로 꼽힌다.
사실, 연출적으로는 전체적으로 아쉽다. 신과 신 사이가 잘 붙지 않는 부분이 많고, 노래 장면에서 카메라 워크도 진부하며, 편집은 제 기능을 잃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검증된 뮤지컬을 영상화시켜 관객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과 뮤지컬 장르에 적합한 배우들을 기용해 음악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점에서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배고픔을 다 달래주지 못한 첫 술의 아쉬움은 뒤로 하고, 좀 더 세련되게 다듬어진 다음 뮤지컬 영화를 기다려 본다.
윤성은의 Pick 무비
새로운 이야기를 향한 기다림, ‘3000년의 기다림’
어른이 되어서도 종종 알라딘, 아니 지니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현실의 고달픔 때문일 것이다. 알라딘을 처음 접했던 유년기에는 알지도 못했고 알 수도 없었던 일상의 무게, 그저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의 버거움이 어깨를 짓눌러올 때 우리는 간절히 지니를 불러본다. 부귀영화를 다 누렸을 법한 노장 감독도 별반 다르지 않은 걸까.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수식어가 잘 들어맞는 ‘3000년의 기다림’(2022)은 팔순이 멀지 않은 할리우드의 거장, 조지 밀러 감독이 강렬한 SF 액션 판타지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 이후 처음 내놓은 신작이다. 가족영화인 ‘꼬마 돼지 베이브’나 ‘해피 피트’ 시리즈도 연출한 바 있으니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왜 지금, 램프 속의 지니를 불러냈을까.
‘알리테아’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에 통달한 서사학자다. 그녀는 새롭고 강렬한 이야기를 갈구하면서도 이미 평생을 함께 한 수많은 이야기들에 지쳐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어느 날 그녀는 이스탄불에 출장을 갔다가 사연이 많아 보이는 유리병 하나를 사게 되는데, 그 안에 갇혀있던 ‘진’이 봉인해제 되고 만다. 그녀가 소원을 빌어야만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진에게 알리테아는 그간의 사연을 묻고, 진은 자신이 3000년 동안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여기서 진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허구다.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은 성경에 등장하고, 무스타파와 그의 아버지, 그리고 무라드와 이브라힘 형제는 오스만 제국 때 실존했던 인물들이다. 즉, 진은 실제 있었던 사건에 판타지를 가미해 흥미로운 서사로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현대 창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삶의 낙으로 삼는 수용자(독자, 관객 혹은 시청자)들이 가장 갈망하는 것이다. 요정에게 소원을 비는 이야기는 모두 현재에 충실하라는 교훈으로 끝난다며 소원 빌기를 거부하던 알리테아 또한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진의 카리스마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특히, 진의 사랑 이야기는 그녀가 알고 있던 그 어떤 순애보 보다 강하고 깊어서 알리테아는 마침내 진심으로 소원을 빈다. 진의 사랑을 받고 싶다고. 진은 그녀가 평생 연구해온 이야기의 원천이자 이야기 자체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알리테아는 진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스스로 거대한 서사의 일부이자 주체가 된다.
전세계에서 만들어지는 문화 콘텐츠를 순식간에 안방에 들여다 놓을 수 있는 시대지만 신선한 이야기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지고 있다. 평생 온갖 이야기를 상상해온 노장 감독에게 ‘3000년의 기다림’은 어쩌면 그 욕구의 절정에서 기획된 작품일지 모르겠다. 진과 알리테아의 사랑은 연인간의 로맨스일 뿐 아니라 매혹적인 콘텐츠에 대한 창작가와 수용자의 열정으로도 읽힌다. 이 새로운 스타일의 블록버스터 또한 누군가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