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를 지나며 해가 점점 길어지고 새해도 밝았지만 올겨울은 여전히, 유독 춥다. 응달이나 산비탈의 눈도 좀처럼 녹지 않고, 웅크린 사람들의 어깨도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칼바람 속에서 매화가 얄팍한 꽃받침 한 겹 여미고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역경을 이겨내고 향기를 이루는 인내와 투지의 꽃. 바야흐로 매화의 계절이 오고 있다.
중국 송나라 때의 사람 임포는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고산에 초가를 지어 은거하며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로 삼은 '매처학자(梅妻鶴子)'의 삶을 살았다 전해진다. 집 주변에 매화를 심고 학과 사슴을 기르며, 꽃이 피면 시를 짓고 사슴에게 술심부름을 시켰다는 은둔거사. 임포의 삶을 동경하여 그를 소재로 그린 ‘매화초옥도’, ‘매화서옥도’ 등이 조선에서도 유행하였다고 한다.
△ 전기, 매화초옥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용미의 시 ‘나의 매화초옥도’는 그중, 전기(田琦, 1825~1854)가 그린 ‘매화초옥도’를 묘사하고 있다. ‘천 리 밖 은은하게 번지는 서늘한 향을 듣는 이는 오직 그대뿐’이라 읊은 시인은 그림을 보며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를 함께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초옥의 창가에 피리를 불며 앉아 있는 녹의(綠衣)의 선비는 오경석이다. 거문고를 둘러메고 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오는 붉은 옷의 사내는 전기, 자신일 테다. 눈 덮인 길을 걸어 산속에 있는 벗을 만나러 가는 모습을 그렸다. 찾아가는 이나 기다리는 이, 누구의 마음으로 보아도 만개한 매화만큼 환해지는 풍경이다.
퇴계 이황 역시 매화를 지극히 아꼈음을 그가 남긴 글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매화를 소재로 한 시만 100여 편이 남아 있는데, 『열흘 가는 꽃 없다고 말하지 말라』는 그중 94편을 고르고 옮겨 다듬고 그림을 더해 낸 책이다. 십여 년 전 퇴계학자 김기현과 시인 안도현, 화가 송필용이 의기투합하여 엮었다. 퇴계 선생의 시에서 매화는 그의 시름을 덜어주는, 더할 나위 없는 벗으로 묘사되어 있다.
옛 사람들의 글과 그림에서 매화는 선비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꽃이지만, 노래 ‘매화타령’에서는 그 화자가 여인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좋구나 매화로다. 어야 더야 어허야 에-디여라 사랑도 매화로다
인간 이별 만사 중에도 독수공방이 상사난(相思難)이란다
어저께 밤에도 나가 자고 그저께 밤에도 구경 가고 무삼 염치로 삼승 버선에 볼받아 달람나
나 돌아감네 에에헤 나 돌아감네 떨떨거리고 나 돌아가노라
좋구나 매화로다. 어야 더야 어허야 에-두견이 울어라 사랑도 매화로다 - 경기 민요 ‘매화타령’ 중
한 여인이 홀로 앉아 버선을 기우고 있다. 노란 봄볕이 환한 마당에는 매화 꽃잎이 난분분하다. 드문드문 고개를 들어 꽃 구경을 하자니 심화가 인다. 어쩌면 방안에는 어제도 그제도, 밤마다 밖으로 나돈 인사가 쿨쿨 자고 있을지 모른다. ‘나도 확 나가버릴까 보다’ 하는 으름장도 혼잣말로 놓아본다. 후렴구는 마치 ‘사랑도 한때로다’라고 하는 것 같다.
경기 민요 명창들뿐 아니라 하춘화나 김세레나 등 대중가수들이 부른 ‘매화타령’의 음원도 여러 개다. 두 번째달이 현대적으로 편곡한 ‘매화타령’은 반주 악기를 적게 편성해 송소희의 노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매화야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를 온다
옛 피었던 가지마다 피엄즉도 허다마는
춘설이 하 분분허니 필지 말지 허노매라 - 가사 '매화가' 중
정가로 분류되는 십이가사 중에도 ‘매화타령’이 있다. ‘매화가’로도 불리는 이 노래는 처음 세 구절을 빼고는 매화와 무관한 노랫말로 이어지지만 이 역시 애타는 연심과 시름을 내용으로 한다. 국가무형문화재 가사 보유자 이준아가 2021년 발매한 「12가사집」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2019년과 2020년 두 차례 나온 컴필레이션 앨범 「아우름 소리」에는 각각 다르게 편곡한 ‘매화가’를 이윤진과 박진희가 불러 담았다.
퇴계 선생의 ‘재방도산매’ 4절 마지막 두 구를 김기현 선생은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
只今人境雖非舊 지금인경수비구 / 那忍風流墮杳然 나인풍류타묘연
오늘날 세상은 옛날 같지 않지만 / 그러한 풍류를 어찌 차마 버릴 수 있을까
계절을 완상하여 글로 그림으로 노래로 남기고, 그와 더불어 시름을 달랬던 조상들의 풍류가 아득하고도 향기롭다.
<필자소개>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동지를 지나며 해가 점점 길어지고 새해도 밝았지만 올겨울은 여전히, 유독 춥다. 응달이나 산비탈의 눈도 좀처럼 녹지 않고, 웅크린 사람들의 어깨도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칼바람 속에서 매화가 얄팍한 꽃받침 한 겹 여미고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역경을 이겨내고 향기를 이루는 인내와 투지의 꽃. 바야흐로 매화의 계절이 오고 있다.
중국 송나라 때의 사람 임포는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고산에 초가를 지어 은거하며 매화를 아내로, 학을 아들로 삼은 '매처학자(梅妻鶴子)'의 삶을 살았다 전해진다. 집 주변에 매화를 심고 학과 사슴을 기르며, 꽃이 피면 시를 짓고 사슴에게 술심부름을 시켰다는 은둔거사. 임포의 삶을 동경하여 그를 소재로 그린 ‘매화초옥도’, ‘매화서옥도’ 등이 조선에서도 유행하였다고 한다.
△ 전기, 매화초옥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용미의 시 ‘나의 매화초옥도’는 그중, 전기(田琦, 1825~1854)가 그린 ‘매화초옥도’를 묘사하고 있다. ‘천 리 밖 은은하게 번지는 서늘한 향을 듣는 이는 오직 그대뿐’이라 읊은 시인은 그림을 보며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를 함께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초옥의 창가에 피리를 불며 앉아 있는 녹의(綠衣)의 선비는 오경석이다. 거문고를 둘러메고 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오는 붉은 옷의 사내는 전기, 자신일 테다. 눈 덮인 길을 걸어 산속에 있는 벗을 만나러 가는 모습을 그렸다. 찾아가는 이나 기다리는 이, 누구의 마음으로 보아도 만개한 매화만큼 환해지는 풍경이다.
퇴계 이황 역시 매화를 지극히 아꼈음을 그가 남긴 글들을 통해 알 수 있다. 매화를 소재로 한 시만 100여 편이 남아 있는데, 『열흘 가는 꽃 없다고 말하지 말라』는 그중 94편을 고르고 옮겨 다듬고 그림을 더해 낸 책이다. 십여 년 전 퇴계학자 김기현과 시인 안도현, 화가 송필용이 의기투합하여 엮었다. 퇴계 선생의 시에서 매화는 그의 시름을 덜어주는, 더할 나위 없는 벗으로 묘사되어 있다.
옛 사람들의 글과 그림에서 매화는 선비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꽃이지만, 노래 ‘매화타령’에서는 그 화자가 여인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좋구나 매화로다. 어야 더야 어허야 에-디여라 사랑도 매화로다
인간 이별 만사 중에도 독수공방이 상사난(相思難)이란다
어저께 밤에도 나가 자고 그저께 밤에도 구경 가고 무삼 염치로 삼승 버선에 볼받아 달람나
나 돌아감네 에에헤 나 돌아감네 떨떨거리고 나 돌아가노라
좋구나 매화로다. 어야 더야 어허야 에-두견이 울어라 사랑도 매화로다 - 경기 민요 ‘매화타령’ 중
한 여인이 홀로 앉아 버선을 기우고 있다. 노란 봄볕이 환한 마당에는 매화 꽃잎이 난분분하다. 드문드문 고개를 들어 꽃 구경을 하자니 심화가 인다. 어쩌면 방안에는 어제도 그제도, 밤마다 밖으로 나돈 인사가 쿨쿨 자고 있을지 모른다. ‘나도 확 나가버릴까 보다’ 하는 으름장도 혼잣말로 놓아본다. 후렴구는 마치 ‘사랑도 한때로다’라고 하는 것 같다.
경기 민요 명창들뿐 아니라 하춘화나 김세레나 등 대중가수들이 부른 ‘매화타령’의 음원도 여러 개다. 두 번째달이 현대적으로 편곡한 ‘매화타령’은 반주 악기를 적게 편성해 송소희의 노래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매화야 옛 등걸에 봄철이 돌아를 온다
옛 피었던 가지마다 피엄즉도 허다마는
춘설이 하 분분허니 필지 말지 허노매라 - 가사 '매화가' 중
정가로 분류되는 십이가사 중에도 ‘매화타령’이 있다. ‘매화가’로도 불리는 이 노래는 처음 세 구절을 빼고는 매화와 무관한 노랫말로 이어지지만 이 역시 애타는 연심과 시름을 내용으로 한다. 국가무형문화재 가사 보유자 이준아가 2021년 발매한 「12가사집」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2019년과 2020년 두 차례 나온 컴필레이션 앨범 「아우름 소리」에는 각각 다르게 편곡한 ‘매화가’를 이윤진과 박진희가 불러 담았다.
퇴계 선생의 ‘재방도산매’ 4절 마지막 두 구를 김기현 선생은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
只今人境雖非舊 지금인경수비구 / 那忍風流墮杳然 나인풍류타묘연
오늘날 세상은 옛날 같지 않지만 / 그러한 풍류를 어찌 차마 버릴 수 있을까
계절을 완상하여 글로 그림으로 노래로 남기고, 그와 더불어 시름을 달랬던 조상들의 풍류가 아득하고도 향기롭다.
<필자소개>
김보람 씨는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를 졸업했으며, 국립국악원에서 소식지 국악누리 제작을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