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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엘 김의 모멘텀 클래식  
편집부
입력 2022-06-23 16:57 수정 최종수정 2022-06-3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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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지휘자 전성시대를 일궈낸 거장 요르마 파눌라
 

마에스트로는 허름한 바지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종이를 꺼낸다. 버스 운행 시간표였다.
90에 가까운 고령의 나이에 빽백히 적힌 숫자가 가득한 시간표를 식별하기란 쉽지 않았을 터, 결국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다음 버스 도착시간을 알려드렸다. 영락없이 동네에서 흔히 마주치는 유럽 할배의 모습이다. 핀란드 소재 마에스트로의 집에 2~3일 머물며 그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세계적인 거장이라 불리는 분이 번거롭게 버스를 갈아타며 이동한다는 사실이 인상깊었다. 그의 집에서 잠시라도 불을 켜놓고 방을 비우면 전기세를 낭비할 수 없다는 불호령과 함께 소등 명령이 떨어졌다.

 요르마 파눌라

최근 명문악단들이 앞다퉈 영입하며 전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핀란드 지휘자들을 키워낸 마에스트로의 마에스트로 '요르마 파눌라(이하 파눌라)'는 이처럼 놀랄만치 소탈했다. 그가 주최한 콩쿠르 '요르마 파눌라 국제 지휘 콩쿠르'에 운좋게 입상한 덕에 그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KBS교향악단의 음악감독 피에타리 잉키넨,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음악감독 오스모 벤스케 모두 파눌라의 제자들이다. 어디 그뿐이랴, 에사페카 살로넨, 에사페카 사라스테, 산투 루발리, 사카리 오라모 등 수많은 그의 제자들이 세계 일류악단들의 수장을 맡고 있다.
 
예전에는 '지휘'하면 주빈 메타, 마리스 얀손스 등 거장 지휘자들이 수학했던 음악의 도시 빈을 떠올렸는데 이는 옛말이다. 굴지의 매니지먼트들도 언제부턴가 핀란드 지휘자들에게 눈독을 들이며 이례적으로 파눌라의 졸업생 연주회에 수많은 에이전트들을 보내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수많은 유럽의 나라들 중에 클래식의 전통적 주류로 볼 수 없는 핀란드가 배출한 지휘자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현상을 의아해한다. 하지만 핀란드 지휘계의 부흥을 이끈 파눌라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고개가 끄덕여지는 몇가지 시사점이 있었다.
 
핀란드 음악도들의 뛰어난 음악적 역량을 얘기할 때 지리적 근거를 들기도 한다.
북유럽의 자연과 더불어 시끌벅적한 엔터테인먼트가 없는 나라다 보니 깊이 있는 음악적 접근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있다는 것이다. 파눌라는 우스갯소리로 취미로 할 수 있는 거라곤 숲에 나가 나무를 베어 장작을 패는 것이라고 얘기하곤 했는데 단순화된 삶의 패턴 속에 심플하고 깊이있게 사고하게 만드는 환경적인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가 항상 내게 부르짖던 말은 '지휘대에 올라가면 음악만 생각하라'였다. 본질을 깊이 탐구하고 외적인 불필요한 요소는 배제하라는 그의 주장은 늘 한결같았다.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한국의 마에스트로 성시연은 "무엇보다 앞서 음악을 생각하라"는 그의 말을 가장 기억에 남는 조언으로 꼽았다.
 
'동료끼리 경쟁하지 말고 서로 도와줘야 함께 성공한다'는 파눌라의 지론 또한 그 결과가 증명해준다. 각자도생에 익숙한 지휘계에서 핀란드 지휘자들은 동료 뿐 아니라 후배들도 살뜰히 챙기는 모습을 많이 봐왔다. 현재 영국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핀란드의 젊은 지휘자 루발리와 콩쿠르에서 만난 인연으로 그의 선배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의 성공적인 커리어 뒤에는 늘 선배들의 도움이 컸다며 자신을 헬싱키에서 어시스턴트로 기용해줬으며 에이전트 계약에 도움을 준 세계적인 핀란드 지휘자 사카리 오라모를 자주 언급했다. 마찬가지로 핀란드의 세계적 거장 에사 페카 살로넨의 영국 집에 드나들며 아낌없는 음악적 조언을 얻었다는 덧붙임과 함께. 현재 그는 그의 선배 살로넨이 몸 담았던 팔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이다. 선후배가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며 기회를 만들고 무대에 세워주는 그들의 문화는 본받을 만하다.
 
얀텔라겐이란 단어를 들어보았는가? 북유럽의 공통된 정서라고 볼 수 있는 이 단어는 '얀텔의 법칙(Jante law)'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을 타인보다 높게 여기지 않는 겸손의 미덕이다. '허세'의 반대 개념으로 볼 수 있고 요즘의 플렉스 문화와는 거리가 있다. 민주화된 소통방식에 익숙한 요즘의 단원들에게 핀란드 지휘자들의 수평적인 행동양식은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옆에서 지켜본 세계적인 거장이자 교육자인 파눌라에게서 조금의 권위의식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소탈하고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한다. 하지만 문화는 수평적이되 의사결정은 수직적일 수 밖에 없는 지휘의 특성상 음악적인 부분에 있어 의사표현은 매우 명확하고 간결한 방식을 강조한다. 이러한 가르침을 물려받은 핀란드의 지휘자들이 현시대의 리더십에 있어 각광받는다는 사실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덧붙여 십대부터 지휘에 입문하여 차근차근 기초와 자질을 쌓아가는 핀란드의 특화된 교육시스템이 핀란드가 한발 앞서 지휘강국이 될 수 밖에 없는 원동력이라고 입을 모은다. 빈 국립음대 지휘과 재학시절, 대부분의 학생들이 평균적으로 30대 즈음에 지휘에 입문하는데 반해 핀란드는 파격적으로 이른 나이에 기악연주와 더불어 지휘도 병행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현재 핀란드가 일군 지휘 왕국은 축적된 예술교육 인프라의 산물이다.
 
세계 최고의 악단으로 불리우는 로얄 콘세르트 헤바우 오케스트라는 파격적으로 차기 상임지휘자로 26세의 젊은 핀란드 지휘자 클라우스 메캘래((Klaus Mäkelä)를 점 찍었다. 그 또한 파눌라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다. 제자 자랑 한번 할법한데 언제나 그랬듯 파눌라는 '그에게 잘된 일'이라고 무심하게 한마디 툭 던질 뿐이다. 참으로 그답다.
 
<필자소개>
아드리엘 김은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에서 지휘와 바이올린을 전공, 졸업(석사)했으며 도이치 방송 교향악단 부지휘자와 디토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역임한바 있다, 현재는 지휘자, 작곡가, 문화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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