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행기

약업닷컴 홈 > 팜플러스 > 문화

백두산, 고구려 유적지 답사 下

잊혀져가는 뿌리를 찾아서

기사입력 2006-07-24 09:28     최종수정 2006-09-20 20:00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 부산대 약대 약학부 성윤경
오녀산성은 직접 올라가보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서 우리는 지나는 길에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통화시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곳은 인삼의 고향이고 포도주가 특히 유명한 곳이다.

저녁거리 구경을 나가보니 중국은 오후 8시 정도면 거의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그마한 구멍가게 같은 곳에서 여러 가지 스넥을 사먹기도 하고 길거리를 배회하여 보았다. 신호등에는 초를 세는 카운터기가 따로 달려있어서 몇 초 후에 빨간불로 바뀌는지 파란불이 켜져서 건너는 시간은 몇 초가 확보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차량들이 보는 신호등에도 마찬가지로 카운터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서의 우체통보다 훨씬 큰 중국우체통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하루가 끝날 때쯤 침대열차를 타러 갔다. 이 열차의 일부 칸은 3단 침대로 되어 있었는데 제일 아랫단은 성인이 앉아 있을 수 있지만 그 위의 두 칸은 아랫단의 2/3 정도의 높이였다. 열차를 타고 밤새 달려서 백두산의 관문인 이도백하 역에 도착했다.

장백산입구에서 셔틀을 타고 곧게 뻗은 숲길을 지나서 다시 짚차를 갈아타고 백두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천문봉에 올랐다.

백두산은 이름의 유래가 두 가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백 번가서 두 번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눈이 많아서 머리가 희다는 데서 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천문봉으로 오르는 길에는 흰 자작나무가 많이 있었다. 그리고 두 그루가 같이 크고 죽는다는 주목나무도 볼 수 있었다.

장백산 입구에서 백두산 천지까지는 서식 식물종의 변화를 확인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차를 타고 출발하여 반쯤 갔을 때까지는 앞에서 언급한 나무들이 많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짧은 풀들만 보이더니 천문봉에 더 가까워지니까 황토만 가득했다. 백두산 천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올라갔는데 구름이 잔뜩 끼어서 반대편 봉우리가 잘 보이지 않았다. 바람도 엄청 불고 꽤 쌀쌀했다.

기념촬영을 하고서 차를 타러 내려가려고 할 즈음에 구름이 개이면서 짙푸른색을 띤 천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높은 곳에서 천지를 바라다보는 게 아쉬울 즈음에 우리는 북파 코스를 내려와서 서파로 다시 백두산에 올랐다.

서파로 가는 길에는 장백폭포가 그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원하게 세 줄기로 갈라져서 떨어지는 물을 보면 그 크기와 아름다움에 놀라게 된다.

이런 폭포를 지나서 천지호수까지 가는 길은 험난했다. 계단을 만들어두긴 했으나 급경사인 지점이 많고 여기저기 물이 새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계단이 없었다면 천지를 보러 가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해보니 이 것 조차 고마웠다. 힘들게 올라가서 천지를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높은 봉우리에서 본 푸른빛의 천지를 가까이 와서 보니 연못가에 작은 벌레가 너무 많아서 감히 손을 담가보기 힘들었다. 천지 주위에는 상아색 꽃인 만병초가 많이 피어 있었다.

민족의 명산인 백두산을 반은 중국이 관리하고 있었다. 일제시대에 간도를 중국으로 편입시키면서 압록강의 발원지인 백두산의 반이 중국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백두산을 찾는 사람의 대부분이 한국 사람인데 그들 모두가 중국을 통해서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 날 다시 침대열차를 타고 통화시로 이동하였다. 다음 날 아침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집안(국내성)으로 갔다.

이동하는 중에 주말이라서 그런지 중국인 여러 쌍이 결혼식을 하고 풍선과 꽃으로 장식된 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중국의 결혼 풍속도 우리랑은 좀 다르다고 한다.

신랑이 신부 집에 찾아가서 돈이 든 봉투를 건네고 신부를 빨간 신을 신겨서 그 신에 흙이 안 묻게 아무리 높은 층수에 살더라도 직접 신부를 들거나 업어서 지상까지 내려온 다음 결혼식장으로 데리고 간다. 이 풍습은 신랑감 체력 테스트를 해보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비를 찾아갔다. 중국에서는 광개토대왕을 호태왕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광개토대왕릉비에 씌운 지붕의 현판도 호태왕비라고 적혀있다. 광개토대왕비는 그 높이가 13.1m나 되는 아주 큰 비석이다.

거기 쓰인 글씨는 깎일 대로 깎이고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악의적으로 바뀌고 정말 알아보기 힘들게 훼손된 상태였다. 비석 앞에는 그 것을 지키는 중국인 요원이 한 명 있었다. 중국인이 오면 직접 나서서 설명을 해주지만 우리 같은 한국인을 보면 경계의 눈초리를 하면서 앉아서 지키고 있다.

요즘 중국과의 외교 분쟁이 있어서 분위기가 더 심각해 졌다고 한다. 한국말도 잘 알아들어서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가이드의 주의 사항도 들은 터라 조심조심 구경하고 나왔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중국이 지키고 있으면서 잘 관리되고 있지도 않아 보이는 것을 중국 관광객에게는 설명하는 모습을 보자니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광개토대왕비를 관람 후에 근처에 있는 태왕릉을 보러 갔다. 돌산을 올라가니 좁다란 묘 입구가 드러났다. 그 안에는 큰 돌 두 덩이만 남겨져 있고 그 위엔 사람들이 얹어 둔 지폐들이 가득했다.

그 곳에도 역시 중국인 하나가 말없이 그 곳을 지키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전까지는 무덤 바로 옆까지 민가가 있던 것을 몇 해 전 중국이 동북공정을 시작하면서 그 주민들을 다 이전시키고 공원조성을 하면서 문화재 보존에 힘쓰고 있는 것이라 한다.

이 곳을 빠져나와 버스로 5분도 안 되는 거리를 이동하니 장수왕릉이 있었다.

장수왕릉은 화강암을 깎아 만든 7단의 피라미드형이다. 그 주위에는 커다란 돌을 뉘어놓았는데 한 면에 3개씩 12개를 두었으나 왕릉의 뒷면에는 돌 하나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4단까지 올라가면 입구에 닿을 수 있다. 태왕릉보다 천장이 높아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고 가운데는 역시 커다란 돌이 두 개 놓여 있다. 천장은 5 5m인 엄청나게 큰 통돌로 이루어져 있고 주위 벽도 2m에서 5m까지 아주 큰 돌로 벽돌 쌓듯이 쌓아놓았다. 벽화는 없었고 묘에 있던 유물들은 거의 도굴 당하고 나머지 몇 가지는 집안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묘의 우측으로 나와서 북한 쪽을 바라다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빌자면 7월 1일은 장날이라서 그런 것이라 하였다.

제련소에서 연기도 많이 나오고 활발한 농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장수왕릉의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후궁을 위한 무덤이 나온다. 장수왕릉의 1/10 정도의 규모이다. 그 다음 퉁하강으로 이동해서 424년 간 고구려 수도였던 국내성 성벽을 보았다. 대개는 중국 사람들이 사이사이 아파트를 지어 거의 없어지고 강가에 돌을 쌓아두었다는 정도만 파악할 수 있는 정도로 조금 남아있었다. 높이는 1.5m정도 되어 보였다.

고구려 유적지를 하루 동안 둘러보았다. 사전에 이에 관한 정보를 많이 알아두었더라면 더 많은 것이 보였을 텐데 그냥 눈도장만 찍고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든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재학시절 역사책으로 자주 접하긴 했지만 그래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고구려를 그 유물을 그 유적지를 우리 손으로 관리하지 못하고 중국이라는 남에게 이렇게 맡겨놓고 빌려서 보듯이 하고 있는 현실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다음 날은 중국에 처음 도착해서 가본 압록강변으로 다시 갔다. 유람선을 타고 북한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북한의 강변 유원지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압록강의 수심이 중국측에는 깊지만 북한측에는 사람이 꽤 먼 거리까지 걸어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얕은 모양이었다.

북한 주민 몇몇이 개울가에서 고기잡이하는 모양으로 고기를 잡고 있었고 유람선을 봐서 신이 난 아이들은 우리가 건넨 인사에 소리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대외 전시용격으로 만든 듯한 관람차는 주말인데도 운행을 하고 있지 않았고 몇몇 건물에는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사상 짙은 문구를 걸어 두기도 하였다. 압록강을 반쯤 건너다 마는 유람선 조망이 끝나고 우리는 고구려 천리장성의 시발점인 호산장성을 보러갔다. 호산장성에 올라 그 전체적인 모습을 보니 우리가 매체에서 자주 접할 수 있었던 만리장성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엄청난 규모로 성을 지어둔 것이다. 전체적으로 돌이 까맣게 보였는데 이 지역이 비가 자주 와서 마르지 못해 검은 것이라 한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패인 홈이 있는데 배수 시설용으로 아주 정갈하게 잘 다듬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조금 더 걸어가면 무기 저장고 같은 역할을 한 순서대로 명명된 창고가 나온다.

이런 곳을 한 10개정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장성의 머리부분에 다다르게 된다. 그 곳에 오르면 중국 쪽으로는 인삼밭이 보이고 북한 쪽으로는 넓은 논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내려와서 오른편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가면 일보화가 나온다.

북한 땅이 10걸음도 안되는 곳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갈 수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하루 넘게 걸려서 온 길을 다시 되돌아 집으로 왔다.

당초 예정했던 백두산 트래킹은 여정이 변경되었고 고구려 유적지 관람도 빡빡한 일정에 맞춰서 보느라 생각할 시간이 적었던 것 같다. 생각했던 것 보다 배, 버스, 그리고 기차로의 이동시간이 많았던 터라 모두 피곤했을 텐데 다들 그런 기색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끝까지 함께해서 좋았다.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 중국체험과 잊혀져 가는 우리 것을 열심히 살펴보고 온 데 의의를 두고자 한다. 여행을 위해 애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 전한다.
기사공유   트위터   페이스북   싸이공감   구글
독자 의견남기기

독자의견쓰기   운영원칙보기

(0/500자) 로그인

리플달기

댓글   숨기기

독자의견(댓글)을 달아주세요.

뉴스홈으로    이전페이지로    맨위로

인기기사    댓글달린기사    공감기사

실시간 댓글 더보기

구인    구직   매매

사람들 interview

“건선, 손발톱까지 깨끗하게…충분히 관리 가능”

건선은 오랫동안 치료하기 힘든 자가면역질환으로 ...

더보기

오피니언 더보기

의약정보 더보기

약업북몰    신간안내

약창춘추(藥窓春秋) 2

약창춘추(藥窓春秋) 2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전 식약청장)가 약업신문에 10...

이시각 주요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