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훈 약사 2년 전 한 TV 프로그램 작가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스피린을 원래 용도가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물었다. 그보다 한 해 앞서 2016년 인터넷매체에 아스피린으로 머리를 감고, 발의 각질을 제거하고, 옷에 묵은 때를 제거한다는 이야기가 기사화되고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소셜 미디어를 타고 전파된 적이 있었다.
그런 속설이 1년이 지난 2017년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마침내 방송 제작진에게까지 들어가 그 주의 아이템으로 선정된 것이었다. 나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방송에서 약에 대한 잘못된 속설에 대해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내보내는 것은 위험하다고 답했다.
아스피린과 아스피린이 분해되어서 생기는 살리실산은 다른 약이다. 살리실산을 두피에 바르면, 각질을 녹이고, 약간의 항균 효과가 있어서 비듬이나 지루성 피부염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아스피린에는 그런 효과가 없다. 아스피린을 가루내어 물에 타서 발라도 비듬이나 지루성 피부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화학 구조의 차이 때문이다. 아스피린의 화학명은 아세틸살리실산이다. 물에 녹이면 살리실산으로 가수분해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별 효과가 없다. pH 7.0, 실온에서 물에 녹이면 절반이 분해되는 데 약 52시간이 걸린다.
아세틸기는 아스피린의 작용 기전에 있어서도 중요하다. 살리실산에는 항혈소판 효과가 없고 항염 작용도 아스피린보다 약하다. 반면 아스피린은 살리실산과 같은 산이 아니라 에스테르여서 각질을 녹이는 효과가 없다.
아스피린은 가정에서 실수로 과용량을 복용해서 사고가 많이 나는 약이고, 특히 어린이들이 뭔지도 모르고 다량을 삼켰다가 응급실에 실려가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보관시 어린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약이다.
그러나 이미 방송을 준비한 제작사로서는 아이템을 버리기가 어려웠던 것인지 이번에는 사용 기한이 지난 아스피린으로는 괜찮지 않냐며 다시 인터뷰를 요청했다. 사용 기한이 지난 약은 약국에 반납해서 폐기처분하도록 해야지 원래 용도가 아닌 다른 용도에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답했다.
나는 인터뷰를 거절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제작진은 포기하지 않았고 다른 전문가와 인터뷰하여 기어코 방송을 내보냈다.
다른 방송사에서 디아제팜을 과용하면 죽을 수도 있냐는 질문을 해온 적도 있었다. 벤조디아제핀 계열의 신경안정제를 과용하면 졸리고 무기력해지며 운동실조증과 같은 증상이 나타날 수는 있으나 단독 복용으로 사망에까지 이르는 경우는 드물다.
알코올이나 다른 중추신경억제제와 함께 복용했을 때는 부작용이 더 심해져서 호흡억제에까지 이를 수 있다. 방송사에서 예상한 답이 아니었지만 그게 문제의 상황에 맞는 답이었다.
하지만 역시 다른 전문가와 인터뷰하여 디아제팜은 치사적이라는 식으로 방송이 나갔다. 기본적 사실 확인 없이 그저 방송 제작진의 입맛대로 답하는 전문가는 존재한다.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가장 최근에는 파스에 대한 또 다른 낭설을 인터넷에서 봤다. 파스 속 살리실산메틸이 분해되면 메탄올과 살리실산으로 분해되어, 메탄올은 공기중으로 날아가고 살리실산이 피부로 흡수된다는 이야기였다.
거기에 설명을 덧붙여서 그래서 메탄올이 증발하는 덕분에 시원한 느낌을 준다고 설명하는 전문가도 있었다. 참신한 이론이지만 철저히 틀렸다. 파스 속 살리실산메틸이 피부로 12-20% 정도 흡수되는 건 맞고 일부는 피부의 가수분해효소에 의해 메탄올과 살리실산으로 분해되는 것도 맞다. (파스에 함께 넣는 멘톨과 캠퍼가 이를 억제하므로 실제 대사는 간에서 주로 일어난다.)
하지만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은 흡수된 뒤다. 이미 흡수된 피부 속에서 메탄올이 소량 생겨난다고 문제가 될 일도 없지만 이렇게 생겨난 메탄올이 선택적으로 날아가거나 날아가면서 시원함을 주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체내에서 대사, 배설되는 게 맞다. 파스에 대해서는 유독 틀린 설명이 많다. 캡사이신 성분의 파스를 붙이면 뜨거운 것은 혈관 확장 때문이 아니고 TRPV1 온도수용체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멘톨 성분의 파스를 붙이면 차가운 것은 혈관 수축 때문이 아니고 TRPM8 온도수용체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얼음찜질을 할 때는 혈관수축이 되지만 차가운 파스는 느낌만 차가울 뿐 혈관은 확장하므로 얼음찜질을 대신할 수 없다. 약의 전문가로서 약사는 스펀지처럼 아무 정보나 빨아들이면 안 된다. 과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의심과 질문을 해봐야 한다. 거짓정보를 가려낼 수 있어야 진짜 약의 전문가다. 아는 약이라도 다시 한 번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