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훈 약사 약에는 다양한 제형이 있다. 캡슐, 정제, 가루약, 시럽처럼 먹는 약도 있고 주사로 맞는 약도 있다. 연고나 젤, 크림처럼 바르는 약도 있고, 붙이는 패치도 있다. 어떤 제형이냐에 따라 약효가 나타나는 시간과 부작용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입술에 물집이 생기면서 따가운 헤르페스 바이러스 포진에는 아시클로버라는 성분의 항바이러스제가 종종 사용된다. 이 약은 먹는 약일 때 가장 효과가 좋다. 증상 초기 1시간 이내에 복용하면 약을 복용하지 않았을 때보다 통증이 하루 더 짧아진다.
바르는 약일 때는 이보다 효과가 떨어지며, 이마저도 제형이 연고냐 크림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연고는 바셀린처럼 기름진 타입, 크림은 수분 함량이 더 높아 잘 발라지는 타입으로 이해하면 쉽다.) 크림은 구순포진 증상이 나타날 때 1시간 이내에 발라주면 증상을 한나절 줄여주는데 반해 연고는 효과가 떨어진다.
반면, 스테로이드 성분의 연고와 크림을 비교하면 동일 성분일지라고 연고가 크림보다 흡수가 더 잘 된다. 언뜻 생각하면 연고나 크림이나 같은 양의 약이 들어있으니 효과도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약성분이 연고 기제(베이스)에서 피부로 전달되는 속도에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제나 캡슐의 경우도 제형이 다양하다. 일반 정제나 캡슐이 있고, 천천히 또는 정해진 곳에서 약물을 방출하도록 특수하게 설계된 서방정, 장용정과 같은 알약이 있다. 겉보기에는 비슷한 모양이지만 어떤 제형이냐에 따라 약성분이 혈중으로 흡수되는 속도가 다르고 따라서 약효 발현, 지속시간, 부작용도 다르게 나타난다.
상황에 따라 제형의 선택이 다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약효가 빠르게 나타나도록 하려면 일반 정제나 캡슐이 좋지만 효과가 오래 지속되고 부작용을 줄여주려면 지속형 알약을 사용하는 게 나을 수 있다.
알약은 쪼개지 말고 반드시 그대로 복용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서방정, 장용정 때문이다. 일반 알약은 삼키기 어려우면 쪼개거나 부숴서 가루로 만들어 먹어도 되지만 서방정의 경우 부수거나 쪼개어 먹었다가는 천천히 녹아 나와야 할 약성분이 한꺼번에 흡수되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장용정은 위에서 녹지 않고 장에서 녹도록 특수하게 만든 것인데, 약을 쪼개면 위에서 약물이 녹아 나와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물 대신 우유로 장용정 변비약을 삼키면, 장에서 녹아야 할 코팅이 위에서 녹아버린다. 이로 인해 장운동을 촉진시켜야할 변비약 성분이 위를 자극하는 부작용을 겪게 된다.
약을 복용한 후 화장실에 갔다가 대변에 알약이 그대로 나왔다며 놀라는 경우도 간혹 생긴다. 이럴 때 환자 입장에서는 약성분이 하나도 흡수가 되지 않았으면 어쩌나 걱정할 수 있다. 하지만 괜찮다. 일부 서방형 알약은 약성분을 전부 방출한 뒤에도 모양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대장을 통과하여 몸 밖으로 나올 수 있다. (다만 내가 복용 중인 약이 그런 제형에 해당하는지는 약사와 상담해봐야 한다.)
글을 마치기 전에, 부형제의 억울함을 풀어줘야겠다. 알약에 부형제가 들어있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과장하는 이야기가 방송이나 인터넷에 종종 보인다. 하지만 실제는 정반대로, 부형제가 안 들어있으면 낭패일 경우가 더 많다. 약성분만으로 알약을 만들기는 어렵다.
약성분이 원하는 곳에 가서 흡수되어 효과를 내고, 경우에 따라서는 빠르게 흡수되어 신속한 효과를 내거나 반대로 효과가 더 오래 지속되도록 돕는 일은 부형제의 몫이다. 부작용을 줄이고 쓴맛을 가리고 삼키기 더 쉽게 하는 것도 부형제의 역할이다.
약 모양이나 색상을 다르게 하여 구별할 수 있도록 하고, 모양을 보기 좋게 만들며, 약성분이 분해되거나 변질되지 않도록 하여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전부 부형제가 하는 일이다. 약효를 내는 주성분이 배트맨 같은 슈퍼히어로라면 부형제는 로빈과 같은 조력자이다.
비록 약효는 없지만, 부형제는 약이 제대로 일하는 데 빠져서는 안 되는 중요한 성분이며, 게다가 안전성이 입증된 물질이다. 쓸데없이 집어넣은 성분이 아니라 약성분을 돕도록 의도적으로 알약 설계에 포함시킨 성분이 부형제인 것이다. 주연이 아닌 조연이라고 무시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