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에 재 개교한 경성약학전문학교(경성약전)는 1946년 9월에 3년제의 사립 서울약학대학으로 승격되고, 1948년부터는 4년제 학부과정을 개설하였으나 좌우 분열과 재단의 불안정 등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마침 개성(開城)의 유지들은 1949년 인삼 등으로 유서 깊은 개성에 새로운 약학대학을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개성에는 개성중학 옆에 넓은 약초원과 유리 온실 등을 갖춘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 생약연구소가 있었다. 그래서 경성약전을 개성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일제 강점기에도 있을 정도였다. 당시 전국에는 서울대학교와 이화여대에만 약학대학이 있었다.
약대 신설은 송도중학(松都中學, 당시 6년제)이 속해 있는 송도재단이 맡기로 하였다. 송도(松都)는 개성의 옛 이름이다. 송도재단은 서울약학대학의 한구동(韓龜東) 교수에게 이 일을 부탁하였다. 한 교수는 서울약학대학의 홍문화(洪文和), 이왕규(李王圭) 교수 등과 함께 약대 신설에 나섰다. 명목상의 학장은 송도중학의 8대 교장인 황석주(黃錫周) 선생이, 부학장은 한구동 교수, 교무과장은 홍문화 교수가 맡고, 학교 이름은 ‘송도약학대학(松都藥大)’으로 하기로 하였다.
1950년 4월 25일 마침내 문교부 당국으로부터 송도중학에 약대 병설 인가를 받았다. 이에는 당시 개성에 있던 민관식(閔寬植) 박사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최규남(崔奎南) 박사 (송도중학 1회 졸업생) 등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1989년 송도중학에서 발간한 『송도학원 80년사』를 보면, ‘1950년 개성 유지들의 협조로 40만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3월에 송도 약학대학 설립을 인가 받아 40명의 신입생1)을 받았다’고 한다. 1948년 10월 6일자 『자유신문』을 보면 개성 유지(有志)인 김정호, 윤영선, 공성학 씨가 약대를 위해 토지 15만평과 현금 50만원을 희사하였다고 한다. 기존의 송도중학 부지 25만평에 신설 약대 용으로 희사 받은 15만평을 합쳐 총 40만평이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약대의 건물로는 1924년에 지은 건평 388평의 3층 화강석 건물인 송도중학의 박물관(사진1)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1, 2 층에는 각종 식물과 동물의 표본 등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특히 이 학교 졸업생이자 교사이던 석주명(石宙明)2) 씨가 수집한 나비 표본도 있었다.
▲ 개성에 있던 송도약대 3층 교사약대 건물 20m 앞에는 농구장이 있었고, 거기서 10m 떨어진 곳에는 1939년 3월에 지은 112평 규모의 옥외 수영장도 있었다. 건물 앞에 큰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었고, 그 옆에 기숙사가 3동 있었다. 송도약대는 이 임시 교사에 부랴부랴 강의실, 실험실 및 도서실 등을 만들고 전국에서 40명3)의 신입생을 선발해 놓고, 1950년 6월 26일에 입학식을 열기로 하였다.
홍문화 교수는 인쇄소에서 가지고 온 개교식 프로그램과 입학식장을 점검한 다음 개성을 떠나 홍 교수의 주소지인 인천의 주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6월 25일 아침 서울역에서 이왕규 교수와 함께 개성 행 기차표를 끊으려다가 북한의 남침을 알게 되어 개성 행을 포기하였다.
이로써 송도약대는 역사의 물결 속에 거품이 되고 말았다. 우리 근현대사의 뒷 페이지에 비감(悲感)이 서리지 않을 날은 언제 올 수 있을지 잠시 옷깃을 여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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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과 달리 생물 등 과학 수업을 하는 건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음.
2) 후에 개성에 있는 생약연구소를 거쳐 경성제대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으로 근무.
3) 송도중학 32회 졸업생인 임정상(林正相) 등.
* 이 글은 송도중학 32회 졸업생인 허강(許江) 선생(전 문교부 편수관)의 증언 (2019.10.29 청취)과 『한국약업사(韓國藥業史)』, 『송도학원 80년사』, 송도중학교 홈페이지, 『서울대약대100년사』 등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