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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창구 교수의 약창춘추
<277> 사서 기뻤던 물건, 티브이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입력 2019-07-03 09:38 수정 최종수정 2019-07-0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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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1972년, ‘여로(旅路)’라고 하는 티브이(TV) 일일연속극이 시청률 70%를 넘기며 전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시골 소읍에 사시던 장모님은 저녁마다 이 연속극을 보러 이웃 마을까지 걸어 다니셨다.

그래서 아직 결혼 전이었던 아내는 어머니를 위해 흑백 티브이 한 대를 사서 안방에 설치하였는데, 그 일이 지금껏 가장 기뻤던 일로 회상된다고 하였다. 당시 컬러 티브이는 아직 나오지 않았던 때였다.

티브이를 사 놓자 장모님이 더 이상 이웃 마을까지 가시지 않아도 되어 좋았지만, 대신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동네 사람들이 아이 어른 구분없이 매일 저녁 처가 댁 안방으로 몰려드는 것이었다. 티브이를 설치한 집은 매우 드물고, 여로를 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저녁 내내 방안에는 동네 개구장이들의 발가락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흑백 티브이를 사드렸던 때가 가장 기뻤던 생각이 난다. 1974년 5월, 만 34개월 간의 육군 사병 생활을 마치고 그 해 7월 영진약품에 특별채용(특채) 되었다. 대학 2년 선배인 장정훈 씨의 주선에 따른 것이었는데, 입사 한 달쯤 뒤 회사의 오너이신 김생기 사장님의 면접을 보게 되었다.

사장님은 내게 “자네는 어떤 자세로 회사에 다닐 생각인가?” 물으셨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으나 나는 평소 생각한 대로 “사장님은 영업부 직원이 지난 달보다 매출을 더 올리면 열심히 일한 것으로 평가하시죠? 그러나 저는 실험실에서 일하는 사람이므로 제제 중에 들어 있는 주성분의 함량을 전임자보다 더 정확하게 분석해 내면 그걸 열심히 일한 것으로 평가받고자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사장님이 다시 물으셨다. “회사에 요구하는 입사 조건이 있나?” 나는 “없습니다. 다만 대학원 석사 과정에 파트 타임으로 다녀야 하니까, 회사가 이를 방해만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 당시 특채로 입사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저런 입사 조건을 회사에 제시하곤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대학원을 다니기 위한 방편으로 회사 취직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런 조건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10여분 정도의 면접을 마치고 사장실 밖으로 나오니 모 부장님이 내게 흰 봉투를 전해주시는 것이었다. 열어보니 현찰 20만원이 들어 있었다. 당시 신입사원 초봉이 6만원이었으니까 20만원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깜짝 놀라 웬 돈이냐고 물었더니, ‘사장님이 장학금으로 주시는 것이니 그냥 받으라’는 것이었다.

사장님이 왜 거금을 주셨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엄하신 사장님 질문에 또박또박 말 대답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구질구질하게 입사 조건을 내걸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드셨던 것 같았다. 나중에 보니 사장님은 감히 말 대꾸를 하는 직원이 없을 정도로 회사 안에서 엄청나게 무서운 존재였다. 그것도 모르고, 아니 몰랐기 때문에 나는 사장님 말씀에 감히 말 대꾸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식해서 득을 본 셈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 돈으로 흑백 티브이 한 대를 사서 티브이 가게로 하여금 시골에 있는 부모님 댁에 설치해 드리도록 하였다. 다행히 그 동네에는 2년 전부터 전기가 들어와 있었다. 당시 부모님 댁에는 물론 그 동네에 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티브이를 사 보낸다는 말씀을 사전에 드릴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고없이 기사가 들이닥쳐 티브이를 달아드릴 때 부모님이 놀라시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더 기분이 짜릿하였다. 당시 그 동네에 티브이를 설치한 집은 월남전에 참전하고 돌아온 2년 선배 집 하나 밖에 없었다. 우리 집이 첫 번째가 아니고 두 번째가 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막 군대를 제대한 장남이 턱하니 티브이를 설치해 드리는 만족감에 가슴이 벅찼다.

1980년, 일본 유학 중 아버지 회갑연 참석차 귀국해서 컬러 티브이로 바꿔드릴 때까지, 이 흑백 티브이는 부모님에 대한 내 효도의 증표이자 자부심이었다. 부모님 생전에 이와 같은 사드리는 기쁨을 더 많이 누리지 못한 아쉬움에 가슴이 아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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