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부는 금년 7월 20여명의 교회 식구들과 함께 캄보디아에 아웃리치(outreach)를 다녀왔다.
교회에서의 아웃리치란 선교 목적을 위한 일종의 봉사활동인데, 그 동안 나는 늘 마음은 있었어도 건강 때문에 참여해 보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더 늙으면 못 간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참여한 것이다.
프놈펜에 도착한 다음 날인 7월 26일 아침, 교회가 마련해 놓은 북카페(book cafe)에서 도착 예배를 드렸다.
그 때 자기소개를 하던 한 젊은 선교사 부부가 이런 위로 예배는 처음이라며 울컥 눈물을 삼켰다.
이 모습을 본 순간부터 우리 모두는 쭉 선교사들과 눈물을 나눈 한마음 형제가 되었다. 리더인 M선교사는 캄보디아의 문이 활짝 열려 있을 때에, 밀물처럼 몰려와 선교를 하자는 도전을 주었다.
이어 근처에 있는 왕립 캄보디아 대학을 들렀다. 70년대 폴포트 대학살로 인하여 교수들 중 박사학위 소지자가 22명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후에는 대학살의 현장인 킬링필드와 뚜슬랭 감옥을 방문하였다. 캄보디아는 어디를 가도 젊은이들만 눈에 띄는데, 이는 대학살 때에 나이든 지식인들과 도시인들이 학살되어 어른들이 없어졌기 때문이란다. 킬링필드 전시관에 가득한 해골들은, 한 나라가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얼마나 비참해 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저녁에는 여섯 선교사 가족을 식당으로 초청하여 위로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쁨으로 사역하고 있다는 그들의 간증을 들었다. 또다시 벅찬 감동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둘째 날인 주일 아침, 메콩강을 배로 건너 M선교사가 개척한 두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한 교회는 시설이 매우 좋았지만, 다른 한 교회는 지붕과 마루만 덩그렇게 있는 원두막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 교회에 우물과 전기시설, 그리고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벽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예배 후에는 맨발로 찾아 온 어린이들을 한 명 한 명 포옹하면서, 볼에 페인팅을 하고,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고, 비누방울과 풍선을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의 눈망울이 유난히 예뻤다.
뒤이어 몇 개조로 나뉘어 현지의 형제 자매 리더들과 함께 인근 마을로 가가호호(家家戶戶) 전도에 나섰다. 감사하게도 적지 않은 캄보디아 인들이 우리들의 전도를 받아들여 주었다.
저녁 때 다시 프놈펜으로 돌아 와 안산의 M센터(동남아 노동자를 돕기 위해 우리 교회가 만든 센터) 출신 캄보디아인 가족들을 식당으로 초대하였다. 그들은 우리들의 예기치 않은 초대와 열렬한 환영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몹시 반가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안타깝게도 귀국 후 교회에 다니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다시 교회에 다닐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셋째 날에는 M센터 출신이 경영하는 한국어 학원을 방문하였다. 우리들은 잠시 원어민(原語民) 선생이 되어 학원생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노래를 가르쳤다. 이어 우리 목사님이 설교를 하였는데, 찌는 듯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120여명의 학원생들이 경청하였다. 감동이었다.
문득 '한국어 학원'이 외국인 청년 전도의 블루오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는 우리를 줄곧 안내하였던 G선교사 부부와 프놈펜 공항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이름 없는 선교사가 되겠다는 노 선교사 부부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에 또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마지막 날인 넷째 날에는 시엠립이라는 도시에 있는 앙코르와트 유적지를 관광하였다. 석조(石造)의 사원과 왕궁은 서양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그러나 이제는 한낱 돌무더기가 되어 버린 유적은, 마치 풀이슬 같았던 솔로몬의 영화(榮華)를 생각나게 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마28:19) 란 말씀에 용기를 내어 우선 가고 본 4박 5일의 아웃리치였다. 가서 보니 과연 거기엔 감동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우리 인생의 참 가치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깊은 성찰을 해 보게 되었다. 아웃리치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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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금년 7월 20여명의 교회 식구들과 함께 캄보디아에 아웃리치(outreach)를 다녀왔다.
교회에서의 아웃리치란 선교 목적을 위한 일종의 봉사활동인데, 그 동안 나는 늘 마음은 있었어도 건강 때문에 참여해 보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더 늙으면 못 간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참여한 것이다.
프놈펜에 도착한 다음 날인 7월 26일 아침, 교회가 마련해 놓은 북카페(book cafe)에서 도착 예배를 드렸다.
그 때 자기소개를 하던 한 젊은 선교사 부부가 이런 위로 예배는 처음이라며 울컥 눈물을 삼켰다.
이 모습을 본 순간부터 우리 모두는 쭉 선교사들과 눈물을 나눈 한마음 형제가 되었다. 리더인 M선교사는 캄보디아의 문이 활짝 열려 있을 때에, 밀물처럼 몰려와 선교를 하자는 도전을 주었다.
이어 근처에 있는 왕립 캄보디아 대학을 들렀다. 70년대 폴포트 대학살로 인하여 교수들 중 박사학위 소지자가 22명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후에는 대학살의 현장인 킬링필드와 뚜슬랭 감옥을 방문하였다. 캄보디아는 어디를 가도 젊은이들만 눈에 띄는데, 이는 대학살 때에 나이든 지식인들과 도시인들이 학살되어 어른들이 없어졌기 때문이란다. 킬링필드 전시관에 가득한 해골들은, 한 나라가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얼마나 비참해 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저녁에는 여섯 선교사 가족을 식당으로 초청하여 위로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쁨으로 사역하고 있다는 그들의 간증을 들었다. 또다시 벅찬 감동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둘째 날인 주일 아침, 메콩강을 배로 건너 M선교사가 개척한 두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한 교회는 시설이 매우 좋았지만, 다른 한 교회는 지붕과 마루만 덩그렇게 있는 원두막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 교회에 우물과 전기시설, 그리고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벽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예배 후에는 맨발로 찾아 온 어린이들을 한 명 한 명 포옹하면서, 볼에 페인팅을 하고,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어주고, 비누방울과 풍선을 나누어 주었다. 아이들의 눈망울이 유난히 예뻤다.
뒤이어 몇 개조로 나뉘어 현지의 형제 자매 리더들과 함께 인근 마을로 가가호호(家家戶戶) 전도에 나섰다. 감사하게도 적지 않은 캄보디아 인들이 우리들의 전도를 받아들여 주었다.
저녁 때 다시 프놈펜으로 돌아 와 안산의 M센터(동남아 노동자를 돕기 위해 우리 교회가 만든 센터) 출신 캄보디아인 가족들을 식당으로 초대하였다. 그들은 우리들의 예기치 않은 초대와 열렬한 환영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몹시 반가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안타깝게도 귀국 후 교회에 다니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다시 교회에 다닐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였다.
셋째 날에는 M센터 출신이 경영하는 한국어 학원을 방문하였다. 우리들은 잠시 원어민(原語民) 선생이 되어 학원생들에게 한국어와 한국 노래를 가르쳤다. 이어 우리 목사님이 설교를 하였는데, 찌는 듯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120여명의 학원생들이 경청하였다. 감동이었다.
문득 '한국어 학원'이 외국인 청년 전도의 블루오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는 우리를 줄곧 안내하였던 G선교사 부부와 프놈펜 공항에서 아쉬운 작별을 하였다. 이름 없는 선교사가 되겠다는 노 선교사 부부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에 또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마지막 날인 넷째 날에는 시엠립이라는 도시에 있는 앙코르와트 유적지를 관광하였다. 석조(石造)의 사원과 왕궁은 서양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그러나 이제는 한낱 돌무더기가 되어 버린 유적은, 마치 풀이슬 같았던 솔로몬의 영화(榮華)를 생각나게 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마28:19) 란 말씀에 용기를 내어 우선 가고 본 4박 5일의 아웃리치였다. 가서 보니 과연 거기엔 감동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다. 우리 인생의 참 가치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깊은 성찰을 해 보게 되었다. 아웃리치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