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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창구 교수의 약창춘추
<86> 나는 회색분자이다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입력 2011-09-21 10: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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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어느 날 밤 항해를 하고 있던 선장이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을 보고 신호를 보냈다. “방향을 20도 바꾸시오!” 그러자 저쪽에서도 신호가 왔다. “당신이 바꾸시오!” 기분이 몹시 상한 선장이 다시 신호를 보냈다. “난 이 배의 선장이다!”. 그러자 저쪽에서 다시 회신이 왔다. “난 이등 항해사다!”. 열이 머리 끝까지 오른 선장. “이 배는 전투함이다. 당장 항로를 바꿔라!”. 그러자 회신이 왔다. “여긴 등대다!” 그 순간 선장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이상은 ‘엔도르핀 팡팡 유머’란 책에서 따 온 ‘고집부릴 게 따로 있지’ 라는 주제의 유머이다. 

고집 (固執)이 센 사람은 자기만 옳다고 생각한다. 융통성이 없고 남에 대한 태도도 교만하다. 자기가 잘났기 때문에 남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별로 없다. 그래서 고집은 옹고집의 예처럼 대체로 나쁜 이미지를 갖는다. 예컨대 정치가들의 고집이 그러하다. 신문이나 티브이에서 여야 정치가가 논쟁하는 것을 보면 상대방의 주장은 백 퍼센트 틀리고 내 주장은 백 퍼센트 맞는다고 잘도 우긴다. 마치 우기기 시합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럴 때 그들은 뻔뻔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고집이 반드시 나쁜 이미지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독립투사의 고집은 존경을 받는다. 온갖 고문, 박해 및 위험에도 굴하지 않았던 독립투사의 고집보다 더 센 옹고집이 어디 있겠는가? 옹고집이라 해도 이런 고집은 소신 (所信) 또는 신념 (信念)이라는 고상한 단어로 불리는 것이다.
 
문제는 고집과 신념의 구분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정치가가 자기 철학을 일관 (一貫)되게 밀고 나갈 때 소신을 가진 정치가라는 칭송을 듣기도 하지만 까딱 잘못하면 융통성이 없는 독불장군 (獨不將軍)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반면에 사고 (思考)가 너무 유연하면 우유부단 (優柔不斷)하다거나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기 쉽다. 

나는 집사람으로부터 ‘회색분자 (灰色分子)’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는 내가 누가 무어라고 하면 금방 ‘그렇네요’라고 수긍 (首肯)을 하다가도, 다른 사람이 다른 주장을 하면 ‘그 말에도 일리가 있네요’ 하는 태도를 잘 취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어느 한쪽 의견이 전적으로 옳고, 그 반대편 생각은 전적으로 틀린 경우를 그다지 많이 보지 못하였다. 대개의 논쟁은 양쪽 의견 모두에 일리가 있으면서 동시에 양쪽에 문제점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양쪽 이야기를 들어 보고 균형 잡힌 판단을 하려 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태도 아니겠는가? 그런걸 회색분자라고 한다면 그래 좋다 나는 회색분자이다. 

여담이지만, 나를 회색분자라고 놀리는 아내는 충청도 출신이다. 충청도 사람은 원래 고집이 세다. 나의 주관적 관찰에 따른 엉터리 결론이다. 그러므로 (?) 아내의 고집도 장난이 아니다. 예컨대 결혼생활 약 40년 동안 아내가 나한테 사과를 한 적은 거의 없다. 나는? 나는 물론 여러 번 사과하였다. 잘 못한 일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아내는 내가 보기에 분명한 경우에도 사과하지 않는다. 왜 사과를 안 하느냐고 물었더니 충청도 사람들은 사과를 할만한 잘못을 처음부터 하지 않는다나? 내게는 그게 충청도 사람의 고집으로 보였지만, 아내에게는 그게 충청도 사람의 자부심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과연 그게 고집일까 자부심일까?

각설하고, 과연 어떤 자세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할까? 고집, 소신, 신념을 가지고? 아니면 유연하고 균형 잡힌 사고 또는 회색분자적 사고 방식으로?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러나 나에 관한 한 나는 끝내 회색분자로 살다 죽게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자기의 주장을 여론인 것처럼 대중들에게 주입 전파하려 드는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의 고집스런 태도는 영 내 체질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의약품의 슈퍼 판매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그들은 확신에 차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일까? 혹시 ‘나는 다 알고 있다’는 교만으로 ‘배를 등대에 부딪히게 만드는’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차라리 겸손한 회색분자 선장이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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