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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은의 뮤직 in CINEMA

음악만 듣고 작곡가의 성별을 판단할 수 없다면, 레이첼 포트먼

편집부

기사입력 2021-03-05 11:02     최종수정 2021-03-05 11:1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다음 달, 팬데믹으로 인한 영화계 불황으로 예년보다 두 달 늦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다. 작년 ‘기생충’(봉준호, 2019)이 주요 부문을 휩쓴 것은 기본적으로 작품의 우수성 때문이겠으나 그 동안 백인, 남성, 미국 중심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온 시상식 주최측이 변화를 선언한 하나의 사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변화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올해의 선택이 더 중요해졌다. 

할리우드의 여성 차별에 대해 통계적으로 접근한 다큐멘터리, ‘우먼 인 할리우드’(톰 도나휴, 2018)에 따르면,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여성 스태프의 비율은 0.5%에 불과했으며 2002년부터 2014년까지 할리우드에서 여성 감독의 비율 또한 4.1% 밖에 되지 않았다. 진입 장벽부터 높으니 시상식에서도 여성은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레이첼 포트먼은 이처럼 업계의 고의적 차별 속에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여성 음악감독으로, 그녀가 ‘엠마’(더글라스 맥그라스, 1996)로 받은 오스카상은 여성 작곡가가 받은 최초의 (뮤지컬/코미디 부문) 음악상이었다. (참고로 작년에 ‘조커’(토드 필립스, 2019)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힐더 구드나도티르는 장르 구분 없이 통합된 음악상 부문 최초의 여성 수상자가 되었다.)  

그녀는 당시 동양 여성들의 삶을 다루었다는 점만으로도 큰 이목을 끌었던 ‘조이 럭 클럽’(웨인 왕, 1993)에 참여한 후, ‘엠마’로 오스카상을 수상하며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받아왔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시대극에서 레이첼은 고전적인 느낌을 살리기 위해 바순을 독주 악기로 많이 사용했는데, 배경이 되는 영국의 작은 마을이나 주연을 맡은 기네스 펠트로의 기품과도 잘 어우러지는 선택이었다. 저 유명한 메인 테마에는 시골 공동체의 친밀함과 더불어 그 안에 은근히 도사리고 있는 날선 호기심과 엠마의 실수로 인해 벌어질 심상찮은 사건들까지 암시되어 있다. 

레이첼은 또한, 장면의 주된 정서와 다소 어긋나는 음악을 사용하기 좋아하는데 이러한 그녀의 스타일은 라세 할스트롬 감독과 작업한 ‘사이더 하우스’(1999), ‘초콜릿’(2000)에서도 잘 나타난다. 레이첼은 최근에도 줄리 코엔, 베시 웨스트 감독의 다큐, ‘줄리아’(2020), 월트 디즈니사에서 제작한 ‘갓마더드’(2020) 등의 음악을 담당하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레이첼 포트먼은 여성과 남성의 감수성이 다를 수는 있지만 음악만 듣고 작곡가의 성별을 판단하기는 어려운 만큼 서로가 그 경계를 넘나들 수 없는 것은 아니며, 그것들이 뒤섞일 때 흥미로운 음악이 나온다고 말한 바 있다. 더 많은 여성 작곡가들이 실력에 맞는 기회를 얻고, 영화를 풍요롭게 만들었으면 하는 그녀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윤성은의 Pick 무비

미나리의 푸른 생명력을 닮은 영화, ‘미나리’ 

미나리는 아무데서나 잘 자란다. 미나리는 어디에든 넣어 먹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그런데 그야말로 ‘원더풀(wonderful)’ 하고, ‘원더(wonder) 풀’이기도 한 미나리에 우리가 그동안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었던가. 정이삭 감독이 이 식물의 이름을 딴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 말이다. 

미국에 가서 서로를 구해주자고 했던 한국인 부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아칸소의 넓은 들판으로 이사를 온다. 그러나 부부의 속마음은 다르다. ‘제이콥’(스티븐 연)은 이 땅의 흙을 일구어 아이들에게 뭔가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모니카’(한예리)는 컨테이너 집이 한심한데다 병원이 멀어 심장이 안 좋은 ‘데이빗’(앨런 김)이 걱정이다. 부부 싸움이 잦아지는 가운데 제이콥이 대출을 받아 농사를 시작하자 아이들을 봐주기 위해 한국에서 모니카의 엄마 ‘순이’(윤여정)가 온다. 

어린 데이빗은 할머니와 한 방을 쓰는 것도, 할머니가 가져온 한약을 먹어야 하는 것도 싫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할머니가 부모님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면서 남다른 유대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순이가 사용하는 ‘Strong’, ‘wonderful’, ‘네가 이겼다’ 등의 긍정적인 언어는 미나리 씨앗처럼 데이빗의 심장에 파릇파릇한 에너지로 자라나 마침내 그를 뛰게 만든다. 

데이빗의 시점으로 시작되고 끝날 만큼 감독의 유년 시절이 많이 담겨 있는 ‘미나리’는 미국 이민 1세대의 성공 과정을 보여주는 대신 이들이 겪게 되는 다양한 역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순이가 물가에 심는 미나리는 거센 비바람과 뜨거운 햇볕 속에서도 다시 살아나는 제이콥 가족의 강인한 생명력과 적응력을 의미한다. 

이들을 버티게 해주는 것은 돈이나 성공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과의 동행이라는 주제가 선명하다. 그래서 ‘미나리’는 이민자들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가족에 관한 영화이며, 무엇보다 삶의 보편적 가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그 의미가 더 크다. 이민이라는 특별한 경험 없이도 3대에 걸친 가족들 누구에게나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얼마든지 있다. 

정이삭 감독은 ‘미나리’가 ‘자식의 미래를 위해 희망을 걸었던 세상 모든 부모를 향한 러브레터’라고 말한 바 있다. 영화에서 모니카 부부는 이름 대신 서로를 ‘지영 아빠’, ‘지영 엄마’라고 호칭한다. 우리 문화에서 익숙한 그 호칭이 아칸소의 외딴 집에서 들릴 때마다 새삼 뭉클해지는 것은 이제 제이콥보다 나이가 더 든 중년 감독의 고백이 진솔하게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소개>
윤성은씨는 영화평론가이자 방송인으로 현재 다양한 매체에 영화음악 칼럼과 짧은 영화소개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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