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5일, 경북 봉화에 있는 아연 광산의 수직 갱도에 9일이나 갇혀 있던 광원(鑛員) 둘이 걸어서 생환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들은 인스턴트 믹스 커피의 대명사인 ‘커피믹스’를 먹으며 버텼다고 한다. ‘봉화의 기적’을 일으킬 정도로 ‘커피믹스’는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올해 11월 8일자 조선일보에 의하면 ‘한국을 빛낸 발명품’의 하나로 커피믹스가 선정된 바 있다고 한다. 즉 2017년 특허청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커피믹스가 훈민정음, 금속활자, 온돌, 거북선에 이어 ‘한국을 빛낸 발명품’ 제5위로 선정되고, 이태리 타월과 첨성대가 6~7위로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사람들이 커피믹스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필자는 커피믹스를 인류 문화사에 주목할 만한 발명품이라고 생각한다.
커피믹스의 위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커피믹스를 누가 발명했는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다행히 필자가 서울대 약대 동창회보 제100호(2022년호)를 편집하는 중에, 1957년 서울대 약대를 제11회로 졸업하고 당시 동서식품㈜의 생산담당 기술자였던 조항연 약사가 커피믹스의 개발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흥분되는 마음을 억누르고 필자가 파악한 커피믹스의 개발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아이디어가 떠오르다
조항연 약사가 회사에 다니던 어느 날 등산이나 낚시를 하는 사람들에게 커피를 먹일 수 있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커피 1술, 크림 1술, 설탕 1술을 섞어서 봉지에 담아 5봉짜리 포장물을 만들어보니 담배갑 1개 크기가 되었다. ‘이거 잘 하면 좀 팔리겠네’라는 생각이 들어 1봉지를 개봉하여 컵에 쏟은 다음 더운 물을 붓고 차 숟갈로 저어보았는데, 몇 번을 시도해도 깨끗이 용해되지 않고 무언가 불용물이 표면에 뜨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커피의 산성 때문에 커피크림 성분 중의 하나인 '카제인 나트륨'이 '카제인'으로 석출되어 표면에 뜬 것이었다. 이런 때는 '약산의 염'을 조금 넣어주면 완충제 작용을 하여 카제인이 석출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약대에서 배운 것이 생각난 것이었다. 그래서 소량의 인산 나트륨, 인산 칼륨 등을 봉지에 넣어 섞은 다음, 더운 물에 넣어보았더니 과연 부유물이 생기지 않고 깨끗하게 녹았다.
2. 파우치(pouch bag)형 커피믹스의 출현
초기의 커피믹스는 네모난 파우치 봉투에 담겨 있었다. 처음에는 봉지 포장기 몇 대를 돌려 생산 공급하였으나, 순식간에 제품이 인기를 끌어 판매량이 엄청나게 증가하는 바람에 이런 구식 포장으로는 판매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적당한 포장설비를 찾던 중에 1초에 10봉을 포장하는 포장기가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당장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날아가 포장기 회사를 찾아 갔다. 정말 분당 600포라는 경이로운 속도로 설탕을 포장하는 기계였다. 그 자리에서 포장기 구입 계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3. 막대(stick bag)형 커피믹스의 출현
세월이 조금 지나면서 회사 내의 마케팅 및 판매부서로부터 커피믹스도 시판 설탕의 포장처럼 막대형으로 포장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그러나 국제포장전시회에 다녀봐도 막대형 포장은 전부 기껏해야 3~4줄로 포장하는 기계뿐이었다.
할 수 없이 발전성이 보이는 국내의 모 기계제작소와 상호 협력하여 세계 최초로 10줄짜리 포장기를 개발하였다. 이 포장기의 능률은 기존의 외국제 보다 3배나 높았다. 16년 전인 2006년의 일이다.
·부언
조항연 약사는 커피믹스가 동서식품과 동료들의 협력으로 개발된 품목이므로 본인이 단독개발자로 기록되는 것을 한사코 사양하였다. 그러나 대학 동기들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커피믹스 개발의 실질적인 주역이었음은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본인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