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핑(Surfing)의 성지로 유명한 강원도 양양. 도시에서는 일상을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꿈의 장소로 떠올리지만, 푸른 해변의 낭만 뒤엔 젊은이들의 빈자리, 초고령화로 인한 열악한 의료체계가 난제로 자리잡은 바닷가 두메산골 중 하나다. 재미를 위해 잠시 머물기는 좋지만 누구도 쉽게 일상을 영위하려 하지 않는, 평균 연령 50세의 2만8,000명 인구가 사는 이 곳에 화려했던 40년 의사인생을 뒤로 하고 내려온 이가 있다. ‘위암 명의’로 대형병원들의 러브콜을 한 몸에 받던 전 한양대병원장인 권성준 양양군보건소장이다.
‘위암 수술 3,000건 이상’, ‘대한위암학회장’, ‘모교의 대학병원장’이란 타이틀을 모두 벗어던진 그가 지난해 1월 개방형 직위 공모를 통해 이곳에 온지도 1년 반이 흘렀다. 임기를 반 년 남긴 지금, 작은 시골 보건소장으로서의 삶과 의료봉사로 여생을 보내겠다던 그의 꿈은 과연 얼마나 실현되고 있을까. 보건복지부 전문기자협의회는 지난달 26일 시골마을의 보건소장에게 지역의료 시스템과 의료체계 현황 등을 듣기 위해 강원도 양양을 찾았다.
“사회생활을 하다 알게 된 형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 분 고향이 여기(양양)에요. 같이 산을 좋아해서 설악산부터 여러 곳을 다니다 형님 생가가 있는 양양에 오게 됐죠. 형님 지인들과 같이 식사하다 연이 닿았어요. 저는 서울 토박입니다”
기대와 달리 권성준 소장의 답은 소박했다. 명의로 이름을 떨치던 대학병원장이 돌연 시골 군의 보건소장으로 오게 된 계기가 친한 지인과의 인연 때문이었다는 그는 연신 솔직한 태도로 지역의료 현장의 실상을 묘사했다.
“보건소장은 진료보다는 행정 비중이 큽니다. 보통 진료가 10%, 행정이 대부분이에요. 하지만 전 반대에요. 행정은 10% 밖에 안 되고, 주로 진료를 합니다”
양양군에는 읍에 내과 3곳, 외과 1곳, 정형외과 1곳 등 5곳의 의원이 전부일 만큼 의료체계가 열악하다. 그나마 읍은 상황이 나은 편이다. 면에는 찾아갈 수 있는 병원이 단 한 군데도 없다. 그 5곳마저 응급실이 없고, 의사 혼자 운영하는 곳이기 때문에 응급상황이 생기면 속초까지 약 30분, 강릉까지 약 1시간을 달려가야 한다. 외진 곳에 사는 사람들은 탈 수 있는 버스도 없다. 승객이 줄어 노선이 줄어든 탓이다. 독거노인 비율이 32%가 넘는 양양군은 주문진과 가까운 현남면의 노인 비율이 41%, 현북면의 경우는 39%를 차지한다. 65세 이상 인구가 20%를 넘으면 초고령사회인 점을 감안하면 양양의 노인 인구는 그 2배에 달하는 셈이다.
“보건소 1층에는 공중보건의 2명, 치과의사가 1명 있습니다. 하지만 기능을 거의 못해요. 기계나 기구가 없으니까요. 운이 좋아 전문의가 몇 명 오긴 했는데, 이들이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는 장비가 없어요. 보건소는 수술을 하지도 않잖아요. 안과도 전문의가 2명 왔는데, 기계싸움이 대부분인 안과에 기계가 하나도 없어요”
권 소장은 예상보다 지역의료 실상이 훨씬 더 심각하다면서도 그나마 복지정책인 희망택시가 있어 다행이라고 털어놨다. 희망택시는 군이 교통수요 감소와 수익성 악화로 버스노선이 없는 농어촌 마을 주민을 위해 버스 운행요금으로 택시를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혼자 살면서 차도 없고, 걷기 힘든 어르신들이 1,400원만 내면 양양군 내 어디든 갈 수 있도록 두 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아프면 이용할 수 있는 119 앰뷸런스가 있죠. 그런데 이게 많지 않아요. 읍에는 소방서에 1대가 있고, 두 개 면에 하나씩 있어요. 주민들이 토로하는 불만이 뭐냐면, 응급환자가 발생하면 도착까지 30분 가까이 걸린다는 거예요. 워낙 외지고 먼데다 길이 구불구불하니까 빨리 갈 수가 없는 거죠”
권성준 보건소장은 지난 7월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전했다. 양양군 내 유일한 고등학교인 양양고등학교에서 보건의료 분야 대학교에 지원하는 고3학생 15명이 권 소장과의 면담을 요청한 것이다. ‘내 고향 양양군을 어떻게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변화의 핵심이 되겠다’며 ‘체인지 메이커’라는 팀까지 만든 이들은 양양군의 열악한 의료현실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싶다며 그를 초대했다. “앰뷸런스가 30분 있다가 오면 어떻게 하냐”고 따져묻는 학생들에게 권 소장은 이상과 현실의 벽을 또 한번 느꼈다고 고백했다.
“나도 여러분 나이땐 안 그랬는데, 나이 들어보니 현실을 알게 됐다고 솔직히 말했어요. 학생들 말처럼 앰뷸런스가 바로 오려면 10대 정도가 있어야 하고 3교대하는 응급처치사가 항상 대기해야 하는데, 앰뷸런스와 인건비가 상당하고 묵어야 할 숙소도 마련해야 한다고요. 생각은 좋지만 하루 아침에 안 되는 거라고 했죠. 그래도 해피콜이라도 있지 않느냐고, 조금씩 점진적으로 되는 거지, 머리 속에 아이디어가 있어도 현실로 되는 건 오래 걸린다고 말해줬어요”
양양군의 열악한 의료 현실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곳은 산부인과, 소아과가 없어 임신부가 출산하려면 타 지역으로 원정을 나서야 한다. “1년에 태어나는 양양군 내 신생아가 평균 90명 정도”라는 권 소장은 모자보건협회 춘천지구에서 2주에 한 번씩 70대 산부인과 전문의가 왕진을 오면 1층에 있는 자신의 진료실을 내어드린다고 했다.
“양양 인구가 상당히 적습니다. 2만8,000명 중에서 읍에 사는 사람이 1만명 정도고, 1만7,000명은 흩어져 살아요. 양양군 면적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서울과 비슷해요. 그런데 인구는 2만8,000명이에요. 얼마나 황량한 지 아시겠죠? 의사가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에요. 산부인과 전문의 1명, 소아과 전문의 1명을 공공의료시스템의 속초의료원 소속으로 채용하려고 인제군, 고성군, 속초시, 양양군 4곳이 군비와 시비를 걷었어요. 월급도 더 올려서 모셔오려고 엄청 애쓴 걸로 알아요. 그런데 이것도 원활하지 않았어요. 밤에 애들이 열 39도까지 오르면 응급실에 가야 하는데, 의사 혼자 있으면 1년 내내 풀근무 해야 하잖아요. 누가 오겠어요? 그나마 젊은 의사들은 안 오려고 할 텐데, 나이든 의사들이 와서 365일 풀근무하면 건강이 나빠지잖아요. 그래서 아무도 못오는 거예요. 악순환인거죠. 학생들한테 이걸 다 설명해줬어요”
그는 학생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현실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의료시스템이 갖춰지려면 인구가 충분해야 하는데, 경영이 어려운 곳에 큰 병원은 절대 들어설 수 없는 현실을 미래 보건의료인들이 알아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여러분도 잘 되면 서울가서 일하려고 할 텐데 누가 태어난 고향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겠냐고, 여러분부터 생각을 바꾸기 쉽지 않을 거라고, 학생 때 열정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순 없다, 세상이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냉혹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한 권성준 소장이지만, 자신만은 이상을 좇으며 살고 있는 점은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그는 양양군보건소로 내려오기 전 한양대 교수이자 위암 명의로 이름을 떨치며 내로라하는 대형병원들의 러브콜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걸 다 뿌리치고 강원도 바닷가 옆 보건소로 온 그는 자신의 말과는 달리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1월 보건소장으로 온 그는 두달 후인 3월 매주 보건소와 5개면 보건지소를 돌며 직접 진료도 진행했다. 보건소는 매주 화요일, 5개면의 보건지소는 매주 목요일 사전예약 주민들을 대상으로 진료했다. 진료과목은 그의 전공인 위장 관련 소화기계통이었다. 의욕을 가지고 진행하던 진료는 아쉽게도 코로나19로 한 달밖에 이어가지 못했다.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들은 얘기 중 제일 행복했던 건, 할머니들이 ‘내 나이가 팔십인데 하얀 가운 입은 선생님 앞에 제일 오래 앉아 있었다’고 하실 때에요. 제가 그 분들 얘기 다 들어드리거든요. 진료도 일일이 그림 그려서 다 설명해요. 혼자 사시면서 저녁 드시고 누워서 티비 보는 게 일상인 어르신들은 역류성식도염도 많이 앓기 마련인데, 식습관을 안 고치면 약을 먹어도 80% 재발하거든요. 이걸 다 설명드리려니 시간이 많이 걸려요. 식생활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얘기하고, 저랑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고. 소꿉장난해야 돼요. 그럼 할머니가 고맙다고 하고 가세요.”
그는 코로나19로 중단됐던 순회진료를 이달부터 다시 재개할 예정이다. 이번에는 단순 진료가 아닌 어르신들에게 의학지식을 알려드리려는 계획도 갖고 있다. 평소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응급상황을 알려 가볍게 여기지 않고 진료를 통해 위험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경로당에 가서 어르신들께 의학지식을 알려드릴 거예요. 예를 들면 어지러워서 쓰러져 5~10초 동안 정신이 없다가 깨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상생활을 하시는데, 이거 상당히 위험한 거거든요. TIA(일과성허혈성뇌졸중)라고 하는, 혈전증이 와서 뇌혈관을 막기 직전에 나타나는 증상인데 빨리 발견해서 치료받으면 살 수 있지만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럴 땐 꼭 정밀검사 받아야 한다고 알려드릴 거예요. 이거 하려고 서울에서 빔프로젝트도 사왔습니다. 추석 이후에 시작하려고 경로당에 연락해놨어요”
지인의 고향이 양양이어서 왔다는 권 소장이지만, 봉사정신이 없었다면 과연 이처럼 할 수 있었을까. 그에겐 명성을 기꺼이 내려놓은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여유로움도 엿보였다.
“저는 1980년에 의사가 됐고 40년 넘게 대학병원에서 환자분들에게 ‘선생님’ 소릴 들으며 대접받았습니다. 너무 감사했어요. 정년퇴임까지 얼마나 의사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껏 받은 고마움을 돌려드리고 싶었어요. 한 명에게라도 제가 필요하다면 말이에요. 지금은 하루하루가 너무 행복하고, 환자분들이 인사하러 오실 때마다 보람을 느낍니다”
양양군에서도 속초와 더 가까운 강현면에서는 한 환자가 배차 간격 30분인 버스를 타고 자신을 찾아와 30년간 고생했던 질환이 선생님 덕에 나았다며 인사를 전했다고 했다. 또 강원도 고성에 사는 한 할아버지는 권 소장에게 고맙다며 고추를 따 온 적도 있다. 권 소장은 90도로 인사하고 받았다며 “그런 마음이 상당히 감사했다”고 털어놨다. 교통수단이 변변찮은 지역에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기 위해 힘들게 찾아온 이들의 마음을 알기에 송구스러웠다고도 했다. 이처럼 권 소장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법한 왕진가방을 든 시골 의사 선생님으로서의 삶에 만족하는 듯 웃었다.
“이곳에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은 대소변도 혼자 집안에서 보시고 위생적으로 안 좋은 경우가 많아요. 한 번은 90세 할머니가 혼자 계신 집에 방문했는데, 귀가 잘 안들리셔서 말씀드릴 때 소리쳐야 했어요. 할머니 손도 잡아드렸고요. 꼭 한 번 해보고 싶던 일이어서 좋았습니다”라는 그는 이제 편안해서 좋다고 말했다. 사명감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사명감이 있다면 오지의 보건소로 오려는 사람이 조금씩 늘지 않겠느냐는 말도 전했다.
“대학병원에 있을 적에는 시간이 부족해 3분 진료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편안해요. 환자 한 사람한테 집중할 수 있는 진료 방식이 가장 기분 좋아요. 특히 직접 어르신들을 찾아가서 진료한 건 감동이었어요. 경로당 순회강연도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할 생각이에요. 임기는 이제 반 년 남았는데, 끝나고 연장을 해야할 지 고민 중이에요. 아직 확정된 건 없습니다”
추석 연휴가 지나고 경로당 순회진료와 강연에 대한 열정을 내비친 권성준 양양군보건소장. 그는 남은 임기 동안 왕진가방을 들고 다시 양양군을 누빌 생각이다. 임기 후 그의 삶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그에겐 임기 후 행보를 고민하는 것보다 당장 찾아오는 환자를 돌보는 일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대학병원에서의 명성있는 삶은 멈췄지만, 작은 시골마을 환자들과 소통하는 명의로서의 삶은 멈추지 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