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별기획] 한국약업 핫이슈 100선
약업신문을 통해 바라 본 한국약업계 70년 파노라마
입력 2024.03.28 16:06 수정 2024.04.0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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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업신문 창간 70주년..약업계 핫이슈 100選

 

 ‘약업신문’은 창간 70주년을 맞아 첫호가 발행된 1954년부터 2024년 현재까지 지난 70년 동안 약업계를 뜨겁게 달궜던 70개 핫이슈를 선정‧정리하면서 시간여행을 떠나는 자리를 마련해 봤다. 1954년 당시 국내의 의약품 생산실적은 총 5,647만7,000원 정도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된 반면 2022년에 이르면 28조9,503억원 규모에 달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고, 우리나라는 일약 세계적인 제약강국으로 부상했다. 2022년의 의약품 생산실적이 당해연도 국내 제조업 전체 생산실적에서 점유한 몫은 5.25%에 이른 것으로 집계됐다. 이처럼 약업계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는 동안 때로는 약업계의 성장을 견인했고, 때로는 업계 발전의 시계추를 뒤로 돌렸던 핫이슈들을 반추해 본다. 지난 70년 동안 ‘약업신문’은 약업계와 호흡을 같이하면서 영광과 오욕의 순간들에 동행했고, 핫이슈가 명멸한 현장에 늘 함께 했음을 덧붙여 둔다. <편집자 주>

-1954년 약사법(藥事法) 제정..약무행정 기틀 마련
-원조자금으로 1950년대 중‧후반부터 제약 인프라 구축
-‘항생물질 붐’ 제약업 부흥 견인..산업화 이전 대표적 산업으로
-정제(錠劑)로 첫선 ‘박카스’ 액제 전환 후 ‘국민 드링크’로
-IMF 전대미문 위기 직면한 제약업계..밀레니엄 버그?
-‘선플라’ 허가 국산신약 시대 도래..‘팩티브’ FDA 승인 개가
-의약분업 전면시행..의료제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유한양행, 2014년 국내 제약 최초 ‘1조 클럽’ 가입
-2016년 김영란법 시행 제약영업에 일대 파장
-‘문재인 케어’, ‘코로나19’, 의대증원 등 핫이슈 부각

 

1. 약사법 공포 (1953년 12월 18일)
 1953년 11월 30일 전문 8장 60조 전문으로 구성된 약사법(藥事法) 법안이 재석 100명 중 찬성 90표로 가결을 거쳐 같은 해 12월 18일 법률 제300호로 제정‧공포되어 마침내 시행에 들어가면서 약무행정의 기틀이 비로소 본궤도 위에 올려졌다. 사실 약사법은 한국전쟁 직전에 당시 전규방(全圭芳) 약정국장 서리 등이 초안을 작성한 상태였으나, 동란의 와중이었던 1952년 여름부터 새로운 안(案)을 마련하는 작업에 착수한 끝에 제정될 수 있었다.

 2. 완제의약품 수입 전성기..국산화 수입대체 전략 (1950년대 중반)
 산업기반이 취약했던 데다 전란으로 인해 전국토가 폐허로 변해버린 불모의 현실 속에서 1950년대 중‧후반까지 제약산업은 수입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완제의약품 수입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에 정부는 1950년 중반부터 외제 의약품 국산화 대체를 근간으로 하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덕분에 제약산업은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착수되었던 1962년 이전에 ‘수입대체공업’으로 확고한 성장판 위에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1960년대 초반 대방동 유한양행>

 

3. 종전(終戰) 직후 약학대학 신설 붐 (1950년대 초‧중반)
 서울대와 이화여대 2곳에 불과했던 약학대학이 1950년대 들어 한국전쟁 종전(終戰) 직후부터 신설 붐이 이어지면서 전국 각지에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1953년 서울의 성균관대, 중앙대, 숙명여대와 부산의 부산대, 대구에서 효성여대(현재의 대구가톨릭대학) 약학과가 각각 신설된 데 이어 1954년 대구대(현재의 영남대) 약학대학이 출범했다. 이 해에는 서울에서 덕성여대와 동덕여대에 약학과가 각각 신설됐고, 지방에서는 호남에서 유일하게 조선대학교 약학대학이 출범의 맟을 올렸다. 뒤이어 1955년 동양의약대(현재의 경희대)에, 1956년에 충북대에 각각 약학과가 설치됐다.

< 전쟁직후의 대한약학회 총회. 뒷줄 왼쪽에서 1번째 고 홍문화박사의 모습이 눈에 띈다>

4. 제 1회 약사 국가시험 시행 (1955년)
 1954년 전국의 면허등록 약사수는 총 1,499명이었다. 당시 서울의 인구수는 157만명이었다. 약사법이 공포됨에 따라 1955년에 처음으로 약사법에 의한 약사 예비시험 및 약사 국가시험이 시행됐다.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자료에 따르면 이 해에 189명이 응시하고 171명이 합격해 90.5%의 합격률을 기록했다. 이 때의 약사 국가시험 응시자들은 경성약학전문학교의 후신인 서울약학대학과 해방 직전 설립된 이화여대 약학대학 졸업생들이었다.

< 제1회 약사국시 시행을 보도한 약업신문 1954년 11월2일자 신문>


5. 해방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제약기업 대거 참가 (1955년)
 1955년 10월 1일 해방 1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산업박람회가 창경원에서 막을 올려 11월 30일까지 성황리에 진행됐다. 국산품 장려와 산업부흥을 목적으로 국내 최초로 개최된 산업박람회에 대한약품공업협회(현재의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특설관’을 설치하고 국내생산 의약품을 대거 전시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전국 제약시설의 80% 이상이 파괴되었던 현실에서 제약기업들의 대대적인 참가가 이루어진 것은 우리나라가 아직 본격적인 산업화 단계로 접어들기 이전에 섬유공업 등과 함께 국내 제조업을 대표하는 업종의 하나로 군림했던 제약산업의 위상을 입증해 보였다.

< 광복 10주년을 기념해 열린 산업박람회. 1955년 당시 제약회사들이 주요 참여기업으로 이름을 올렸다.>

 

6. 제약 인프라 구축 젖줄 ‘ICA 外援자금’ 수혈 (1950년대 중‧후반)
 정부는 당시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국산의약품 생산업의 조속한 부흥을 위해 1950년대 중‧후반에 미국 국제원조협력처(ICA) 자금을 지원했는데, 이때 지원된 ICA 자금은 당시 화폐단위로 112만3,352달러에 이르는 규모였다. 이처럼 해외원조 가운데 미국 국제원조협력처의 외원자금(外援資金)은 제약업계에 매년 40만 달러 안팎의 규모로 1955년부터 1961년까지 지속적으로 수혈됐다. 원조자금을 수혈받은 제약사들은 구미(歐美)의 최신설비를 도입해 사세를 크게 확장했고, 제약업의 재기와 부흥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 미국 국제원조협력처(ICA) 자금지원을 받아 성사된 동아제약 공장 준공식. 사진 가운데가 강중희사장. 맨 오른쪽은 당시 부흥부차관이던 신현확씨 모습도 보인다.

7. ‘藥의 날’ 제정 (1957년 11월 18일)
 정부는 일반국민들에게 약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자 약사법 제정 공포일을 기해 1957년 11월 18일을 ‘藥의 날로’ 제정했다. ‘藥의 날’은 보건사회부가 1957년 10월 10일 ‘약사법 제정일’을 기념하기 위해 11월 18일부터 일주일을 ‘藥의 날 주간’으로 제정한 것이 시초이다. 그 후 이듬해 보사부와 약사단체 대표자들이 약사법 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 정식으로 상정된 날이었던 10월 10일로 ‘藥의 날’ 기념일을 변경한다는 데 의견을 결집했다. 제 2회 기념행사 때부터 민간단체의 주도로 이관된 ‘藥의 날’은 정부의 각종 기념일 통합‧조정에 따라 ‘보건의 날’로 통합된 후 1972년 제 16회 행사를 끝으로 중단됐다.

8. 제약산업 부흥 디딤돌 항생제 활기 ‘항생물질 붐’ (1958년경)
 신한합동(新韓合同)이 제 1호로 허가를 취득한 데 이어 계림화학과 태극약품이 차례로 항생물질 제조 허가업체로 이름을 올리면서 1958년경부터 바야흐로 ‘항생물질 붐’이 조성됐다. ‘항생물질 붐’의 조성은 한국전쟁 당시의 군사적 필요성과 수요에 따라 페니실린과 스트렙토마이신 등 막대한 양의 항생제들이 수입되면서부터 맹아가 싹튼 결과물이었다. 그 후 정부가 막대한 외화를 들여 항생제를 수입에 의존하는 것은 국가적인 손실이라는 판단에 따라 정경모(鄭景謨) 약정국장의 아이디어로 정부와 민간에서 각각 1억원을 투자해 대한약품공사를 설립하면서부터 항생물질을 생산하겠다는 구상이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9. ‘대한약전’(大韓藥典) 제정‧공포 (1958년)
 품질수준을 높이기 위해 의약품의 국가규격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은 1953년 약사법이 공포된 직후부터 실행에 옮겨졌다. 1954년 12월 6일 개최된 제 1차 약전위원회는 ‘대한약전’이 제정될 때까지 종전의 관례에 따라 잠정적으로 일본 약국방 제 5개정을 준용할 것과 약전의 편찬에 필요한 약전위원회 규정 및 분과위원회 규정을 통과시켰다. 그 후 1958년 1월 10일 제 6차 약전위원회에서 총괄적 심의를 진행했다. 이 같은 작업을 거쳐 마침내 1958년 10월 10일 제 2회 ‘약의 날’에 보건사회부 고시 제 25호로 ‘대한약전’이 제정‧공포됐다.

10. 의약품 도매‧수입업소들의 제약업 진출 (1950년대 말)
 의약품 도매업계는 피난지 부산에서 오히려 세(勢)를 키워 환도 직후부터 영업을 재개하면서 10여년 동안 화려한 꽃을 피웠지만, 1950년대 말부터 위축이 가속화되자 도매상들이 업종을 전환해 돌파구를 모색하는 사례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한 예로 서독 훽스트 제품들을 수입하던 연합약품이 1959년 한독약품으로 제약업에 진출했고, 영진물산 또한 영진약품으로 변신했다.

11. 238개 제약업소 무더기 허가취소 (1959년)
 1959년대 7월 보사부는 제조허가만 받아놓고 실제로는 제품을 생산하지 않은 업소들과 1957년 말 실시한 제조업 허가등록증 갱신 시에 이를 이행하지 않은 곳들을 대상으로 무더기 허가취소 조치를 단행했다. 약사법 시행 이전에 허가를 얻은 업체들이거나, 약사법 42조에 의거해 실제로 생산활동을 하지 않은 유명무실한 제약업소들이 일제히 정비된 것이다.

12. 의약품 수출 100만 달러 돌파 (1960년)
 1950년대 말부터 국내업체들의 의약품 생산이 활기를 띄면서 점차로 완제의약품의 수입은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국내시장을 석권했던 수입 완제의약품은 1958년을 고비로 그 위세가 점차로 꺾였고, 수출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초창기 수출품목은 한약재와 인삼제제가 대부분이었지만, 점차 약전약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1955년 전체 의약품 수출액이 13만4,092달러, 1956년 19만2,409달러, 1957년 39만753달러, 1958년 68만1,727달러, 1959년 91만5,941달러 등을 거쳐 1960년 104만2,267달러를 기록하면서 마침내 100만 달러 고지를 돌파했다.

13. 외국인 합작투자‧기술제휴 시동 (1960년)
 국내 제약업계에서 가장 먼저 외국 메이커와 기술제휴를 맺고 외국상표를 붙인 의약품을 시판하기 시작한 곳은 1959년 4월 28일 창립된 한독약품이었다. 그 후 1960년 1월 1일 정부가 ‘외채 도입촉진법’을 제정‧공포함에 따라 합작투자 및 기술제휴에 대해 비로소 제도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국내 제약업계에 바야흐로 기술제휴 붐이 조성됐다.

14. 국내 제약업계 레전드 ‘박카스’의 탄생 (1960년)
 구호물자를 통해 한국전쟁 이전부터 국내에 대량으로 들어온 덕분에 익숙한 제품이었다는 데 주목한 제약업계는 1960년대 초부터 종합비타민제와 복합비타민제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특히 1960년 5월 기타의 자양강장변질제로 첫선을 보인 동아제약의 피로회복제 ‘박카스’는 정제와 앰플 내복액을 거쳐 1963년 8월 제형의 액제화와 용기(容器)의 대형화로 방향을 틀어 선보인 ‘박카스 디’가 보사부로부터 허가를 취득하면서 본격적인 ‘박카스 신화’를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 드링크의 대명사가 된 동아제약 박카스 D 

15. 유한양행 국내 제약기업 최초 기업공개 (1962년)
 유한양행은 일찍이 1958년 10월 임직원 복지를 위해 국내 최초로 우리사주제를 시행했다. 1962년 들어 외국의 유명 제약기업들과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하기 시작한 유한양행은 국내 제약업계 최초이자 국내 민간기업 전체적으로 볼 때도 두 번째(국영기업까지 포함하면 5번째)로 기업공개를 단행하면서 주식을 상장했다. 아울러 자본과 경영을 분리해 현대적 경영체제를 갖추면서 우리나라 기업경영의 모범이 됐다. 1962년 10월 5일 재무부 장관의 인가를 얻어 11월 1일 주식 80만 주가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직후 유한양행 주식은 액면가의 6배로 거래됐다.

 

16. 국민보건 역행한 ‘보건제’ 파동 (1963년)
 1963년 들어 미국 의회가 해외원조 삭감안을 논의하기 시작하자 원료공급난과 원‧부자재 수급차질이 제품생산과 자금순환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제약업계 또한 각종 원조금으로 원료의약품을 수입해 완제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방식으로 성장해 올 수 있었던 데다 전체 원료의약품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했던 만큼 큰 여파가 우려됐다. 실제로 행정당국은 비타민제 등의 보건제 의약품을 사치품으로 규정하고 향후 신규허가 뿐 아니라 원료배정에서도 누락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광고중단이 확산되고 대한약품공업협회 임원진 전원이 사퇴하는 등 메가톤급 후폭풍을 몰고 왔다. 당시는 의약품 광고가 전체 TV, 라디오 광고의 50% 이상을 점유하던 시기였다.

17. 의료보험법 최초 제정 (1963년)
 우리나라에서 의료보험법이 처음으로 제정된 것은 지난 1963년 12월의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법률에 강제적용 규정이 부재했을 뿐 아니라 희망에 따라 보험조합을 결성해 의료보험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수준에 그쳐 법적인 근거를 마련했다는 선언적인 의미 이상의 실질적인 의미를 찾기란 어려웠다.

18. 국가재건최고회의, 약사법 전면개정 공포 (1963년 12월)
 1953년 11월 13일 제정되고 같은 해 12월 18일 법률 제 300호로 공포된 ‘약사법’은 1954년 8월 3일 동법(同法) 시행규칙이 마련됨에 따라 발효되기 시작해 일제시대부터 약사관계를 규율해 온 ‘약품 및 약품업업 취체령(取締令)’을 대체했다. 약사법은 이후 전면적인 개정‧보완을 단행해야 할 필요성이 고개를 들면서 수많은 개정을 거치게 되지만, 1963년 12월 13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해 가장 많은 손질이 가해져 전면개정이 이루어졌다.

<1953년 제정된 약사법은 이후 개정을 거듭나게 된다. 사진은 1963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회의 모습>



19. 特關稅와 네거티브 시스템 도입 파장 (1964년)
 1964년 6월 12일 정부가 사치성 물품과 불요불급 품목의 수입을 억제하기 위해 제정한 임시 특별관세법(약칭 특관세법)에 일부 의약품이 부과대상 품목에 포함되어 제약업계와 의약품 수입업계가 버거운 특관세의 부담으로 위축을 면치 못했다. 정부는 뒤이어 가장 유효한 수입억제책으로 자리매김해 왔던 ‘수출입 링크제’를 1967년 7월 25일 폐지했고, 또한 수입제한 품목수를 줄여 나가던 무역정책의 기조를 ‘포지티브 시스템’에서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전환하면서 무역자유화의 물꼬를 텄다.

20. 약학대학 신설 반대 파문 (1964년)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약사의 과잉배출’과 ‘약학교육의 질적 저하’라는 또 다른 현안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학의 지방분산 정책과 지역 균형발전을 이유로 들면서 1965년 1월 5일 정원 40명 규모의 원광대학교 약학과 신설이 문교부의 정식인가를 취득하자 약사회 내부적으로 강력한 반대여론과 투쟁이 고조됐다.

21. 메사돈 파동 (1965년)
 1960년대 초 무렵부터 중독성을 띈 정체불명의 약 문제가 표면화하기 시작하면서 고개를 든 후 1965년에 터져나온 ‘합성메사돈 파동’은 약업계의 치부를 드러낸 사건으로 남아 있다. 이전부터 호남지방과 도서지방을 중심으로 일부 진통제가 마약중독 환자들에게 공급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보건연구원에 검정이 의뢰되었음에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아 공전을 거듭하던 중 1965년 5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이창기(李昌紀) 약사팀에 의해 부정 진통제 설파디메톡신으로부터 합성마약 메사돈(Methadone)이 검출되면서 항간의 루머가 사실로 확인됐고, 마침내 꼬리가 잡혔다. 이에 6월 합동수사본부가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면서 20여 제약회사들이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합성마약 메사돈사건은 당시 일반 언론에서도 연일 대서특필 할 정도로 전국민적 관심사가 되기도 했다>

 

22. 불량 항생제 파동..제약업계 도마 위에 (1965년)
 메사돈 파동의 여파가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에는 함량이 부족한 이른바 ‘밀가루 항생제’ 유통과 관련한 또 다른 루머가 떠돌기 시작했다. 1950년대 말에 이전까지 100% 수입에 의존했던 항생제를 거의 국산으로 대체할 수 있기에 이르렀지만, 과당경쟁이 치열해지더니 급기야 상식을 벗어난 가격파괴 양상으로 치달았다. 이에 의심을 품은 허용(許溶) 약정국장의 지시로 각 지방에서 비밀리에 항생제 30여종을 수거해 검정을 진행한 결과 함량이 50~60% 수준에 불과하거나, 심지에 10%에 불과한 “무늬만” 항생제들이 굴비 엮이듯 대거 적발되면서 철퇴가 가해졌다.

23. 동아제약 특판 ‘DSC 제도’ 도입 (1965년)
 1965년 들어 동아제약이 특수판매 형태의 독자적인 시판기구로 DSC(Dong-A Sales Circle) 제도를 도입했다. DSC 제도의 도입은 크게 늘어나던 ‘박카스D’의 매출에 정체현상이 나타났고, 원인을 분석한 결과 도매상에서 소매약국으로 필요량이 제대로 공급‧배분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으로 밝혀짐에 따라 소집된 동아제약 간부회의에서 소매 직거래를 골자로 하면서 약국과 직접 특약점 계약을 맺는 형태로 공급이 원활해질 수 있도록 하는 데 의견이 모아짐에 따라 채택됐다. 특약점 제도로 채택된 DSC 제도는 의약품 도매업계가 그토록 반대해 왔던 제약기업의 적거래 방식이 크게 확산될 것임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24. 제약산업, 수입대체산업으로 飛上 (1960년대 중반)
 제약산업은 정부가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한 1962년 이전부터 수입대체공업으로 급속하게 성장했다. 덕분에 국내의 의약품 생산실적은 1960년에 10억원 고지를 돌파하면서 12억8,188만1,000원(의약품 12억6,595만원+위생용품 1,593만1,000원)을 기록한 데 이어 1963년까지 연평균 66.6%에 달하는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폐허를 딛고 불과 10여년 만에 근대적인 산업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 제약산업은 1968년 들어 의약품 생산액이 국민총생산(GNP)의 1%를 처음으로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다.

25. 정찰제‧표시가제 대두 (1966년)
 정찰제 실시의 제도화를 위해 1966년 3월 보사부령 제 173호(1966년 3월 10일)로 약사법 시행규칙이 개정되어 27조 9항과 10항이 신설됨에 따라 5월 1일부터 강력한 소매가격 표시제가 시행됐다. 보사부는 이후 가격준수 강제규정을 삭제하고 소매가만을 표시토록 하는 방향으로 정책전환을 모색해 6월 4일 말썽 많았던 약사법 시행규칙을 개정했다.

26. 서독 뤼브케 대통령 한독약품 방문 (1967년 3월 2일)
 한독약품은 1964년 서독 훽스트와 합작계약을 체결하면서 모범적인 합작투자 선례로 기록됐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1967년 우리나라를 국빈방한한 서독의 카를 하인리히 뤼브케(Karl Heinrich Lübke) 대통령이 3월 2일 오후 한독약품 상봉동 공장을 방문했다. 뤼브케 대통령의 한독약품 방문은 한국약업 사상 전무후무한 외국정상의 국내기업 내방사례라는 기록을 남겼다.

< 독일의 하인리히 뤼브케(Karl Heinrich Lübke) 대통령이 한독약품 상봉동 공장을 방문, 김신권 사장 등과 환담을 나눴다.>
 


27. 아시아 약학회의(FAPA) 서울총회 개최 (1968년)
 1968년 9월 17일 약업계는 제 3회 아시아 약학회의(FAPA) 대회와 제 2회 아시아 약학회의를 개최해 당시로는 초유의 국제행사를 치러냈다. 이 대회는 약전제정위원회, 약학교육기구위원회, 정보교환위원회 등의 설치를 결의해 FAPA 발전에 뚜렷한 획을 남겼다. 그 후 우리나라는 14년만이었던 1982년 8월 24일 제 9차 FAPA 대회를 서울에서 재차 개최했다. 아울러 2002년에도 제 19차 FAPA 총회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28. 종근당, 국내 최초 FDA 공인 (1968년)
 1967년 우리나라의 의약품 수입액이 1,036만 달러에 이른 반면 수출은 고작 139만 달러에 불과했던 현실에서 종근당은 수출의 활로를 트기 위해 사운을 걸고 나선 끝에 1968년 10월 29일 항생제 클로람페니콜이 FDA의 공인을 획득했다. 국내 제약기업이 FDA의 공인을 획득한 것은 종근당이 최초였다. 이듬해 종근당은 일본 산쿄제약(三共製藥)에 63만 달러 상당의 항생제 클로람페니콜을 수출했는데, 이것은 국내 항생제 수출 제 1호였다.

29.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 공포 (1969년)
 1960년대 말에 들면서 부정‧불량식품, 화장품, 무허가 의약업자 등이 횡행함에 따라 여론이 비등하자 정부는 부조리를 발본색원하기 위해 1969년 8월 4일 ‘보건범죄 단속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공포했다. 부정식품 및 첨가물, 부정의약품 및 부정유독물의 제조나 무면허 의료행위 등의 범죄에 대하여 가중처벌 등을 함으로써 국민보건 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 이 법은 대단히 위협적인 특별조치법이었던 까닭에 제약업계를 크게 위축시켰다.

30. 6개 치료제 대중광고 금지 (1969년)
 의약품 오‧남용 방지 차원에서 중독성이나 습관성이 있는 항생물질 제제를 비롯한 6개 특수치료제에 대한 대중광고를 금지하는 내용의 약사법 시행규칙 개정안이 1969년 2월 19일 확정됐다. 이에 따라 결핵치료제, 암 치료제, 피임제, 성호르몬제, 나병치료제 및 항생물질제제 등의 일반신문, 라디오 및 TV 등에 대중광고가 금지되고, 의약계 전문신문 또는 전문잡지만으로 광고범위를 제한받게 됐다. 1969년은 전체 광고시장 ‘톱 10’ 가운데 8개가 제약회사 광고였을 정도로 광고업계에서 제약사들의 위세가 대단하던 시기였다.

31. 습관성 의약품 관리법 제정 (1970년)
 오‧남용으로 인한 보건위생상의 폐해를 방지하고 국민보건 향상에 기여하고자 습관성 의약품 관리법이 1970년 8월 7일 법률 제 2230호로 제정‧공포됐다. 습관성 의약품 관리법의 제정은 당시 대마초가 이른바 ‘해피 스모크’ 등으로 만들어져 폐해가 만연되면서 사회문제로 번지기에 이르자 이를 단속하기 위한 법적근거를 마련한다는 배경에서 단행된 조치였다.

32. 인공감미료 싸이클라메이트 파동 (1970년)
 1969년 말 미국에서 인공감미료 싸이클라메이트가 발암성 물질로 판명되자 보사부는 1970년 2월부터 싸이클라메이트가 함유된 제제들에 대한 전면 판매금지 조치를 단행했다.이로 인해 드링크제의 판매가 20%나 격감하고 수액제와 소화제의 수요도 큰 폭으로 뒷걸음치는 등 약업계는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33. 토코페롤D 파동 (1971년)
 1972년 액제 치료제 제삼화학의 토코페롤D가 허가취소 조치를 받았다. 이는 토코페롤D에 대한 국립보건연구원의 재검정 결과 치료제로 허가될 수 있는 비타민E의 함량이 하한선인 50mg에 크게 미달하는 20mg에 불과한 사실이 드러나자 보사부가 조치를 내린 것이었다. 보사부는 뒤이어 토코페롤D에 대해 드링크제로 효능을 지시하는 한편 국세청에 물품세를 부과토록 요청했다.

34. 삼아약품, 국내 최초 ‘週 5일 근무제’ 도입 (1972년)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週 5일 근무제’ 시대가 열린 것은 2002년 10월 근로자의 삶의 질 향상을 제출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이듬해 8월 국회를 통과한 것이 기점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훨씬 이전이었던 1972년에 국내기업 최초로 삼아약품이 ‘토요일 휴무제’라는 명칭으로 당시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週 5일 근무제’를 도입해 화제를 뿌렸다.

35. 종근당, 국내 제약기업 최초 중앙연구소 설립 (1972년)
 종근당은 제품의 품질관리와 신제품 개발을 위해 연간 매출액의 5~10%를 연구‧개발비로 투입하면서 낙후된 국내 연구풍토에 개혁을 시도하고 선진국 수준의 연구시설을 완비하려는 구체적인 계획을 실천에 옮긴 끝에 1972년 5월 신도림동 공장 B동에 국내 제약기업 최초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했다.

<종근당은 국내제약 최초로 중앙연구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36. ‘원료의약품 보호제도’ 도입 연구‧개발 장려 (1975년)
 보건사회부는 국내 의약품의 개발의욕을 높이고 신약에 대해서는 동일품목에 대한 타사(他社)의 허가를 제한하기 위해 신약보호에 관한 규정을 마련, 1971년 약사법 개정시 모법에 명문화시켰다. 원료의약품 공업을 육성한다는 대명제를 전제로 ‘원료의약품 보호제도’를 성안한 보건사회부는 마침내 1975년 10월 국내에서 최초로 합성에 성공한 원료의약품에 대해 보호‧육성을 위해 5년 이내의 기간 동안 동종(同種) 의약품의 허가를 보호하는 약정시책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동명산업(東明産業)의 광범위 항생물질 카나마이신(kanamycin)이 제 1호 대상품목으로 지정됐다.

37. 例規 238호 사건 (1975년)
 의약품 허가행정에서 특허 여부를 참작하지 않기로 결정한 예규(例規)를 삭제한 데서 비롯된 이른바 ‘例規 238호 사건’은 1975년의 국내 제약업계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었다. 원래 例規 238호란 1970년 2월 제정‧공포된 것으로 그 골자는 “신약의 제조허가는 특허를 받은 품목을 심사의 대상으로 한다”고 규정해 특허와 제조허가를 연계시킨다는 것을 법제화시킨 것이었다.

38. ‘약효 재평가 사업’과 밀가루藥 시비 (1975년)
 1975년 들어 정부는 제약업계의 국제경쟁력 배양을 위한 약정정책의 일환으로 ‘약효 재평가 사업’의 착수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약효 재평가는 제조허가를 취득하고 생산되어 시판 중인 의약품이라고 하더라도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과학의 레벨에 맞는 평가방법에 의해 유효성과 안전성을 재검토하는 일을 말한다. 컴퓨터 용어에 비유하면 일종의 업그레이드(upgrade)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1975년 7월 8일 약효 재평가 1차년도 사업분에 해당하는 5개 약효군, 19개 성분, 460개 품목에 대한 평가결과가 발표되자 TV와 일간신문 등에서 “지금까지 밀가루藥이 사용됐다”는 식의 잘못된 보도를 쏟아내면서 어처구니 없는 부작용이 불거졌다.

39. 의약품 도매업계 越境 파문 (1976년)
 1976년 들어 다른 지역이나 타도(他道)의 대형 의약품 도매상이 대전‧충남과 부산‧경남지역 등에 진출을 추진했던 일을 둘러싸고 법정다툼 직전까지 비화되어 약업계를 들끓게 했다. 이 파문은 해당 의약품 도매상이 지점개설과 고소를 동시에 철회함으로써 겨우 일단락됐다. ‘향토 약업권 수호’와 ‘의약품 유통의 광역화’라는 양측의 팽팽한 논리가 정면충돌한 의약품 도매상의 월경 파문은 뒤이어 1979년 의약품 도매상의 월경영업 행위에 대한 보사부의 유권해석이 발단이 되어 재연된 데 이어 1988년 1월에도 다시 한번 고개를 들면서 일파만파를 몰고왔다.

40. 개국약사 10,000명 돌파..과잉배출 이슈화 (1976년)
 1970년부터 1979년 사이의 10년 동안에만 총 9,713명의 신규약사들이 배출되어 연평균 971명의 약사가 증가했다. 급기야 1976년에 개국약사 수가 처음으로 10,000명을 돌파한 가운데 이 해 12월 말 현재 보사부에 등록된 약사면허 소지자 수가 총 20,742명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약사의 수적인 팽창은 약국개설의 급증과 약국간 과당경쟁, 약가질서의 문란, 개별약국의 영세화라는 부작용을 잉태하는 원인으로 작용해 과잉배출이 이슈화됐다.

41. 의료보험제도 최초 시행 (1977년)
 복지국가를 지향한 사회보장제도로 의료보험이 1976년 의료보험법의 대폭 개정으로 강제적용 규정이 새로 삽입된 데 이어 1977년 7월 1일 500인 이상의 사업장과 공업단지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처음 시행에 들어갔다. 의료보험제도는 복지사회의 구현을 앞당기겠다는 정부의 의지에 따라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했고, 마침내 1989년 전국민 의료보험시대를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42. 대규모 제약 클러스터 조성사업 (1977년)
 국내 제약기업들은 1970년대 중반 무렵부터 시설확장의 필요성을 절감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1977년 초 건설부가 과밀화 억제, 공해업소 외곽이전, 산업합리화 등을 이유로 수도권 공장 신‧증축 금지조치를 발표하고 나섰다. 급기야 정부가 ‘수도권 정비계획법’과 ‘공업배치 및 공장설립에 관한 법률’(공업배치법)을 제정하기에 이르자 서울 강북지역에 밀집한 중‧소 제약사들에게 공장이전이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이 때 ‘솔로몬의 묘안’으로 대단위 제약공업단지 조성방안이 등장했고, 대한약품공업협회(현재의 한국제약바이오협회)가 1978년 당시 정부가 추진 중이었던 산업합리화 대책에 제약산업의 클러스터화를 통해 효율화를 도모하는 제약공업단지 조성방안을 포함시켜 줄 것을 건의한 끝에 수용되었고, 1979년 6월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상신리 일대가 제약공업단지 입지로 지정됐다.

43. 부가가치세 도입 약업계 전방위 압박 직면 (1977년)
 세제(稅制)의 단순화와 근거과세의 구현을 목적으로 하는 개혁 취지에서 1977년 7월 1일부터 부가가치세 제도가 도입됐다. 새 제도가 시행되자 제약기업들의 영업정책에서부터 약국의 경영관리 개념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던 데다 의약품 유통구조에도 변혁의 계기로 작용했다. 심지어 부실 의약품 도매상이 자진폐업하는 등 모든 세무자료의 양성화를 골자로 한 부가가치세의 도입이 주는 심리적 압박감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44. 의약품 유통일원화 발표 해프닝 (1980년)
 1980년 10월 16일 취임 한달여가 지난 시점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한 천명기(千命基) 보사부 장관은 약가인하책을 발표하면서 고질적 병폐인 의약품 유통질서의 정화와 약가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약국 직거래를 금지하고 제약기업->의약품 도매업소->약국을 잇는 유통계로(流通系路)의 일원화를 추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날 발표는 제약업계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촉발시킨 끝에 한달여 만이었던 11월 4일 약사단체장들을 초치해 열린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조찬회’에서 장관이 수습에 나서면서 원점회귀됐다.

45. 의약분업 시범사업 시행착오 (1982년)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전제요건이라 할 수 있는 의약분업이 과연 진정으로 가능한 것인지 등을 검증하고 관련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문제가 부각됨에 따라 1981~1982년에 3차례에 걸친 시범사업이 진행됐다. 1980년 10월 2종 의료보험(현행 지역의료보험) 시범지역으로 강원 홍천, 전북 옥구, 경부 군위 등 3개 지역 선정을 거쳐 이듬해 7월 시범사업이 착수됐다. 하지만 진행과정이 형식적인 임의분업 형태로 이루어짐에 따라 완벽한 실패로 귀결되고 말았다. 1982년 7월부터 전남 목표, 경기 강화, 충북 보은 등 시범지역이 3곳 추가됐지만, 완전의약분업 시행을 주장해 왔던 약사회 측의 요구가 좌절되면서 약사면허 반납과 약국폐문 결의 등 파문으로 치달았다.

46. 원료‧완제의약품 수입자유화 “충격” (1983년)
 1980년대 들어 정부는 기술혁신과 산업의 국제화를 표방하면서 모든 분야에서 단계적으로 개방을 추진하겠다는 경제정책 플랜을 내놓았고, 이처럼 경제정책 기존에서 근간의 한축을 형성한 ‘수입자유화’로부터 제약산업도 결코 예외일 수는 없었다. 결국 1983년 1월 11개 원료의약품과 26개 약효군 완제의약품에 대한 1단계 수입개방을 시작으로 1980년대 후반들어 개방이 거의 완료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정부는 1989년 7월 1일 외국인 투자지침을 개정해 의약품 도매업의 경우 개정 직후부터, 의약품 제조업은 1990년 1월부터 외국인 투자제한업종에서 자유업종으로 전환토록 하는 조치를 내렸다.

47. 코오롱, 재벌의 제약업 최초 진출 (1983년)
 1980년대 초부터 재벌기업들의 제약업 진출이 속속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코오롱그룹이 1983년 2월 삼영신약을 인수한 것을 발단으로 이듬해 삼천리산업이 삼천리제약을 출범시켰고, 1985년에는 제일제당이 제약사업부를 신설했다. 선경그룹 또한 1986년 선경합섬연구소 정밀화학연구실 의약연구팀을 신설했고, 이듬해 선경합섬 의약사업본부를 설치하고 생명과학연구소를 발족시켜 기반을 구축하더니 같은 해 12월 삼신제약을 인수했다. 1988년에는 선보제약을 설립한 후 1990년 선경제약으로 개명했다. 이듬해 럭키그룹이 안진제약을, 진로그룹이 조선신약을 인수하면서 앞다퉈 제약업에 뛰어들었다.

48. 표준소매가 제도 탄생..약가정책에 새로운 기틀 (1984년)
 약업계의 오랜 고질병인 표시가와 실제가 간의 괴리를 막고 거래질서를 바로 잡고자 고심해 왔던 보사부는 1984년 8월 1일 약사법 시행규칙 개정령(부령 750호)을 공포하고 동 개정령 44조(의약품 가격의 기재)를 신설해 “의약품의 제조업자 또는 수입업자는 그가 제조하거나 수입한 의약품의 용기나 포장에 보사부장관이 정하는 ‘표준소매가’를 기재토록” 제도화하는 조치를 단행하고 9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표준소매가 제도는 전체 의약품에 대해 자율정찰제를 시행하겠다는 방침을 정부가 표면화함에 따라 새로운 약가제도로 탄생했지만, 시행과정에서 많은 잡음과 문제점을 드러내더니 결국 1999년 1월 전면폐지됐다.

49. KGMP시대 본격 개막 (1985년)
 정부는 우수의약품 생산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1977년 ‘우수의약품 제조관리기준’(KGMP)을 제정하고 자율준수를 권장했다. 당초 1981년까지 제약업계의 자율에 맡기고, 이후로 법제화한다는 방침을 세웠던 정부는 국내 제약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끝에 1984년 6월 20일 새로운 KGMP를 제정‧고시했다. 그 후 1985년 4월 20일 동아제약, 유한양행, 부광약품 등 3곳이 엄격한 심사를 거쳐 KGMP 적격업소로 최초 지정받음에 따라 국내 제약업계에 본격적인 GMP시대가 도래했다.

< KGMP 적격업체 제1호로 지정받은 동아제약 공장 전경>

 


50. 향남 제약공단 조성 본격화 (1985년)
 총 80억7,800만원이 소요된 공동화 제약단지 조성 협동화사업이 1985년 6월 27일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상신리 일대에 조성된 20만평의 부지에서 준공식을 치르면서 마침내 구체화됐다. 대한약품공업협동조합(현재의 한국제약협동조합)이 1980년 11월 15일 중소기업진흥공단으로부터 중소기업 협동화 실천계획을 승인받아 제약공단 조성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한 이 사업은 향남 제약공단에 1989년 12월 현재 의약품 제조업소 37곳, 위생용품 제조업소 2곳 등 총 39개 업체들이 입주하는 성과로 귀결됐다. 약품공업협동조합은 다른 여러 제약기업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989년 11월부터 경기도 안산 시화지구 제 2제약공단 조성사업에도 발벗고 나섰다.

<향남제약공단 기공식 광경>

51. 전국민 의료보험 확대발표..약국의료보험 출범 (1986년)
 보사부는 항생제, 스테로이드제, 향정신성 의약품 등에 대한 규제가 의사와 약사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인정하는 범위 내에서 1984년 4월 12일 제 2종 의료보험(즉, 직장의료보험) 시범지역에서 의약분업을 적용한다는 원칙을 확정하고 5월 1일부터 시행키로 공식발표함에 따라 의료보험제도가 1977년 시행에 들어간 이후 만 7년 만에 약국이 비로소 실질적으로 의료보험에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그 후 1989년 7월 1일부터 약국을 의료보험 요양기관으로 지정하고 의료보험 제도권 내에서 부분분업을 시행키로 결정되는 등 산고를 치른 끝에 이 해 10월 1일부터 약국에서도 보험급여가 개시됐다. 한편 단계적 확대를 거쳐 1989년 3월 9일 새로운 국민의료보험법 개정안이 임시국회를 통과했고, 같은 해 7월 1일 시행 12년 만에 명실공히 ‘전국민 의료보험시대’가 막을 올렸다.

52. 물질특허제도 및 파이프라인 프로덕트 시행 (1987년)
 1985년 1월 16일 국제 의약품특허협회(interpat) 대표단 일행 4명의 한국 방문을 기점으로 고개를 든 물질특허제도의 도입은 1987년 7월 1일 정부가 전면적인 시행에 들어가면서 기술의 예속화를 가져올 핫이슈로 부각됐다. 韓‧美 양국이 해당제품의 정의를 “1980년 1월 이후 미국에서 특허를 취득하고, 한국의 개정특허법 발효일(1987년 7월 1일) 이전에 미국 및 한국에서 시판되고 있지 아니한 제품”들로 규정한 파이프라인 프로덕트(PP: Pipeline Product) 또한 물질특허제도에 못지않게 국내 제약업계에 두통거리로 부각됐다.


53. 외자사 국내시장 진출제한 사실상 철폐 (1980년대)
 1981년 6월 9일 정부가 외국인 투자에 대한 일반지침을 고시하자 보사부는 외자도입업의 외국인 투자 관련규정을 수정하는 후속조치를 취해 국내수급상 필요성이 인정되는 의약품 제조업의 경우 외국인 투자규모의 최저한도가 10만 달러 이상으로 상향조정됐다. 이것은 50% 이상까지 외자 도입이 허용됨을 의미했다. 제약산업 분야에서 외자도입은 1988년 이후로 규제가 더욱 완화되어 외자사들의 국내시장 진출제한은 사실상 철폐됐다.

54. 한미약품, 제약업계 최초 기술수출 (1989년)
 1989년 7월 한미약품이 스위스의 글로벌 제약기업 로슈에 세팔로스포린 계열 항생제 세프트리악손(Ceftriaxone)을 550만 달러에 기술수출하는 개가를 올렸다. 한미약품은 세포탁심(Cefotaxime), 세프트리악손 등의 신규 제조방법을 개발해 제 3세대 항생제 분야에서 강력한 경쟁력을 확보한 끝에 로슈에 로열티를 받고 세프트리악손 제조기술을 수출하는 초유의 개가를 올리면서 국내 제약업계 사상 최초‧최대 기술수출 사례로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 한미약품의 기술수출 계약소식은 일간매체에서도 관심을 갖고 취재전쟁을 벌일 정도로 핫뉴스가 됐다.>


 

55. 한약업사 헌법소원 한약조제권 분쟁 점화 (1989년)
 1989년 7월 26일 전북한약협회 김태진(金兌鎭) 회장이 약사제도 불법운용과 한약업사 업권침해에 관한 헌법소원 심판청구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함에 따라 잠재되어 있었던 한약분쟁이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 후 청구인은 1990년 10월 담당변호사를 교체한 뒤 ‘헌법소원 심판보정 청구서’를 제출하면서 약사법 내에서 해석에 의해 주장하는 종전의 방식이 아니라 약사법의 관련규정 등이 위헌임을 주장하는 전략으로 궤를 수정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1990년은 약사 한약조제의 합헌성 여부가 법조계에 뜨거운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킨 해로 약업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했다. 뒤이어 1991년 헌법재판소의 합헌 판결이 나왔다.

56. 은행잎‧메탄올 랑데부 파동 藥政에 오점 (1991~1992년)
 선경인더스트리가 은행잎 추출물에 대한 제법특허를 취득한 1991년 3월 은행잎 추출물 원료 및 완제품 제조품목 허가신청서를 제출하자 동방제약이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은행잎 파동’이 불거졌다. 이 ‘은행잎 파동’은 해를 넘겨 ‘메탄올 파동’으로 모양새를 달리하면서 1992년 전대미문의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소비자를 위한 시민의 모임(소시모)가 한국소비자보호원에 의뢰한 ‘징코민’ 등에 대한 잔류여부 검사 결과 메탄올이 검출되면서 야기된 파동은 보사부의 약무행정 전반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

< 일부의약품에 대한 성분 검사 결과 메탄올이 검출되면서 보사부의 약무행정 전반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초래하는 위기상황을 맞기도 했다.>

 

57. ‘G7 프로젝트’ 등 신약개발 지원 본격화 (1991년)
 1990년대 들어 본격적인 개방화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국내 제약기업들의 연구‧개발 부문에 빨간불이 켜졌다. 아직 독자적인 신약개발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물질특허가 도입됨에 따라 종전에 비해 기술도입이 크게 어려워진 데다 다국적 제약사들이 기존의 기술제공 또는 기술제휴 방식보다 국내시장에 투자해 직접 진출하는 전략으로 방향을 틀었고, 로열티 부담마저 가중되는 양상이 전개됐기 때문이었다. 이에 보건사회부가 1991년부터 신약개발 연구비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과학기술부는 선도기술개발사업(G7 프로젝트)을 주관하고 나선 가운데 통상산업부, 농림부 등도 개별적으로 추진 중이던 첨단기술 개발 지원사업에 신의약 부문을 포함시켜 신약개발 지원이 본격화됐다. 마침내 정부는 2000년대를 주도할 기술인 생명공학을 육성하기 위해 1993년 말 범 부처적으로 ‘생명공학 육성 기본계획’(bIOTECH 2000)을 수립하고, 이듬해부터 기본계획에 의한 지원사업을 진행했다.

<신약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90년대를 앞두고 보건복지부가 주관하는 신약개발 정책심포지엄이 1989년도에 열려 업계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다.>

58. 세계 대중약협회(WFPMM) 총회 한국 개최 (1991년, 2012년)
 
세계 대중약협회(WFPMM) 제 10차 총회가 1991년 10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 동안 서울에서 개최됐다. 35개국 700여명의 대표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WFPMM 총회는 국내 제약업계가 사상 최초의 국제 규모 행사로 개최해 한국 제약산업의 현주소를 세계에 알리고 국제적인 위상을 새롭게 하는 결실을 거둔 데다 비 처방용 의약품인 대중약의 활성화 방안 등과 관련해서 광범위한 논의와 상호간 정보교환이 이루어지면서 “대중약은 대충약이 아니다”라는 명확한 팩트를 각인시켰다. 2012년에도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제 19차 총회가 다시 한번 국내에서 개최됐다.

< 1991년에 10월 16일부터 18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세계 대중약협회(WFPMM) 제 10차 총회>


59. 신약개발 연구 발표회..정부 용역 45개 과제 발표 (1992년)
 보건사회부가 1991년에 정부 예산으로는 처음으로 지원한 신약개발 연구지원사업에 대한 제 1회 연구발표회가 1992년 5월 6일 서울대 호암생활관에서 개최되어 45개 세부과제별 연제에 대한 연구결과들이 발표됐다. 보사부는 1990년대 중반까지 1~3개의 신약을 개발하고, 2000년대 초반까지 5~10개의 신약개발을 목표로 정부의 신약개발 연구 지원사업을 추진해 낙나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1992년에 12억3,000만원의 예산을 확보해 신약개발 연구 지원사업을 본격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60.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출범..마약과의 전쟁 선포 (1992년)
 정부는 약물 오‧남용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른 현실을 직시하고 1991년 4월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듬해 5월 12일 대한약사회가 주축이 되어 대한약사회관에서 현판식 및 창립기념식을 개최함에 따라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마약퇴치운동본부의 출범은 약의 전문가라는 약사의 위상에 더해 총체적으로 국민보건을 계도하고 봉사하는 약사상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약물 오‧남용 문제를 일소하기 위해 범 사회적인 관심을 촉발시키는 일대 전환점이 됐다.

61. 한약 조제권 분쟁 점화 (1993년)
 1989년 한약업사의 헌법소원으로 타올랐다가 봉합되는 듯했던 한약조제권 분쟁의 불씨는 1993년 1월 30일 “약국에는 재래식 한약장 이외의 약국장을 두어 이를 청결히 관리하여야 한다”는 제 11조 1항 7호 규정이 삭제된 약사법 시행규칙 개정안이 입법예고되고, 2월 25일 확정되자 다시 한번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조항의 삭제를 두고 한의사 측이 약사의 한약조제가 전면적으로 허용되어 한의사들은 존재의 이유가 상실되고 말 것이라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분쟁의 막을 걷어올리고 나선 것이었다. 당초 한의계는 “한방은 고유의 특성상 의약분업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내세웠다가 논리적인 문제에 직면하자 궤도를 수정해 한약사제도의 신설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한의사 측이 주장하는 한약사제도는 의약분업을 전제로 한 수평적인 파트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종속적이고 수직적인 개념의 것이어서 의료이원화를 영구히 고착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됐다.

< 한약조제권 수호를 위해 과천에서 열린 전국약사궐기대회>

 

62. 보건복지부, KGSP 도입 발표 (1994년)
 1990년대 중반 들어 의약품의 안전한 공급과 유통과정 중의 품질관리는 물론 의약품 유통일원화 기반을 조성하는 데 새로운 전기가 마련됐다. 1994년 12월 3일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보건사회부에서 명칭이 변경된 보건복지부는 12월 6일 의약품 도매업계의 최대 관심사로 부각되어 왔던 ‘우수의약품 유통관리기준’(KGSP: Korean Good Supplying Practices) 최종안을 확정하고 입법예고했다. 보건복지부는 뒤이어 12월 30일 KGSP를 제정‧고시함으로써 GSP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KGSP 최종안은 1997년 12월 31일까지 3년의 경과기간 및 권장시행기간을 거쳐 1998년 1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시행에 들어간다는 일정으로 공표됐다.

63. 약가 자율화 조치 단행 (1994년)
 1994년 벽두인 1월 6일 보사부는 경제행정규제 완화 차원에서 의약품 표준소매가 자율화 방침을 확정하고 행정관리품목의 지정제도 폐지와 함께 의약품 가격결정을 대폭 자율화한다고 전격발표하면서 10년만에 약가에 대수술을 단행했다. 경제행정 규제 완화와 경제활성화 차원에서 단행된 이 같은 조치는 10여년 동안 일관되게 묶여왔던 약가에 대한 해금조치이자 고사(枯死) 위기에 처한 국내 제약산업의 부활을 알리는 청신호로 받아들여졌다.

64. 질병군별 포괄수가제(DRG) 도입 (1995년)
 정부는 기존 행위별 수가제의 문제점들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질병군별 포괄수가제도(DRG)의 단계적 도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1995년 1월 ‘FRG 지불제도 도입검토협의회’를 구성하고 일부 질병군을 대상으로 희망 의료기관에 한해 1997년부터 시업사업(1997년 2월~1998년 9월)을 시행했고(5개 질병군 대상), 1998년 2월부터 1999년 1월까지 제 2차 시범사업(5개 질병군 대상), 1999년 2월부터 2000년 1월까지 제 3차 시범사업(9개 질병군 대상)에 들어갔다.

65. 제약업계 엄습한 IMF 한파 (1997년)
 1997년 11월 21일 임창렬(林昌烈) 부총리의 발표로 한국경제를 강타한 단군 이래 최대의 국가적 위기상황으로 불린 IMF 외환위기가 도래했다. 이에 제약업계 또한 환율과 제조원가의 급격한 상승, 금리 급등, 환차손 등으로 인한 ‘3중고’와 경영악화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중 환차손으로 인한 원료수입 추가부담액만도 1,500억원대로 추정되었을 정도였다. 결국 1998년에 의약품 등 생산실적이 전년도에 비해 2.6% 감소하는 초유의 상황이 이어졌다. 또 IMF 사태 발발 이후 1999년 초까지 연쇄적으로 부도를 맞은 제약사 수가 18곳에 달했다. 다행히 국내 제약기업들은 전대미문의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총력체제를 가동하면서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허리디 졸라매기 등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 나간 데다 분업특수까지 더해지면서 위기상황을 조기졸업할 수 있었다.

66. 한미약품 6,300만 달러 사상 최고액 기술수출 (1997년)
 1997년 한미약품이 노바티스에 마이크로에멀전 제제기술 이전으로 6,300만 달러의 기술수출을 실현해 단일품목 기술수출료 사상 최고액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더욱이 이것은 합성기술이 아니라 제제기술이어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이라는 의의 또한 컸다. 한미약품의 제제기술 이전은 국내의 기술수출료가 대폭 높아지기 시작하는 기점이 됐다.

67. 동아제약‧유한양행, 국내 최초 신약개발 전략적 제휴 (1998년)
 동아제약과 유한양행이 1998년 3월 9일 국내 제약업계 최초로 ‘신약개발을 위한 전략적 제휴 협약식’을 개최했다. 국내 제약기업들이 막대한 연구비와 인력을 필요로 하는 신약개발 연구에서 대형신약을 개발하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현실적으로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던 가운데 양사는 공동연구를 통해 전 세계 골다공증 치료제 시장을 겨냥한 대형신약 개발을 목표로 손을 맞잡기로 하는 전례없는 합의를 도출해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68. 한국型 FDA ‘식품의약품안전청’ 발족 (1998년)
 정부 조직개편에 따라 1994년 12월 3일 보건사회부에서 부처의 명칭이 보건복지부로 변경된 이후 주어진 소임과 기능을 보다 충실히 수행하고, 의약품‧식품에 대해 철저한 감시‧감독이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미국 FDA와 같은 성격의 별도기구를 하루빨리 신설해야 한다는 지적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1996년 4월 6일 복지부 산하기구로 한국형 FDA ‘식품의약품안전본부’ 및 6개 지방청 조직이 신설된 데 이어 독립된 외청(外廳)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놓고 거듭된 논란 끝에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후 승격이 확정되어 1998년 2월 ‘식품의약품안전청’으로 확대‧신설됐다. 2010년 11월 오송(五松) 시대를 연 식품의약품안전청은 2013년 3월 ‘식품의약품안전처’로 재차 승격됐다.

69. 국산신약 시대의 개막..‘선플라’ 식약청 허가 (1999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눈앞에 두었던 시점에서 우리나라가 신약개발국가 대열에 당당하게 합류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낭보가 전해졌다. 1999년 6월 3일 SK케미칼과 SK제약(2004년 12월 SK케미칼에 흡수‧합병)의 백금착제 항암제 ‘선플라주’가 중앙약사심의위원회를 통과한 데 이어 7월 13일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시판허가를 발표함에 따라 대망의 국내신약 1호로 등록됐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근대적인 의미의 제약산업이 싹튼 후 100여년 만에 ‘신약입국’의 첫발을 내딛는 개가를 올렸다.

< SK케미칼의 백금착제 항암제 ‘선플라주’가 국산신약 1호의 영광을 안게됨에 따라 이를 축하하기 위한 행사가 신약개발연구조합 주관으로 열렸다.>

70. 의약품 판매자 가격표시제 시행 (1999년)
 1999년 공급자인 제약회사에서 가격을 표시하면 약국에서는 공장도가 미만으로 판매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소비자 보호 및 시장경제 원리에 미흡하다는 점을 이유로 의약품 표준소매가격 제도가 폐지되고 약국에서 판매할 가격을 정해서 부착하는 판매자 가격표시제도가 본격 시행됐다. 판매자 가격표시제도는 표준가가 공급자인 제약회사에서 가격을 표시하면 약국에서는 공장도가 미만으로 판매할 수 없도록 되어 있어 소비자 보호 및 시장경제 원리에 미흡하다는 점이 지적됨에 따라 기존의 제도를 개선키로 하면서 도입됐다.

71. ‘실거래가 상환제’ 도입 (1999년)
 보건복지부는 보험약품 거래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불공정 거래를 차단함으로써 의약품 품질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1999년 11월 15일 ‘실거래가 상환제’를 도입했다. 실거래가 상환제의 시행은 의약품 저가거래의 혜택의 소비자들에게 직접 돌아갈 수 있도록 하고, 의료기관의 약가이윤 확보동기를 없애 의약품의 과잉투약 가능성을 제거하면서, 보험재정과 국민의료비를 절감하는 데 목표를 뒀다. 특히 약가차액에 의한 가격경쟁이 아니라 품질경쟁을 유도해 양질의 의약품 생산과 신약개발을 위한 연구‧개발 투자동기를 부여하고, 의약품 거래와 관련한 제약회사-의료기관간 각종 납품 부조리를 해소하는 데 의의를 두었다.

72. 의약분업제도 전면 도입 (2000년)
 100년 이상 지속되었던 의약불이(醫藥不二)의 의료관행이 종막을 고하고, 2000년 7월 우여곡절 끝에 의약분업 제도가 마침내 전면도입됐다. 국회는 1999년 12월 7일 약사법 개정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켜 2000년 7월 1일부터 의약분업을 전면적으로 시행키로 했다.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약사회 또한 1999년 5월 10일 경실련 강당에서 의약분업 실현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의 의약분업 최종안에 합의하면서 시민대책위가 마련한 분업안을 수용하고 이를 추진해 줄 것을 정부와 국회에 건의하기로 했다. 이로써 1963년 약사법에 처음 명시되었지만 사문화되었던 의약분업 제도의 시행이 마침내 그 막을 올리게 됐다. 의약분업은 한달의 계도기간을 거쳐 2000년 8월 1일부터 시행에 돌입했다.

< 의약분업 시행에 합의한 의약단체 대표들. 의협 유성희회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약사회 김희중회장(맨 오른쪽).>


73. 外資 대형 의약품 도매업소 쥴릭 영업 개시 (2000년)
 외자(外資) 대형 의약품 도매업소 스위스 쥴릭(Zuellig)이 1995년 한독약품과 손잡고 국내시장 진출을 모색한 끝에 1999년 4월 2일 마침내 한국법인(KLS)의 국내영업 개시를 공식선언했다. 쥴릭의 한국법인 쥴릭파마코리아는 국내 진출 의사를 처음으로 표명한 이후 5년여 만이었던 2000년 4월 10일을 기점으로 공식적으로 국내영업에 착수했다. 이로 인해 전근대적인 구조의 유통행태를 보여주었던 국내 의약품 도매업계는 큰 타격을 입게 됐다.

74. 건강보험 재정파탄 위기 표면화 (2001년)
 의약분업제도가 도입된 이듬해였던 2001년 들어 건강보험 재정파탄 위기가 고조되어 전국민적인 관심사로 부상했다. 보험재정 파탄 위기는 의약분업이 도입되면 “이중의 여과장치”가 작동하면서 국민의 의약품 소비량이 줄어들 것이라던 당초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 버린 것인 만큼 정부가 큰 부담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보험재정 위기론은 이후 정부에 의한 약가인하 도미노의 전주곡이 됐다.

75. KGSP 전면 시행 (2002년)
 1994년 12월 KGSP를 제정‧고시함으로써 드디어 GSP 시대의 서막을 알린 복지부는 1996년 12월 복산약품, 우정약품, 세화약품, 삼원약품 등 부산 지역의 6개 의약품 도매업소들을 첫 번째 KGSP 지정업소로 공식통보했다. 그 후 의약품 안전공급과 유통과정 중의 품질관리, 의약품 유통일원화의 기반 조성을 위한 우수의약품 유통관리기준 제도(KGSP)가 2002년 전격 도입됐다. 2002년 1월 12일 약사법 시행규칙 개정에 따라 이 해 7월 1일부터 의약품 도매상의 KGSP 준수가 전면 의무화됐다. 이 제도는 업계의 반발과 준비부족 등으로 인해 유보를 거듭하면서 결국 3차례 연기된 끝에 2002년 정부가 미지정업소에 대한 영업정지를 발표하면서 의무화되기에 이르렀다.

76. LG생명과학 항균제 ‘팩티브’ FDA 허가취득 (2003년)
 2003년 4월 5일 LG생명과학의 퀴놀론 계열 항균제 ‘팩티브’(Factive: 제미플록사신)가 지역사회 획득성 폐렴(CPA) 치료제로 미국 FDA의 허가를 취득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로써 국산신약이 사상 최초로 까다로운 FDA의 허가관문을 사뿐히 뛰어넘으면서 우리나라의 제약기술이 세계적인 수준에 진입했음을 세계 만방에 과시했다. 무엇보다 ‘팩티브’가 FDA의 허가를 취득한 것은 국내 제약산업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계기가 된 데다 국내의 신약개발 기술이 세계무대에서 당당히 인정받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개가가 아닐 수 없었다.

77. ‘약의 날’ 30년 만에 부활 (2003년)
 정부의 각종 기념일 통합‧조정에 따라 ‘보건의 날’로 통합된 후 1972년 중단되었던 ‘약의 날’이 30년 만이었던 2003년 10월 부활했다. “좋은 약은 새로운 희망입니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10월 10일 막을 올린 기념행사는 12일 걷기대회까지 이어지면서 국민들에게 약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심어준 데다 제약산업의 발전상을 조명하는 자리가 됐고, 무엇보다 제약업계, 약사회, 식약청, 약학회 및 KRPIA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련단체들이 하나로 힘을 모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만한 것으로 평가됐다.

78. 약사회, 직선제 관철 민주화 신기원 (2003년)
 2000년 2월 제 47차 대한약사회 정기 대의원총회에서 상정된 직선제 정관개정안이 가결됨에 따라 2003년 치러진 최초의 직선제 선거가 78.6%의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끝에 기호 2번 원희목(元喜穆) 후보가 56.9%의 득표율로 제 33대 회장 및 초대 직선회장의 영예를 차지했다. 직선제는 회원의 손으로 직접 자신의 수장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맥락에서 약사회의 민주화에 신기원을 이룬 개가였다.

79. 의약품 생산실적 10조원 고지 등정 (2004년)
 2000년대 들어 시장개방과 의약분업의 도입으로 지각변동에 직면한 여파로 제약업계는 고도성장시대를 접고 저성장시대로 접어들게 됐다. IMF 외환위기가 발발한 1997년의 의약품 생산실적이 9.0% 한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저성장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받아들여졌다. 다행히 2001년 이후 의약분업 도입 초기의 특수(特需) 등이 영향을 미치면서 한자릿수 후반대 증가율로 회복되더니 2004년 1/4분기 이후부터 점차 회복국면으로 전환하기 시작해 IMF 불황의 터널을 벗어난 기미를 역력하게 내보였다. 이 해의 의약품 등 생산실적이 전년대비 9.6% 증가하면서 마침내 대망의 10조원 고지를 돌파했다.

80. 의약품 수출 대망의 10억 달러 달성 (2005년)
 1960년 100만 달러를 넘어선 우리나라의 의약품 수출실적이 2005년에 전년도의 9억9,747만 달러에 비해 15.4% 증가하면서 사상 최초로 10억 달러 고지에 등정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2004년부터 완제의약품의 수출증가율이 원료의약품을 앞서기 시작한 것도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완제의약품은 2005년 총 4억9,434만 달러 상당이 수출되어 전년대비 14.9% 성장률을 기록했다. 원료의약품의 경우 같은 해 4억4,842만 달러로 7.6% 성장률을 나타내는 데 그쳤다. 완제의약품의 수출증가율이 원료의약품을 2배 가깝게 추월한 것이다.

81.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 조작 스캔들 (2005~2006년)
 생물학적 동등성(생동성)은 대체조제를 통해 건강보험 재정을 절감하고, 의약분업의 원활한 정착을 도모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였다. 하지만 2005년 12월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 조작 파문이 발생해 2006년 한해 약업계를 강타한 최대 스캔들로 기록되고 말았다. 생동성 파문은 검찰의 생동성 시험기관 조사와 前 식약청장의 구속 등으로 이어지면서 약업계에 씻을 수 없는 흠집을 남겼다. 성분명 처방을 활발하게 진행하려던 정부의 의지도 급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82. 약학대학 수업연한 6년制 마침내 시행 (2005년)
 약계의 최대 숙원사안 가운데 하나였던 약대 6년제 문제가 2002년 10월 18일 보건산업발전특별위원회(약칭 약발특위) 제 2차 전체회의에서 대통령 건의사항으로 최종의결, 대통령에 서면보고됨에 따라 실현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 뒤이어 2005년 8월 교육인적자원부는 2009년부터 약학대학 수업연한을 6년으로 연장하고, 구체적인 학제로 2+4 체제를 도입한다고 발표해 47년여 동안의 오랜 인고와 노력 끝에 6년제가 마침내 실현됐다. 첫 6년제 약대 신입생들이 입학한 해는 2009년이었다.

83. 의약품 유통일원화 끝내 전면폐지 (2008년)
 의약품 유통일원화는 1994년 7월 18일 제약기업에 의한 종합병원 의약품 직거래 금지를 규정한 약사법 시행규칙 제 62조 제 1항 제 7호가 신설됨에 따라 명문화됐다. 하지만 제도 제정 직후부터 험난한 전도가 예견되더니 급기야 1998년 1월 문민정부의 규제개혁추진위원회가 2000년 1월 1일부터 유통일원화 제도를 폐지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2004년 1월 29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의 합헌 결정에도 불구하고 2008년 1월 약사법 시행규칙 전면개정안이 공포됨에 따라 의약품 유통일원화 제도는 2010년 말 전면폐지가 확정됐다.

84. 제약업계 강타한 연무(煙霧)..탤크 파동 (2009년)
 2009년 봄 식품의약품안전청이 시중에 유통되는 일부 베이비 파우더류에서 석면이 검출됨에 따라 4월 중국산 탤크가 사용된 제품들의 판매와 유통을 금지시키고 회수 및 폐기를 결정하는 조치를 서둘러 발표해 제약업계가 연무(煙霧)에 휩싸이게 이르렀다. 문제는 탤크 자체가 아니라 발암물질로 알려져 사용이 전면금지된 석면(石綿)이 불순물로 들어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비롯됐다. 식약청의 발표는 공교롭게도 한해 전이었던 2008년 촉발된 광우병 파문과 중국산 멜라민(melamine) 파동 등을 겪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점에서 불거졌던 터라 더욱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85. ‘시장형 실거래가 상환제’와 ‘리베이트 쌍벌제’ 시행 (2010년)
 보건복지가족부는 2010년 2월 16일 ‘의약품 거래 및 약가제도 투명화 방안’으로 ‘시장형 실거래가 상환제도’(즉, 저가구매 인센티브 제도)를 발표하고 10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간다고 예고하면서 격랑을 몰고왔다. 의료기관과 약국이 의약품 구매과정에서 이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기존의 ‘실거래가 상환제도’가 리베이트에 의한 거래관행을 낳고 있다는 판단이 내려짐에 따라 개선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복지부가 밝힌 제도개선의 취지였다. 같은 해 4월 28일에는 의약품‧의료기기 관련 불법 리베이트 제공 및 수수를 근절하고 투명한 유통시장 질서를 유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의약품 리베이트 쌍벌제’가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데 이어 5월 18일 국무회의에서 원안대로 가결됐다. ‘의약품 리베이트 쌍벌제’는 그 동안 불법적인 리베이트를 수수했더라도 주는 자만 처벌할 수 있었을 뿐, 받는 자는 처벌하지 못했던 제도상의 미미점을 개선하기 위한 법적근거를 마련하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86. 전국 15개 약대 대거 신설 (2010년)
 대학들의 최대 관심사였던 15개 약학대학의 신설이 확정됨에 따라 전쟁을 방불케 할 만큼 치열했던 약대 유치경쟁이 일단락됐다. 교육과학기술부는 2010년 2월 26일 “2011학년도 약학대학 신설 대학으로 15개 대학을 최종선정했다”고 공표했다. 이로써 기존의 20개 약학대학은 20개교에서 35개교로 확대됐고, 정원 또한 기존의 1,210명에서 1,700명으로 490명이 증원됐다.

87. 의약품 슈퍼판매 “뜨거운 감자” (2011년)
 대한약사회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약국에서 판매되어 왔던 48개 일반의약품이 2011년 7월 21일 의약외품으로 전환되어 슈퍼마켓 및 편의점 판매가 허용됐다. 뒤이어 해열진통제, 감기약, 소화제, 파스 등 13개 품목들이 이듬해 11월 편의점 판매가 추가로 허용됐다. 가뜩이나 양극화 이슈로 인해 개국가가 가위눌려 있었던 현실에서 의약품의 슈퍼 판매사안까지 불거짐에 따라 약국의 미래를 옥죄는 또 다른 요인으로 부각됐다.

88. 일괄 약가인하로 제약업계에 메가톤급 파장 (2012년)
 2012년 2월 27일 보건복지부는 4월부터 기(旣) 등재 의약품들에 대한 약가인하를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인구 전반의 고령화 추세로 인해 건강보험 급여지출이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배경으로 보험재정 안정화에 목적을 둔 기 등재 의약품에 대한 일괄 약가인하 조치는 복지부가 2011년 8월 ‘약가제도 개편 및 제약산업 선진화 방안’을 내놓은 이후 2012년 1월부터 시행된 약가제도 개편의 후속조치로 내민 또 하나의 히든카드였다. 하지만 전체의 47.1%에 달하는 6,000여 품목들의 가격이 무더기로 일제히 인하된다는 것은 충격파가 너무나 엄청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 무리한 약가인하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전국단위 궐기대회를 개최한 제약업계>

 

89. 복지부, ‘혁신형 제약기업’ 선정‧발표 (2012년)
 2012년 6월 18일 보건복지부는 초미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2012년도 혁신형 제약기업’ 43곳을 선정한 결과를 발표했다. 이날 복지부는 일반 제약기업 26곳, 중‧소 제약기업 10곳, 바이오 벤처기업 6곳, 다국적 제약기업 1곳 등 43곳의 제약기업을 ‘혁신형 제약기업’으로 선정‧발표했다. 국내 제약산업을 육성‧지원하기 위한 ‘제약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2010년 6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를 통과한 데 이어 이듬해 3월 10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데에 따른 성과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는 또 2008년 11월 당시 대한약사회 회장 출신의 한나라당 원희목(元喜睦) 의원이 법안을 대표발의한 이래 2년 4개월여 만의 개가였다.

< 혁신형 제약기업 대표.>


 

90. 셀트리온 ‘램시마주’ 국내 최초 바이오시밀러 승인 (2012년)
 셀트리온이 개발한 관절염 치료제 ‘램시마주’가 2012년 7월 20일 국내 최초의 바이오시밀러 의약품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청의 허가를 취득했다. ‘램시마주’는 모노클로날 항체 바이오시밀러 의약품으로는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었다. ‘램시마주’의 대조의약품은 ‘레미케이드주’(인플릭시맙)이다. 셀트리온은 2010년 11월부터 바이오시밀러에 대한 임상시험을 진행했고, 2012년 2월 ‘램시마주’ 100mg의 허가를 신청했었다.

91. 유한양행, 제약업계 최초 매출 1조원 달성 (2014년)
 유한양행이 2014년에 매출 1조원을 넘어서면서 ‘1조원 클럽’에 처음으로 가입했다. 이는 국내 제약산업이 시작된 이래 120여년 만에 첫 번째 사례이자 1926년 출범한 유한양행이 창립 88주년 만에 대망의 1조원 클럽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개가였다. 유한양행의 매출 1조원 달성은 국내 제약사가 글로벌 제약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것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매우 큰 것으로 평가됐다.

< 업계최초로 매출1조를 달성한 바로 다음해인 2015년도 유한양행 신년시무식 광경>

 

92. 의약품실사상호협력기구(PIC/S) 정식회원국 가입 (2014년)
 우리나라가 2014년 의약품실사상호협력기구(PIC/S)에 정식회원국으로 가입했다. PIC/S는 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기구(GMP)과 실사의 국제 조화를 주도하는 유일한 국제 협의체이다. 우리나라는 42번째 가입국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PIC/S 가입은 제약분야의 국제 신인도 상승과 안전관리 강화 측면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에 비견할 만한 개가였다. 우리나라의 의약품 제조‧품질이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했음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93. 리베이트 방지 3법 국회 통과 (2016년)
 2016년은 의약계 리베이트 근절을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전례없이 강력하게 마련된 해였다. 의사와 약사 등에게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는 경우 의무적으로 지출보고서를 작성하게 하고, 리베이트를 받은 의료인은 징역 3년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하는 일명 ‘리베이트 방지 3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이다. 인재근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리베이트 방지 3법’은 의약계 리베이트와 직결된 약사법, 의료법 및 의료기기법을 각각 개정한 것으로, 보다 구체적인 사실관계 입증자료의 제시와 강력해진 처벌수위 등을 주요내용으로 했다.

94. ‘7‧7 약가제도 개선안’ 확정..바이오‧신약 우대 본격화 (2016년)
 2016년에 제약업계의 최대 관심사였던 ‘바이오의약품 및 글로벌 혁신신약에 대한 보험약가 개선안’, 일명 ‘7‧7 약가제도 개선안’과 ‘실거래가에 의한 약가인하제도 개선안’이 10월 24일 확정되어 시행에 들어갔다. 개선안은 제약업계가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던 글로벌 혁신신약, 대체약제 최고 10% 우대 등 업계의 요구가 대부분 수용‧반영됐다. 보건복지부는 이 개선안이 고부가가치 신약과 바이오의약품 등의 연구‧개발을 촉진하는 도화선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밝혔고, 이전보다 적극적이고 분명한 약가우대 조건이 제시됨에 따라 제약업계도 보다 구체적인 연구‧개발 계획을 수립할 수 있게 됐다.

95. 부정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 시행 (2016년)
 2016년 9월 28일 시행에 들어간 ‘부정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이 제약업계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양벌규정이 적용되는 김영란법이 시행에 들어감에 따라 법이 적용되는 공무원들이 만남 자체를 기피하기에 이른 데다 마찬가지로 적용대상에 포함된 병원 및 의사들도 법 시행 이후 제약사 영업사원들에게 아예 출입하지 말 것을 요구하면서 제약사들의 대관업무와 영업업무가 사실상 올스톱되는 상황이 초래됐다. 하지만 김영란법은 제약사들에게 리베이트 근절과 연구‧개발만이 살길이라는 인식을 더욱 확고하게 심고, 준법‧윤리경영을 더욱 강화토록 하는 역할을 하는 등 긍정적인 역할도 적지 않았다.

96.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문재인 케어’ (2017년)
 문재인 대통령 정부가 2017년 8월 발표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대책’(문재인 케어)은 전 정부 추진과제였던 4대 중증질환(암, 심장질환, 뇌혈관 질환, 희귀 난치성 질환) 및 3대 비급여(선택진료제, 상급병실료, 간병 서비스)를 포함한 전면급여화를 표방했다. 미용‧성형 등을 제외하고 의학적 필요성이 있는 모든 비급여 항목들을 건강보험으로 편입시키고자 한 것이 문재인 케어의 골자였다. 약제의 경우 약가협상 절차가 필요한 특성 등을 고려해 기존의 선별등재(포지티브 시스템) 방식을 유지하되, 환자의 본인부담률을 30%, 50% 및 80%로 차등적용하는 선별급여를 도입키로 했다. 하지만 문재인 케어는 재정 조달방안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이 제기됐고, 급기야 2022년 12월 윤석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폐기를 공식화하기에 이르렀다.

97. ‘첨단재생바이오의약품법’ 제정 (2019년)
 국회는 3년여에 걸친 다사다난한 논의를 거쳐 2019년 8월 2일 본회의에서 ‘첨단재생의료 및 첨단바이오의약품 안전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첨단재생바이오의약품법)을 의결했다. 첨단재생바이오의약품법은 첨단 재생의료의 안전성 확보체계 및 기술혁신‧실용화 방안을 마련하고, 첨단 바이오의약품의 품질과 안전성‧유효성 확보, 제품화 지원을 위해 필요한 사항을 규정하는 내용 등이 골자였다. 업계에서는 이제까지 명확한 기준이 부재해 불안전성이 제기되었던 유전자 치료제, 줄기세포 치료제 등 첨단 바이오산업 연구‧개발과 산업화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규제 아래 예측가능하게 진행될 수 있게 됐다면서 환영하고 나섰다.

98. 의약품 불순물 파동 릴레이 (2018~2022년)
 2018년 항고혈압제 원료의약품 중 중국산 발사르탄에서 발암유발 가능물질 N-니트로소디메틸아민(NDMA)가 검출되면서 의약품 불순물 파동이 고개를 든 이후로 매년 연례행사처럼 이어지면서 국내의 제네릭 의약품 전반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고, 제네릭 의약품 허가제도를 손보는 등 후폭풍을 몰고 왔다. 2019년에는 항궤양제 라니티닌과 니자티딘 성분 의약품에서 또 다시 NDMA가 검출되어 제약업계의 원료의약품 유해물질 관리에 비상등이 켜졌다. 그 결과 2018년 발사르탄 성분 함유 의약품 175개 제품들에 대해 판매중지 조치가 내려진 데 이어 2019년에 라니티딘 제제 전 제품 판매중지 및 니자티딘 제제 13개 제품 판매중지‧회수조치가, 2020년에는 메트포르민 제제 31개 품목에 대한 제조‧판매 중지와 처방제한 조치가 내려졌다. 2021년에는 고혈압 치료제에 사용되는 사르탄류 아지도(Azido) 계열 불순물이 문제가 됐다. 결국 98개사 295개 품목들에 대해 회수조치가 단행되어 시중에 유통 중이었던 99개사 306개 품목 가운데 96.4%가 회수대상에 포함됐다.

99. ‘코로나19’ 팬데믹 강타..의약품 품절대란 (2020~2023년)
 2019년 12월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 처음 확인된 ‘코로나19’가 전 세계에서 대유행하기에 이르면서 국내에도 커다란 충격파가 미치기 시작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020년 1월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언하자 우리나라 정부도 2월 23일부터 감염병 위기경보를 ‘심각’으로 격상하고 국무총리를 본부장으로 하는 ‘코로나19’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가동시켰다. 국민들은 일상생활에서 마스크 착용과 ‘사회적 거리두기’가 의무화됐고, 감염병 유행단계에 따라 여러 시설들이 제한되거나 비대면 온라인 활동으로 대체됐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적‧경제적 영향이 막대해지면서 의료체계의 붕괴와 경기불황이 이어진 가운데 정부조직 개편으로 2020년 8월 질병관리청이 출범했고, 국립감염병연구소가 확대개편됐으며, 권역별 질병대응센터가 신설됐다. 제약업계의 경우 의약품 수요가 늘면서 원료구입이 어려워져 의약품 수급불안이 촉발됐고, 급기야 2023년 들어 의약품의 품절대란이 이어졌다.

<코로나팬데믹 위기극복을 위한 민간대책회의 광경>

100. 의대 정원확대 논란..필수의료 위기 (2023~2024년)
 윤석열 정부는 2023년 들어 국정과제 중 하나인 필수‧공공의료 강화를 위해 ‘공공정책수가’를 바탕으로 한 보상 방식의 변화를 추진하고 나섰다. 이와 함께 윤석열 정부는 필수의료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2025년 학년도 대입부터 의대정원을 확대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의대 정원 확대’ 카드를 꺼내들었다. 필수의료 분야 의사인력 부족으로 인해 빚어지는 ‘응급실 뺑뺑이’의 해소와 고령화 대비, 의사인력의 지역 편중현상의 해결 등을 위해 추진된 의대정원 확대는 총 2,000명으로 구체적인 증원규모가 제시되기에 이르자 의료계의 강력한 저항이 고개를 들면서 필수의료 위기가 불거졌고, 2024년 3월 현재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국면이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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