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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파든?”은 안돼!

심창구 서울대 명예교수

기사입력 2014-07-23 09:38     최종수정 2014-07-23 09:43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1. 1988년 미국에 갔을 때 허리가 결려 의원에 갔더니 의사가 좀 절절 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과거에 이런 증상이 있었을 때 무슨 약을 먹어서 잘 고쳤다’고 경험담을 이야기 하자, ‘We have a cousin drug’이라며 비슷한 약을 처방해 주었다. 여기까지는 잘 나갔는데, 그 다음에 의사가 내게 무슨 지시를 하는데 잘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럴 때 쓰면 된다고 한국에서 배운 대로 “파든?”이라고 해 보았다. 그러자 의사는 자기 설명이 부족해서 내가 못 알아 들은 줄 알고 아까보다 훨씬 장황한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중간 중간에 나보고 “알겠느냐(OK)?”고 확인 차 묻는데 차마 못 알아듣겠다고 할 수가 없어서 대충 작은 목소리로 “예스” 라고 답하곤 하였다.

그런 난처한 상황이 몇 번인가 반복된 후 의사는 마지막으로 “오케이?” 라고 물었다. 마음 속으로는 “노” 였지만, 그 긴 설명을 다 듣고 이제 와서 “노”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울며 겨자 먹듯 “예스”라고 말하고는 의원을 도망치듯 빠져 나왔지만, 후회막급이었다. “파든” 이라고 할 게 아니라, “아까 한 말을 그대로 천천히 한번 더 반복해 주세요”라고 했어야 하는 건데….

의원을 나왔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실히 몰라 고민이 되었다. 할 수 없이 한 교민 장로님께 전화를 걸어 이실직고(以實直告)하고 도와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얼마 후 장로님의 전화를 받아보니, 며칠 후 동네 간호사 사무실에 가서 오늘 찍은 엑스레이 사진 결과를 판독하고 오라는 내용이었단다. 엑스레이 결과를 동네 간호사 사무실에 가서 보고 오라고?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아, 그래서 그 나라 문화를 알아야 말도 들린다는 말이 있는 거구나’ 깨달았다. 우리말로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영어로 들었으니 잘못 알아 들을 만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부터 나는 “파든”을 남발했다가는 큰 코 다칠 수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2. 하루는 퍼듀 대학 약대의 복도를 지나는데 한 여학생이 현관 밖에서 날보고 도서관에 좀 들어가면 안되겠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무의식 중에 “Why don’t you come in?” 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나보고 “땡큐” 하면서 들어 오는 것이었다. 나는 “와이 돈츄”가 질문이 아니라는 것이 늘 신기하여 언젠가 이 말을 한번 써 먹어 보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날 무의식 중에 이 말이 튀어 나온 것이었다. 그랬더니 미국 학생이 정말 “땡큐” 하면서 들어 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작은 성공에 오랫동안 흐뭇 하였다.

3. 미국에 온지 오래 된 여자 동기생이 미국 병원 약제부에 근무할 때에, 상사가 영어를 잘못 알아듣는다고 자기에게는 일을 잘 시키지 않더란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해 직장을 그만 둔 일이 있었단다. 그녀는 자기 딸에게는 이런 설움을 겪게 하지 않으려고 집에서도 늘 영어만 쓰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단다. 그 결과 딸은 영어를 미국 사람처럼 잘 하게 되었는데, 그 대신 한국말을 잘 못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딸이 성장할수록 한국말을 안 가르친 것이 몹시 후회가 되었다. 무엇보다 딸을 야단칠 때에도 영어로 말해야 하는 것이 제일 갑갑하였단다. 영어는 못해도 걱정, 잘 해도 걱정인 모양이다. 한국에 사는 엄마들은 자기 딸에게 한국말로 마음껏 욕설을 퍼부어 댈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4. 미국 FDA에 다니고 있는 내 친구 P박사의 장남은 희한하게 영어와 한국어를 둘 다 완벽하게 잘한다. 나는 그에게 “옆구리가 욱신욱신 쑤신다는 말을 영어로 뭐라고 하냐?”고 물을 수 있다. 순수 미국 사람에게는 도저히 물을 수 없는 말이다. 이렇게 두 말을 다 잘하는 사람은 오늘날에도 결코 흔하게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의 축복이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원수(?) 같은 영어를 철저히 박살내서 세계를 한번 마음껏 휘젓고 다녀 보고 싶다. 그러나 하나님은 행여 내가 그럴까 봐 내게 유창한 영어를 허락하지 않으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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