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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탄생 250주년 기념

베토벤과 그의 후원자들

편집부

기사입력 2020-07-31 13:33     최종수정 2020-08-07 11:01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배고플 때 명연기가 나온다”라는 말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지독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냈던 예술가들을 떠올려보면 이 말에 왠지 고개가 끄덕여 지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가난이 예술을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가난이 한 예술가의 창조성을 방해한다고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술가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예술성을 마음껏 발휘한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1809년 베토벤이 그의 몇몇 후원자들과 맺은 연금 계약서의 한 부분은 이러한 전제를 뒷받침합니다. “오직 걱정거리들로부터 해방된 사람만이 위대하고 숭고한, 그리고 예술을 고귀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창조하며…” 이와 같은 생각은 틀림없이 예술가에 대한 후원을 예로부터 계속 이어져 오게 한 원동력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후원을 통해 후원자 혹은 그 가문의 명성이 높아지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겠지요. 

베토벤(1770-1827)에게 후원자들의 존재는 그의 일생동안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1792년 고향을 떠나 빈으로 온 젊은 베토벤이 음악계에 잘 자리잡을 수 있도록 애썼으며 경제적인 도움도 주었지요. 베토벤이 애초에 빈에 갈 수 있었던 것도 후원자 덕분이었습니다. 이것이 베토벤이 일생 동안 경제적인 후원 없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빈에서 만족스러운 수입을 올렸던 시기도 분명 있었지요. 예를 들어 1801년 친구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토벤은 “작품들이 많은 수입을 안겨주었다”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빈에서 이렇다할 직책을 갖지 못했던 베토벤에게 후원이 갖는 중요성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많은 베토벤의 후원자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을 꼽으라면 리히노프스키 공작(F. K. Lichnowsky, 1761-1814)과 루돌프 대공(J. J. R. Rudolph, 1788-1831)을 들 수 있습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베토벤이 빈에 자리잡은 때부터 1806년 경까지, 그리고 루돌프 대공은 1809년부터 베토벤이 사망할 때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지요. 이들은 베토벤에게 연금 형식으로 정기적인 후원을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은 1800년부터 매년 600 플로린을 베토벤에게 지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연금은 둘 사이의 불화로 관계에 금이 가고 말았던 1806년 혹은 그 이듬해까지 지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음악학자 게크에 따르면 당시 궁정 오케스트라 단원의 연봉이 400 플로린이었다고 하니 공작의 후원금은 상당한 규모였지요. 
이 연금이 끊기고 나서 경제적으로 타격이 있었던 베토벤에게 1808년, 큰 기회가 찾아옵니다. 독일 카셀의 궁정 악장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들어온 것이지요. 연봉은 약 3000 플로린에 이르렀습니다. 

평생 이런 직책을 꿈꿔온 베토벤에게 이는 부와 명예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기회였고 그는 당연히 이 제의에 긍정적이었는데 베토벤이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몇몇 후원자들이 뭉칩니다. 루돌프 대공, 롭코비츠 공작(F. J. M. Lobkowitz, 1772-1816), 그리고 킨스키 공작(F. F. J. N. Kinsky, 1781-1812)은 베토벤에게 매년 4000 플로린을 지급한다는 연금 계약을 1809년에 성사시키지요. 조건은 단 하나, 베토벤이 빈에 계속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이 연금으로 베토벤의 삶은 경제적으로 훨씬 나아질 것만 같았지만 불운은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오스트리아가 1811년 국가 부도를 맞아 화폐 가치가 심하게 떨어졌으며, 킨스키 공작이 1812년 말에서 떨어져 사망하고 롭코비츠 공작이 파산하는 일도 벌어집니다. 당연히 연금 지급에 문제가 생겼는데 오직 루돌프 대공만이 4000 플로린 중 자신에게 할당된 액수를 계속 지급하지요. 이 때, 베토벤은 법적으로 이의를 제기해가며 결국에는 연금을 정상적으로 받아내는 집요한 모습도 보입니다. 1815년부터 다시 정상적으로 지급된 연금은 베토벤이 죽을 때까지 이어집니다.
 
 (좌: 리히노프스키 공작/Leinwand von Geodel 작품. 우: 루돌프 대공/Johann Baptist von Lampi 작품.) ▲ (좌: 리히노프스키 공작/Leinwand von Geodel 작품. 우: 루돌프 대공/Johann Baptist von Lampi 작품.)

  
베토벤과 후원자들의 관계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들을 대하는 베토벤의 태도입니다. 헌신적이었던 주요 후원자들에게 베토벤은 당연히 감사했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지나치게 의존적이 되거나 자신의 독립성이 결여되는 것을 경계하는 모습들이 관찰됩니다. 후원자들에게 그저 음악 만드는 사람으로만 여겨질까 고심한 흔적이 편지에서 보이기도 하고요. 그가 후원자들을 위해 연주하는 것을 자주 거부했던 것에는 이러한 요인들이 작용했을 것입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과의 관계가 깨어졌을 당시에, 베토벤이 그에게 남겼다는 메모에는, 베토벤의 높은 자존심이 드러납니다. “세상에는 수천 명의 귀족이 존재하지만, 베토벤은 오직 저 하나뿐입니다.”

음악학자 게크는 “베토벤의 창작이 오스트리아 귀족의 도움 없이도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은 만용이다.”라고 했습니다. 후원자들에게 베토벤은 그의 많은 작품들을 헌정했지요. 그들의 이름은 베토벤이 남겨 놓은 위대한 작품들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필자소개>
박병준씨는 음악학자이자  음악칼럼니스트로 오스트리아 그라츠 국립음악대학교에서 비올라를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음악학)를 취득했다. 현재는 광명 심포니 오케스트라 비올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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