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류 천일야화 미인탐방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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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송덕봉(宋德峰) <제12話>

편집부

기사입력 2018-09-27 17:50     최종수정 2018-09-27 18:03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청자 빛 하늘에 오곡이 무르익은 목릉성세(穆陵盛世)다. 때는 선조(宣祖·1567~1608)대로 허난설헌(1563~1589), 이매창(1573~1610)ㅏ 황진이(1520~1560), 그리고 송덕봉을 일컬어 조선의 4대 여류시인이라 한다. 송덕봉과 허난설헌은 사대부집 딸이며 이매창과 황진이는 기녀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시문(詩文)에 뛰어난 재원이었다. 사내로 태어났으면 장원급제하여 북촌에 거주하며 육조거리를 휘젓고 다닐 사대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자였다. 황진이는 소세양·벽계수 등이 기녀인 그녀를 신주 모시듯 사랑했으나 정작 본인이 사모했던 서화담은 끝내 품지 못하였다.

이매창 역시 그가 끔찍이 사랑하였던 유희경과 마음껏 사랑을 펼치지 못했다. 천재시인 허난설헌은 금지옥엽 성장하여 출가하였으나 남편 김성립과 금슬이 좋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고부간 갈등 등으로 결국 제명을 살지 못하고 26살에 요절하였다.

선조시대를 목릉성세라 하지만 여성들에겐 그런 화려한 용어가 해당되는 시대가 아니었다. 일방적 남성 주도 사회였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사회에서도 네 여인은 주옥같은 시들을 남겼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 일도 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 명월이 만공산 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의 대표시다.

황진이는 누가 말해도 사내로 태어났으면 한번쯤 자빠뜨리고 싶은 여자다. 그런데 그녀는 남자에게 선택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자고 싶은 상대를 골랐다. 그것이 그녀만이 할 수 있는 무기다. 남성 절대사회에서 여자가 남자와 잠자리를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여자였었다.

이매창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록 시기(詩妓)였으나 허균을 비롯한 내로한 사대부들로부터 알뜰한 보호를 받았던 어성으로서 정조를 지켜가며 시로 욕망을 자제할 수 있었던 여류시인이었었다. 그녀는 욕망의 화신이 아닌 사랑의 아우라였다. ‘서창 대나무에 달그림자 너울거리고 /복사꽃 핀 뜨락에는 떨어진 꽃잎 춤을 추네. / 홀로 난간에 기대 잠도 꿈도 못 이루는데 / 마름 따는 노래만 멀리 강가에서 들려오네.’ 《밤중에 앉아서》다.

허난설헌은 네 여류시인 중에 가장 극적인 인물이다. 26년이란 찰나 같은 삶에서 주옥같은 시와 산문 등을 남김은 여류사에 기념비적 존재일터다. 곤고한 삶을 시로 카타르시스 시킨 대표적인 여류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결혼상대를 보고 출가 시킨 것이 아닌 가문을 보고 결혼을 시켜 천재여인의 삶을 송두리째 잃은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그녀는 곤고한 삶에서도 문학으로 역경을 극복하여 오늘날 여류문인으로 역사에 찬연히 빛나고 있다. ‘자주 빛 퉁소 소리에 구름이 흩어지자 / 발 밖에는 서리가 차가워 앵무새가 우짖네. / 밤 깊어져 외로운 촛불이 비단 휘장을 비추고 / 이따금 드뭇한 별이 은하수를 넘어가네. / 똑똑 물시계 소리가 서풍에 메아리 치고 / 이슬지는 오동나무 가지에선 밤벌레가 우네. / 명주 손수건에 밤새도록 눈물 적셨으니 / 내일 보면 점점이 붉은 자국이 남았으리라.’ 《임을 그리며》다.

이제 덕봉이다. 여자팔자 뒤웅박 신세라며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에 따라 신분이 바뀐다. 덕봉도 어엿한 사대부 부인이 됐으나 결코 순탄한 결혼생활이 아니었다. ‘가고 또 가서 드디어 미천령에 이르니 / 동해는 가이없어 거울처럼 고르네. / 아낙네는 무슨 일로 만리길을 왔나 / 삼종의 의리는 무겁고 이 한 몸은 가벼워서라네.’ 만인에 회자되는 《마천령 위에서 짓다》다.

그랬다. 그녀들은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독특한 삶에서 그녀들만의 문학세계를 만들어 오늘날에도 화수분 마냥 끝없이 문학의 향기를 피우고 있다. 예술의 힘이다. 곤고한 삶이었으나 사랑하고 소중하게 아끼었으므로 그 같은 문학을 창조해 냈으리라...

덕봉의 시대는 조선 전기 문화는 절정기였으나 정치적 갈등이 표면화 되면서 당쟁이 심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조선 전기 사회가 송두리째 붕괴되고 유교이념을 재정립하면서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기 전 이전으로 여성에 대한 억압적이지만은 않을 시기다. 상속이나 혼인제도 등에서 여성에 대한 처별이 본격화 되기 전이었다.

조선 전기라고 해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덕봉은 그 같은 차별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는 점이 다르다. 소위 페미니스트다. 덕봉보다 1년 앞서 태어난 신분은 다르지만 당당히 일방적 남성 주도 사회에서 노류장화가 아닌 사내사냥을 하여 페미니스트(세대)가 된 황진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하겠다.

덕봉은 남편인 미암에게도 당당히 거리낌 없이 자기주장을 하였다. 현모양처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도 인간으로 성(性)의 구별 없이 역할과 주장도 똑부러지게 살았다. 덕봉은 친정아버지 비석 세우는데 미암의 소극적 태도에 “내가 시어머니 장례 등에 며느리 역할을 소홀하지 않았는데 장인에 대한 사위 역할이 부실하다.”고 신랄하게 항의한 태도는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당시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아무튼 조선 후기로 들어가면서 가부장제가 강화되어 장자 위주의 상속으로 제도가 바뀌고 딸의 지위가 아들에 비해 약화되어 열녀 이데올로기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덕봉은 사회의 제한적 분위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미암이 기록한 《미암 일기초》에 남아있다. 덕봉의 시문은 정교·고아한 멋을 지녔으며 성품은 영민하였다. 시집으론 《송씨시고》(宋氏詩藁)가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덕봉은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일재 이항, 죽천 박광전과 더불어 호남의 5현으로 불리는 미암 유희춘의 부인으로 추호만치도 부족함이 없는 위치다. 그리고 그녀는 호남 제일의 여류시인이란 호칭이 더 붙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덕봉이 조선 여류문학을 태동시킨 주인공으로도 꼽히는 것이다. 천재시인 황진이를 조선여류문학 태동의 시원(始原)으로 봄이 대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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