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류 천일야화 미인탐방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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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김금원(金錦園) <제5話>

편집부

기사입력 2017-12-13 09:36     최종수정 2017-12-13 10:37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목록보기   폰트크게 폰트작게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가을이 되자 원주댁의 배가 하루가 다르게 불어났다. 배가 불어나자 팔월 한가위에 내려온다고 약속한 남편생각이 떠올랐다. 배가 불어나는 만큼 그리움도 같이 더해갔다. “무정한 사람...” 밤이 되면 마음이 더 허전해졌다.

금원과 경춘을 가졌을 때는 가져보지 못한 마음이다. 여자의 마음은 조강지처든 소실이든 같은 것일 터다. 원주댁은 배가 불러오자 복대를 둘렀다. 임신이 어느새 부끄러운 나이가 되었다. 한가위는 부득부득 다가왔으나 한양에서는 깜깜 무소식이다.

원주댁은 한가위를 향해 나날이 커가는 달을 볼 때마다 사내를 기다리는 마음도 커짐을 느꼈다. 지난봄에 전례 없이 사타구니가 얼얼하도록 뜨거운 방사를 즐긴 후 김명원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사랑이다. 첫딸 금원이 14살이 되어서야 뒤늦게 사내를 통한 사랑에 눈을 뜬 것이다. 김명원은 약속을 지켰다. 그는 원주에 내려올 때는 어떻게든 3~4일 전에 소식을 전해왔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내려온다는 전갈도 없이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 특유의 큰기침을 하면서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옥골선풍의 헌헌장부다. 그 모습에 원주댁은 한 눈에 빠졌다. 첫눈에 서로 반한 그들은 그날로 화촉동방에 들어갔다.

한편 금원은 걷고 걸어서 유점사에 이르렀다. 달빛아래 유점사의 종소리는 신비하면서도 신의 세계로 착각할 정도로 편안하고 여유로웠다. 금원은 칠언율시(한구가 칠언으로 된 율시, 율시는 여덟구로 이뤄짐) 한수를 지었다. ‘낭떠러지 하늘과 암자 하나/ 산 북쪽 맑은 종소리 남쪽까지 울리네/ 흰구름 일어 흩어지니 골짜기가 눈앞에 펼쳐지고/ 밝은 달은 연못 속에 고요히 잠겼구나/ 부질없는 꿈에서 불현 듯 깨어/ 고요히 부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네/ 오십삼 부처 계신 맑은 곳에서/ 오래도록 영험한 지혜의 등불을 밝히고 싶구나’ 역시 시제(時題)가 없다.

열네 살의 남장 소녀의 시로 보기엔 너무 성숙하지 않은가! 그러할 진데 가녀린 소녀가 남장을 하고 천하명산 금강산 유람 길에 올랐을 것이다. 그런 금원이기에 원주댁은 금강원 유람을 허락했을 게다. 원주댁은 몇 날 몇 밤에 걸쳐 금원의 유람채비까지 준비해 주었다. 딸이 떠나야겠다고 고집을 피우자 어머니는 말리는 척 하면서 은밀히 떠날 채비를 착착 진행시켰다.

남장 차림이다. 금원은 비록 열네 살이나 남자들의 세상에 눈을 떴고 사대부들의 생활에 관심이 높았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천하명산 금강산 유람 길에 올랐다.

금원의 학문세계는 상당한 수준이다. 학자관료 사회인 조선의 웬만한 사대부들도 그녀의 수준에 이르기 어려웠을 터다. 당시 양반가에선 딸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경우 주로 《내훈》(內訓)이나 《여계》(女誡)·《여사서》(女四書)와 같은 현모양처에 필요한 책들을 읽혔다.

하지만 실학에 영향을 받은 아버지 김명원은 여느 집과는 달리 교육을 시켰다. 본가와는 달리 웃어른이 없어 소신껏 남달리 영특한 딸들을 가르쳤다. 금원이 《동몽선습》을 시작으로 《소학》에 사서삼경인 《논어》·《맹자》·《중용》·《대학》과 《시경》·《서경》·《주역》등을 공부하는데 2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처럼 학문의 세계를 넓혀가며 그녀는 덕과 학문을 갖춘 여군자(女君子)를 꿈꾸었다. 그리하여 사내대장부도 쉽지 않은 혈혈단신 여자의 몸으로 남장을 하고 금강산 유람에 올랐다. ‘흐르는 물은 활활 타는 불로 끓으려/ 바위 사이 깊고 맑은 물을 구한다/ 큰 표주박으로 달을 떠 항아리에 담고/ 작은 표주박으로 강물을 떠 병에 담는다’ 소동파의 《강물을 길어와 차를 달이다》 한부분이다.

금원이 즐기는 시인은 고려의 정지상과 이달·이옥봉·허난설헌, 그리고 정약용까지 폭넓다. ‘연잎 무성하고 연밥 많은데/ 연꽃 사이에서 들려오는 처녀의 노랫소리/ 못 저 위쪽에서 보자던 임 만나러/ 물결 거슬러 힘차게 노 저어가네’ 이달의 《대동강》이다. 금원은 이 시를 특별히 즐겨 암송하였다. 그녀의 지적욕구와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의지의 표시다. 당시 여자로서는 꿈꾸기조차 쉽지 않은 행동을 금원은 남장을 하고 과감히 도전했던 것이다.

김명원은 아직 등과에 오르지 못했으나 지체 높은 사대부다. 원주댁은 그런 김명원에 한 눈에 반해 소실이 되었다. “금원이한테는 소식이 있었소?” 원주댁이 배가 불러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일합(一合)을 즐기고 다시 술상을 가운데 놓고 마주 앉았을 때다. “예, 대감 무소식이 희소식이겠지요...” “당신 얼굴이 많이 안됐소이다.” “그렇게 보이세요? 대감... 알아맞혀보세요. 소첩이 왜 얼굴이 수척해졌는지?” 원주댁은 일부러 배를 더 내밀었다. 원주댁은 참다못해 몇 번이고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소첩이 늦둥이를 가졌어요! 대감이 봄에 오셨을 때 소첩은 마침 배란기였었어요...” “그렇소?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요...” 김명원은 전례 없이 원주댁을 뜨겁고 사랑스런 표정으로 끌어안았다. “숨이 차요. 그만 놓아주세요!” 김명원의 뜨거운 품에서 가녀린 여인의 울음 섞인 슬픈 음성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원주댁은 배가 부쩍부쩍 불러오자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다. 금원과 경춘이 서자라는 신분에서 영특함이 묻혀버림이 가슴 아픈데 한 아이가 더 나오면 어미로서 감당하기 어려워서다.

자신이야 스스로 멘 멍에를 달갑게 받아들이는 입장이지만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엔 용서가 안되었다. 더욱이 김명원은 사내를 바라지만 원주댁은 차라리 계집아이를 원하고 있다. 사내보다 계집아이가 사회생활에 덜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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